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 신당서 토번전-18)

상 상 2015. 1. 16. 17:36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6, 신당서 토번전-18)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下(吐蕃下)

                                            번                 역               문

                 원              문

81) 대중 3(849) ()비비(婢婢)가 하원에 주둔하였는데, 상공열이 하()를 건너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를 공격하였으나 상공열에게 패했다. ()비비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교량을 지켰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여 다리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상공열은 좁은 길을 통해 계정령관(雞頂嶺關)으로 나와 협곡에 다리를 만들어 ()비비를 공격하였다.

백토령(白土嶺: 청해성 서녕 남쪽)에 이르러 [상비비의] 장수 상탁라탑장을 패퇴시키고 이우협(犛牛硤)으로 들어가 싸웠다. ()비비의 장수 촉로공력이 산협을 끼고 진지를 고수하여 상공열을 곤궁하게 만들고자 하였는데, 대장 마리비자가 따르지 않자 병이 있다고 사직하고 먼저 돌아갔다. 마리비자가 급히 상공열을 공격하였으나 그 일전으로 전사하였다. 비비는 군량이 다해 무리를 이끌고 감주(甘州) 서쪽 변경으로 향했고, 탁발회광에게 지키게 했는데 상공열 휘하의 다수가 그에 귀부하였다.

大中三年婢婢屯兵河源聞恐熱謀度河急擊之為恐熱所敗婢婢統銳兵扼橋亦不勝焚橋而還恐熱間出鷄頂嶺關馮硤為梁攻婢婢至白土嶺敗其將尚鐸羅榻藏進戰犛牛硤婢婢將燭盧鞏力欲負硤自固以困恐熱大將磨離羆子不從乃辭疾先歸羆子急擊恐熱一戰而死婢婢糧盡引眾趨甘州西境以拓拔懷光居守恐熱麾下多歸之

82) 상공열이 선주(), 곽주(), 과주(), 숙주(), 이주(), 서주(西) 등지를 크게 노략질하였는데, 지나가는 곳마다 포로를 삼거나 살륙하니, 시신이 어지러이 쌓여 있었고, 휘하 병사들은 안으로 원망하면서 모두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 때 [상공열은] 거짓으로 장차 당의 병사 50만을 청하여 이 난을 수습할 것이라고 하고, 위주(渭州)를 점거하여 찬보에 책립되기를 원하여, 표문()을 받들어 당에 귀부하였다. 선종(宣宗)은 조서를 내려 태복경 육탐에게 부절을 가지고 가서 [상공열을] 위로하도록 하고, 경원(涇原), 영무, 봉상, 빈녕, 진무(振武) 등의 병사로 하여금 [상공열을] 도와 영접하도록 했다. 상공열이 이미 도착하자 상서좌승 이경양에게 조서를 내려 그가 원하는 것을 묻게 했다. 상공열은 매우 오만하여 하위절도사가 되고자 하였으나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귀환하는 길에 함양교를 지나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거사를 일으키고 오직 바란 것은 이 강을 건너 당과 경역을 나누고자 했을 뿐이다.” 이에 다시 낙문천(落門川)으로 향해 흩어진 병졸을 거두어 장차 변경을 침범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오랜 비를 만나 양식이 끊겨 상공열은 곽주(廓州)로 도주하였다.

恐熱大略鄯西等州所過捕戮積尸狼藉麾下內怨皆欲圖之乃揚聲將請唐兵五十萬共定其亂保渭州求冊為贊普奉表歸唐宣宗詔太僕卿陸躭持節慰勞命涇原靈武鳳翔邠寧振武等兵迎援恐熱既至詔尚書左丞李景讓就問所欲恐熱倨夸自大且求河渭節度使帝不許還過咸陽橋咄歎曰:「我舉大事覬得濟此河與唐分

。」於是復趨落門川收散卒將寇邊會久雨糧絕恐熱還奔廓州

 

83) 이때 봉상절도사 이빈이 청수(淸水)를 회복했다. 경원절도사 강계영이 원주(原州)를 회복하고, 석문 등 6개의 관()을 얻었으며, 사람과 가축 수만을 얻었다. 영무절도사 이흠이 안락주(安樂州: 영하성 중위현)를 얻으니 조서를 내려 이를 위주(威州)라고 했다. 빈녕절도사 장흠서가 소관을 회복했다. 봉상(鳳翔)이 진주(秦州)를 아울렀다. 산남서도절도사 정애가 부주(扶州)를 얻었다. (번역 원본에 번역이 누락된 부분: 鳳翔兵與吐蕃戰隴州斬首五百級~이하의 문장. <본인이 대략 번역하면....> 봉상병과 토번이 농주에서 싸워목을 벤 것이 5백급이다. 이 해에, 하주와 농주의 고령자 천여 명이 관하에서 알현하여, 천자가 스스로 연희루에 행차하여 관모와 허리띠를 주니 모두 다투어 변의복을 벗었다. 이로인해 4도병에게 차등있게 관모와 허리띠를 주도록 명령하고 공로가 있는 자를 기록하였다. 37관의 땅을 비옥하게 많이 만든자, 백성을 다스려 땅을 개간하고 곡식을 심은 자는 5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溫池委度 그 소금 전매권을 나누어 변경을 구휼하는데 썼다. 사도병(四道兵) 중에서 농사를 잘 짓는 자에게는 급여로 소를 주면 수자리 서는 사람은 그 재물 급여를 늘리고 다시 한 세대를 거친다. 상인이 변경 사람에게 왕래하여관과 진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병사들은 밭을 개간하고자 하니 백성과 같다.)

