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거비(가한) 이보다 앞서,정관 연중에,돌궐 별부에 거비라는 자가 있었는데,역시 아사나의 족속이었으며. 대대로 작은 가한이었는데,아(궁정)은 금산의 북쪽에 있었다.힐리가한이 패한 후,북쪽 황무지의 여러 부족들이 장차 대가한으로 추대하려고 하였으나,때마침 설연타가 가한이 되자,거비는 감당하지 못하고,마침내 소속 부락을 이끌고 (설)연타에 귀부하였다. 사람됨이 용맹하고 씩씩하며,꾀와 지략이 있어,자못 무리가 모여들었다. (설)연타가 미워해 장차 죽이려하자,거비는 몰래 그 모의를 알아채고,옛 땅에 숨어 들어가니,그 땅은 서울에서 만리나 떨어졌고,정예병이 3만명이었으며,자칭 을주거비가한이라고 하였다. 서쪽에는 가라록이 있었고,북쪽에는 결골이 있었는데,모두 예속하였다. (당나라가 설)연타를 격파한 이후에 [정관 21년(647)에 거비가한이] 아들 사발라 특근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토산품을 바치면서 또한 (가한이) 몸소 조정에 들어오기를 청했다. 태종이 장군 곽광경을 보내 (거비가한을) 불러들이려 했으나 결국 오지 않았기 때문에 태종이 크게 노했다. 정관 23년(649)에 우효위랑장 고간(高侃)을 보내 몰래 회흘과 복골 등의 병사들을 끌어들여 (거비가한을) 습격했다. 그(에 속해 있었던 가라록과 처목곤)의 추장 가라록니숙궐 사리발과 발새복처목곤막하돌 사근 등이 부락을 이끌고 차비(가한)을 배반해 서로 이어 와서 항복했다. 영휘 원년(650)에 (고)간의 군대가 아식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거비(가한)은 당나라의 군대(王師)가 도착하자 그 부락의 병사들을 소집했음에도 모두가 달려오지 않자 결국 그의 처자와 따르는 수백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달아났고 그 백성들은 모두 [당나라에] 항복했다. (고)간이 정예 기병을 이끌고 거비(가한)을 추격해 사로잡아 경사로 보내자 바로 사묘(社廟)에 바쳤다가 다시 소릉에도 바쳤다. 고종은 일일이 그 죄를 따졌으나 용서한 다음에 좌무위장군으로 삼아 장안에 저택을 내려주었으며 그의 남은 백성들을 울독군산에 살도록 조치하고 낭산도독(부)을 두어 통제하도록 했다. 거비(가한)의 장자 갈만타는 이전에 발실밀 부락을 통할했다. 거비(가한)이 패하기 이전에 아들 암삭을 보내 조정에 들어오자 태종이 (그를) 어여삐 여겨 좌둔위장군으로 삼고 다시 신려주를 두어 그 백성을 거느리게 했다. | 先是,貞觀中,突厥別部有車鼻者,亦阿史那之族也,代為小可汗,牙在金山之北。頡利可汗之敗,北荒諸部將推為大可汗,遇薛延陀為可汗,車鼻不敢當,遂率所部歸於延陀。為人勇烈,有謀略,頗為眾附。延陀惡而將誅之,車鼻密知其謀,竄歸於舊所,其地去京師萬里,勝兵三萬人,自稱乙注車鼻可汗。西有歌羅祿,北有結骨,皆附隸之。自延陀破後,遣其子沙鉢羅特勤來朝,貢方物,又請身自入朝。太宗遣將軍郭廣敬徵之,竟不至,太宗大怒。貞觀二十三年,遣右驍衞郎將高侃潛引迴紇、僕骨等兵眾襲擊之。其酋長歌邏祿泥孰闕俟利發及拔塞匐處木昆莫賀咄俟斤等率部落背車鼻[四]及拔塞匐處木昆 「及」字各本原作「乃」,據寰宇記卷一九六改。,相繼來降。永徽元年,侃軍次阿息山。車鼻聞王師至,召所部兵,皆不赴,遂攜其妻子從數百騎而遁,其眾盡降。侃率精騎追車鼻,獲之,送于京師,仍獻于社廟,又獻于昭陵。高宗數其罪而赦之,拜左武衞將軍,賜宅於長安,處其餘眾於鬱督軍山,置狼山都督以統之。車鼻長子羯漫陀先統拔悉密部。 車鼻未敗前,遣其子菴鑠入朝,太宗嘉之,拜左屯衞將軍,更置新黎州以統其眾。 |
