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40, 구당서 돌궐전-3)

상 상 2015. 1. 26. 17:5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40, 구당서 돌궐전-3)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구당서 돌궐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舊唐書 卷194돌궐열전(突厥列) 144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舊唐書/ 列傳/ 卷一百九十四 上

번 역 문

원 문

6. 거비(가한)

이보다 앞서정관 연중에돌궐 별부에 거비라는 자가 있었는데역시 아사나의 족속이었으며. 대대로 작은 가한이었는데(궁정)은 금산의 북쪽에 있었다.힐리가한이 패한 후북쪽 황무지의 여러 부족들이 장차 대가한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으나때마침 설연타가 가한이 되자거비는 감당하지 못하고마침내 소속 부락을 이끌고 ()연타에 귀부하였다. 사람됨이 용맹하고 씩씩하며꾀와 지략이 있어자못 무리가 모여들었다. ()연타가 미워해 장차 죽이려하자거비는 몰래 그 모의를 알아채고옛 땅에 숨어 들어가니그 땅은 서울에서 만리나 떨어졌고정예병이 3만명이었으며자칭 을주거비가한이라고 하였다. 서쪽에는 가라록이 있었고북쪽에는 결골이 있었는데모두 예속하였다. (당나라가 설)연타를 격파한 이후에 [정관 21(647)에 거비가한이] 아들 사발라 특근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토산품을 바치면서 또한 (가한이) 몸소 조정에 들어오기를 청했다. 태종이 장군 곽광경을 보내 (거비가한을) 불러들이려 했으나 결국 오지 않았기 때문에 태종이 크게 노했다.

정관 23(649)에 우효위랑장 고간(高侃)을 보내 몰래 회흘과 복골 등의 병사들을 끌어들여 (거비가한을) 습격했다. (에 속해 있었던 가라록과 처목곤)의 추장 가라록니숙궐 사리발과 발새복처목곤막하돌 사근 등이 부락을 이끌고 차비(가한)을 배반해 서로 이어 와서 항복했다.

영휘 원년(650)()간의 군대가 아식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거비(가한)은 당나라의 군대(王師)가 도착하자 그 부락의 병사들을 소집했음에도 모두가 달려오지 않자 결국 그의 처자와 따르는 수백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달아났고 그 백성들은 모두 [당나라에] 항복했다. ()간이 정예 기병을 이끌고 거비(가한)을 추격해 사로잡아 경사로 보내자 바로 사묘(社廟)에 바쳤다가 다시 소릉에도 바쳤다. 고종은 일일이 그 죄를 따졌으나 용서한 다음에 좌무위장군으로 삼아 장안에 저택을 내려주었으며 그의 남은 백성들을 울독군산에 살도록 조치하고 낭산도독()을 두어 통제하도록 했다. 거비(가한)의 장자 갈만타는 이전에 발실밀 부락을 통할했다. 거비(가한)이 패하기 이전에 아들 암삭을 보내 조정에 들어오자 태종이 (그를) 어여삐 여겨 좌둔위장군으로 삼고 다시 신려주를 두어 그 백성을 거느리게 했다.

先是貞觀中突厥別部有車鼻者亦阿史那之族也代為小可汗牙在金山之北頡利可汗之敗北荒諸部將推為大可汗遇薛延陀為可汗車鼻不敢當遂率所部歸於延陀為人勇烈有謀略頗為眾附延陀惡而將誅之車鼻密知其謀竄歸於舊所其地去京師萬里勝兵三萬人自稱乙注車鼻可汗西有歌羅祿北有結骨皆附隸之自延陀破後遣其子沙鉢羅特勤來朝貢方物又請身自入朝太宗遣將軍郭廣敬徵之竟不至太宗大怒貞觀二十三年遣右驍衞郎將高侃潛引迴紇僕骨等兵眾襲擊之其酋長歌邏祿泥孰闕俟利發及拔塞匐處木昆莫賀咄俟斤等率部落背車鼻[]及拔塞匐處木昆 「字各本原作」,據寰宇記卷一九六改。,相繼來降永徽元年侃軍次阿息山車鼻聞王師至召所部兵皆不赴遂攜其妻子從數百騎而遁其眾盡降侃率精騎追車鼻獲之送于京師仍獻于社廟又獻于昭陵高宗數其罪而赦之拜左武衞將軍賜宅於長安處其餘眾於鬱督軍山置狼山都督以統之車鼻長子羯漫陀先統拔悉密部車鼻未敗前遣其子菴鑠入朝太宗嘉之拜左屯衞將軍更置新黎州以統其眾