於是鳳翔節度使李玭復清水涇原節度使康季榮復原州取石門等六關得人畜幾萬靈武節度使李欽取安樂州詔為威州邠寧節度使張欽緒復蕭關鳳翔收秦州山南西道節度使鄭涯得扶州鳳翔兵與吐蕃戰隴州斬首五百級是歲隴高年千餘見闕下天子為御延喜樓賜冠帶皆爭解辮易服因詔差賜四道兵錄有勞者三州七關地腴衍者聽民墾蓺貸五歲賦溫池委度支榷其鹽以贍邊四道兵能營田者為給牛種戍者倍其資饟再歲一代商賈往來於邊者關鎮毋何留兵欲墾田與民同

84) 당초에 태종이 설인고를 토벌하여 농() 위쪽의 땅(농서-隴西를 뜻한다)을 얻었고, 이궤를 포로로 삼아 양주(涼州)를 얻었으며, 토욕혼, 고창을 격파하여 4(四鎭)을 개척했다. 이어서 현종은 황하의 적석, 완수 등의 군()을 아울렀으니, 중국은 40년 동안 척후나 경비를 두지 않았다. 윤대와 이오에 둔전을 개간하니 벼와 콩의 경작지가 넓게 펼쳐졌다. 개원문 위에 쓰기를 서쪽 끝까지 길은 99백 리라고 하여, 변경을 지키는 자들에게 만 리 까지 행할 일이 없음을 보였다. 건원(乾元) 이후, 농우, 검남, 서산 3(三州) 7(七關)의 군진(軍鎭) 감목(監牧) 3백 곳을 모두 잃었다. 헌종이 항상 천하도(天下圖)를 열람하곤 했는데, 하황(河湟) 일대의 옛 영역을 보고, 성난 모양으로 이들을 경략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이 상주하여 말하기를, “왕이 된 자는 공을 세우고 업을 이뤄야 세상에 드러내 현양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 명의 병사도 내지 않고, 피 흘리지 않으면서, (), ()이 스스로 귀속된다면, 천자께 존호를 바치도록 청하겠습니다.”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헌종은 일찍이 하(), ()을 걱정하셨으나 대업을 이루지 못하시고 승하하셨다. 지금 조종의 업적을 좇아 술회하는데, 그 의논이 순종과 헌종의 시호(謚號)를 논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자랑하여 후세에 드러내게 하라하고, 또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은 잠시 백성을 쉬게 할 것이니, 산외(山外: 사천성 성도 서부에 연접한 산악지대, 현재 사천성 송반현 첩계영의 서쪽) 여러 주는 후에 경영할 것을 기다려라.”

太宗平薛仁杲得隴上地虜李軌得涼州破吐谷渾高昌開四鎮玄宗繼收 黃河積石宛秀等軍中國無斥候警者幾四十年輪臺伊吾屯田禾菽彌望開遠門揭 候署曰西極道九千九百里」,示戍人無萬里行也乾元後隴右劍南西山三州七關軍鎮 監牧三百所皆失之憲宗常覽天下圖見河湟舊封赫然思經略之未暇也至是羣臣奏 言:「王者建功立業必有以光表於世者今不勤一卒血一刃而河湟自歸請上天子尊 號。」帝曰:「憲宗嘗念河湟業未就而殂落今當述祖宗之烈其議上順憲二廟謚號夸顯 後世。」又詔:「朕姑息民其山外諸州須後經營之。」

85) 이듬해(대중 5, 851) 사주(沙州)의 수령 장의조(張義潮)가 과주(), 사주(), 이주(), 숙주(), 감주() 11주의 지도를 바쳤다. 당초 장의조는 몰래 영웅호걸과 결탁하여 당에 귀부하였는데, 하루는 여러 무리가 무장하고 주성의 문 앞에서 함성을 지르고 [소란을 피우자], 한인(漢人)들이 모두 이들을 도왔는데, [성문을] 수비하던 토번의 군졸이 놀라 달아났고, 드디어 사주의 일을 [장의조가] 맡아 보게 되었다. [장의조는] 무기, 군수품 등을 잘 정비하였고, 한편으로 경작하고 한편으로 싸워, 그 나머지 주()들도 모두 회복하였다. [또한 장의조는] 매우 빼어나고 충성스러운 부장 열 명에게 표문을 몸에 지니고 동북으로 가서 천덕성(天德城: 오르도스 북쪽 황하 북안에 위치)에 이르도록 했는데, 방어사 이비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황제는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사신에게 조서를 가지고 가서 접수하고 위로하도록 명하니, 장의조는 사주방어사에 발탁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의군(歸義軍)이라 칭하고, 곧 절도사로 삼았다. 그 후 하주(), 위주(渭州)의 토번 장군 상연심이 자국이 패망함에 따라 역시 와서 우호관계를 맺었다. 진주자사 고병이 상연심과 혼말부(渾末部) 만 장()을 꼬셔서 항복시키니, 2(하주, 위주)를 수복하였고, 상연심은 무위장군에 임명하였다. 고병이 봉림관(鳳林關: 감숙성 임하현 서쪽)을 수복했고, 상연심을 하주, 위주 등지의 도유혁사(都游弈使)로 삼았다.

明年沙州首領張義潮奉瓜甘等十一州地圖以獻始義潮陰結豪英歸唐一日眾擐甲譟州門漢人皆助之虜守者驚走遂攝州事繕甲兵耕且戰悉復餘州以 部校十輩皆操挺內表其中東北走天德城防禦使李丕以聞帝嘉其忠命使者齎詔收慰擢義潮沙州防禦使俄號歸義軍遂為節度使其後河渭州虜將尚延心以國破亡亦獻 款秦州刺史高駢誘降延心及渾末部萬帳遂收二州拜延心武衞將軍駢收鳳林關以 延心為河渭等州都游弈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