거비(가한)이 이미 망한 다음 돌궐이 모두 중국 땅의 신하가 되었고, 이에 [그의 땅에] 선우(單于)와 한해(瀚海) 두 도호부를 나누어 두었다. 선우도호[부]는 낭산과 운중, 상건의 세 도독(부)와 소농(주) 등 14개 주를, 한해도호[부]는 한해와 금미 신려 등 7개의 도독(부)와 선악주 하란주 등 8개의 주를 통할했고, 각각 그 수령을 도독(都督)과 자사로 삼았다. 고종이 동쪽으로 태산에 봉선 했는데, 낭산도독 갈라록 사리 등 수령 30여 인이 모두 [태종을] 호종(扈從)해 (동)악(東嶽) 아래까지 와서 (봉선의식에 참여한 후에) 봉선을 기념한 비석에 (그들의) 이름이 새겼다. (이로 인해) 영휘년간(650~655) 이후 거의 30년 동안 북쪽 변방[北鄙]에는 아무 일도 없게 되었다. | 車鼻既破之後,突厥盡為封疆之臣,於是分置單于、瀚海二都護府。單于都護領狼山雲中桑乾三都督、蘇農等一十四州,瀚海都護領瀚海金微新黎等七都督、仙萼賀蘭等八州,各以其首領為都督、刺史。高宗東封泰山,狼山都督葛邏祿社利等首領三十餘人,並扈從至嶽下,勒名於封禪之碑。自永徽已後,殆三十年,北鄙無事。 |
조로(調露) 원년(679)에 선우(도호부가) 관내에 있던 돌궐 수령 아사덕 온박과 (아사덕) 봉직의 두 부락이 비로소 잇달아 반란을 일으켜 (아사나) 니숙복을 가한(可汗)으로 옹립하자 24주가 모두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호응했다. 고종은 홍려경 [선우대도호부 장사(長史)] 소사업과 우천우(위)장군 이경가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도록 했으나 도리어 [아사덕]온박에게 패해 죽은 병사가 만여 인이나 되었다. 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예부상서 배행검을 정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태복소경 이사문과 영주도독 주도무 등을 거느리고 30여 만을 이끌고 (아사덕)온박을 공격하라고 해 크게 격파하자 (아사나)니숙복이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아울러 (배행검은 아사덕) 봉직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영륭 원년(680)에 돌궐은 또 힐리(가한의) 종형(從兄)의 아들인 아사나 복념을 하주(夏州)에서 맞아들여 (황)하를 건너가 가한으로 옹립했는데, 여러 부락이 다시 이에 호응해 따랐다. (황제가) 또 조칙을 내려 배행검에게 장군 조계숙과 정무정 이숭직, 이문간 등을 이끌고 가서 토벌하라고 했다. (아사나)복념은 궁박하고 급하게 되자 (배)행검에게 가서 항복했다. (배)행검이 마침내 (아사나)복념을 사로잡아 경사(서울: 장안)에 보내자 동시(東市)에서 베었다. 영순2년(683년),돌궐의 아사나 골돌록이 다시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 調露元年,單于管內突厥首領阿史德溫傅、奉職二部落始相率反叛,立泥孰匐為可汗,二十四州並叛應之。高宗遣鴻臚卿蕭嗣業、右千牛將軍李景嘉率眾討之,反為溫傅所敗,兵士死者萬餘人。又詔禮部尚書裴行儉為定襄道行軍大總管,率太僕少卿李思文、營州都督周道務等統眾三十餘萬,討擊溫傅,大破之,泥孰匐為其下所殺,并擒奉職而還。永隆元年,突厥又迎頡利從兄之子阿史那伏念於夏州,將渡河立為可汗,諸部落復響應從之。又詔裴行儉率將軍曹繼叔、程務挺、李崇直、李文暕等討之。伏念窘急,詣行儉降。行儉遂虜伏念詣京師,斬于東市。永淳二年,突厥阿史那骨咄祿復反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