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리(가한)이 패망하자,그 부락은 혹은 설연타로 달아나거나,혹은 서역으로 달아났는데,(그 중에서 중국으로) 항복해온 자가 가장 많았다. (이에) 조서로 변경을 안정시킬 수 있는 계책을 논의하라고 했다.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이) 말했다.“돌궐이 스스로 강성함으로 믿고,중국을 어지럽힌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하늘이 정말 (돌궐을) 없애자,궁해져 와서 우리나라에 귀순했으나,본래부터 올바르게 살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귀환 명령에 따라,그 종족 부락을 나누어,하남의 연(주)와 예(주) 땅에 옮겨 주현(州縣)에 흩어져 살게 하고,각자 농사와 길쌈을 해,백만의 돌궐인들[胡虜]을 백성으로 삼을 수 있다면,중국에는 호구를 늘리는 이익이 있고,장성 북쪽을 늘 비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중서령 온언박만이 (후)한 (광무제) 건무 년간(25~220)에 항복한 흉노를 오원새 부근에 두었던 선례를 따라, 그들의 부락을 보전하고,그들을 변경의 방패로 삼으며,또한 그들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않게,위로하고 어루만진다면,첫째 빈 땅을 채울 수 있고, 둘째 (돌궐을) 의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청했다. (또한 그는) 만약 (돌궐을) 하남의 연주와 예주로 보낸다면,그들의 천성을 어그러뜨리는 것이라,그들을 보듬어 키우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했다. 태종이 그(의 의견)을 따르려고 했다. (그러자) 비서감 위징이 아뢰어 말했다.“돌궐은 예로부터 지금까지,이번처럼 깨지고 패한 적이 없었는데,이는 하늘이 (그들의) 소굴을 절멸시킨 것이고,종묘의 신령스런 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대대로 중국을 노략질해 백성들에게 원수가 되었는데 폐하께서는 그들이 항복하자 죽일 수 없어서 바로 하북으로 돌려보내 그 옛 땅에 살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돌궐 사람들은 인면수심이라 우리와 같은 족속의 종류가 아니니 강하면 반드시 약탈과 도둑질을 하고, 약하면 비굴하게 굴복하면서도 은혜와 옳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천성입니다. 진(秦)나라와 한나라가 그들의 천성이 그와 같음을 걱정했기 때문에 용맹한 장수를 보내 (그들을) 격파하고 하남을 점령해 군현으로 만들었는데, (그와 달리) 폐하께서는 어찌해 내지에 그들을 살게 하려고 하십니까? 또 지금 항복한 사람들이 거의 10만에 이르는데 몇 년 내에 바로 그들이 백배로 늘어나 우리의 곁에 살게 되면 경기지역(王畿)과 가까워 없애기 어려운 우환이 되어 장차 훗날의 화근이 될 것이니 더욱더 그들을 하남에 살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온언박이 아뢰어 말했다.“천자는 만물을 하늘처럼 덮을 수 있고 땅처럼 실을 수 있어야 하니 우리에게 귀순하는 자는 반드시 키워주어야 합니다. 지금 파멸되고 남은 돌궐의 백성이 마음을 돌려 항복했는데, 폐하가 만약 불쌍히 여기지 않고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천지의 도(를 따른 것)이 아니므로, 사이(四夷)의 뜻을 막는 것은 어리석은 제 소견으로는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을) 보내 하남에 살게 하는 것은 소위 죽은 것을 살리고 망한 것을 다시 존속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그들이) 우리의 은덕을 생각하고 끝내 반역하지 않을 것입니다.” 위징이 다시 말했다.“(서)진시대에도 (조)위(曹魏) 시기처럼 흉노 부락을 (내)군(內郡) 가까운 곳에 살게 했는데, 오(吳)나라를 평정한 이후에 곽흠과 강통이 (서진) 무제에게 (이들을) 장성 밖으로 축출할 것을 권했으나, (곽)흠 등의 말을 듣지 않아 수년 후에 결국 (흉노가) 전수(瀍水)와 낙(수)[인근의 땅]을 함락했습니다. 전대에 이런 예가 있고 그런 교훈도 멀지 않으니 폐하께서 반드시 (온)언박의 말을 따라 (돌궐을) 하남에 살게 하신다면 (이것은) 바로 짐승을 길러 자신(의 옆)에게 근심을 남겨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온)언박이 다시 말했다.“듣건대 성인의 도는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옛날의 현명한 (선)왕(先王)은 가르침에 구분을 두지 않았습니다. 돌궐의 남은 무리들이 목숨 때문에 우리에 귀순하니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고 보살피며 거두어 내지에 살게 하면서 우리의 뜻을 품게 하고 예법으로 가르친다면 몇 년 후에는 모두 농민이 되고, 그 추장을 뽑아 보내 숙위(宿衛)로 살게 하면 위엄을 두려워하며 덕을 품게 될 것이니 어찌 걱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후한) 광무(제)가 남선우를 내군(內郡)에 살게 해 한나라의 번병(藩屛)으로 삼았으나 한 세대가 지나도록 반역이 없었습니다.” (온)언박이 이미 능란한 언변으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자 태종이 마침내 그의 계책을 써서 삭방(朔方)의 땅에 유주에서 영주(靈州)에 이르기까지 순(주), 우(주), 화(주) 장(주) 네 개 주에 도독부를 두고, 힐리(가한)의 땅을 여섯 개의 주로 나누어 동쪽에는 정양도독부, 서쪽(右)에는 운중도독부를 설치해 부락의 백성을 통솔하게 했다. 그 추장 중에서 들어온 자들에게 장군과 중랑장 등의 관직을 주어 조정(의 조회)에서 늘어서게 했는데, 5품 이상의 (관리가) 백여 명이었으며 그로 인해 장안에 들어와 살게 된 사람이 수천 가에 이르렀다. [정관 13년(639)에 아사나]결사솔의 반란이 발생한 이후에야 태종이 비로소 (돌궐의 위협을) 걱정했다. 또한 상소하는 사람 대다수가 돌궐을 중국에 살게 하는 것이 모두 편안하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돌궐을) 하북으로 이주시키고 우무후(위)대장군 화주도독 회화군왕(아사나) 사마를 을미니숙사리필가한(乙彌泥孰俟利苾可汗)으로 삼고 이씨(李氏)로 성을 내려주면서 그의 부락을 데리고 가서 하북에 아정을 세우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