거비(가한)이 이미 망한 다음 돌궐이 모두 중국 땅의 신하가 되었고, 이에 [그의 땅에] 선우(單于)와 한해(瀚海) 두 도호부를 나누어 두었다. 선우도호[]는 낭산과 운중, 상건의 세 도독()와 소농() 14개 주를, 한해도호[]는 한해와 금미 신려 등 7개의 도독()와 선악주 하란주 등 8개의 주를 통할했고, 각각 그 수령을 도독(都督)과 자사로 삼았다. 고종이 동쪽으로 태산에 봉선 했는데, 낭산도독 갈라록 사리 등 수령 30여 인이 모두 [태종을] 호종(扈從)()(東嶽) 아래까지 와서 (봉선의식에 참여한 후에) 봉선을 기념한 비석에 (그들의) 이름이 새겼다. (이로 인해) 영휘년간(650655) 이후 거의 30년 동안 북쪽 변방[北鄙]에는 아무 일도 없게 되었다.

車鼻既破之後突厥盡為封疆之臣於是分置單于瀚海二都護府單于都護領狼山雲中桑乾三都督蘇農等一十四州瀚海都護領瀚海金微新黎等七都督仙萼賀蘭等八州各以其首領為都督刺史高宗東封泰山狼山都督葛邏祿社利等首領三十餘人並扈從至嶽下勒名於封禪之碑自永徽已後殆三十年北鄙無事

조로(調露) 원년(679)에 선우(도호부가) 관내에 있던 돌궐 수령 아사덕 온박과 (아사덕) 봉직의 두 부락이 비로소 잇달아 반란을 일으켜 (아사나) 니숙복을 가한(可汗)으로 옹립하자 24주가 모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호응했다. 고종은 홍려경 [선우대도호부 장사(長史)] 소사업과 우천우()장군 이경가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도록 했으나 도리어 [아사덕]온박에게 패해 죽은 병사가 만여 인이나 되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예부상서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태복소경 이사문과 영주도독 주도무 등을 거느리고 30여 만을 이끌고 (아사덕)온박을 공격하라고 해 크게 격파하자 (아사나)니숙복이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아울러 (배행검은 아사덕) 봉직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영륭 원년(680)에 돌궐은 또 힐리(가한의) 종형(從兄)의 아들인 아사나 복념을 하주(夏州)에서 맞아들여 ()하를 건너가 가한으로 옹립했는데, 여러 부락이 다시 이에 호응해 따랐다. (황제가) 또 조칙을 내려 배행검에게 장군 조계숙과 정무정 이숭직, 이문간 등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라고 했다. (아사나)복념은 궁박하고 급하게 되자 ()행검에게 가서 항복했다. ()행검이 마침내 (아사나)복념을 사로잡아 경사(서울: 장안)에 보내자 동시(東市)에서 베었다.

영순2(683)돌궐의 아사나 골돌록이 다시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調露元年單于管內突厥首領阿史德溫傅奉職二部落始相率反叛立泥孰匐為可汗二十四州並叛應之高宗遣鴻臚卿蕭嗣業右千牛將軍李景嘉率眾討之反為溫傅所敗兵士死者萬餘人又詔禮部尚書裴行儉為定襄道行軍大總管率太僕少卿李思文營州都督周道務等統眾三十餘萬討擊溫傅大破之泥孰匐為其下所殺并擒奉職而還永隆元年突厥又迎頡利從兄之子阿史那伏念於夏州將渡河立為可汗諸部落復響應從之又詔裴行儉率將軍曹繼叔程務挺李崇直李文暕等討之伏念窘急詣行儉降行儉遂虜伏念詣京師斬于東市永淳二年突厥阿史那骨咄祿復反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