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3, 신당서 토번전-1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卷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下(吐蕃下) 번 역 문 | 원 문 | 69) 토번은 논구립장을 보내 내조했고, 아직 토번 사신이 국경을 나가지 못했는데, 토번이 유주(宥州: 영주성-靈州城)를 공격하여, 영주(靈州)의 병사와 정원성(定遠城: 영하성 영하현 동북)에서 싸웠는데, 오랑캐가 이기지 못하고, [당군이 토번군] 2천 급을 참수했다. 평량진(平涼鎭)의 알사(遏使) 학자(郝玼)가 또 오랑캐 병사 2만을, 하주절도사 전진이 오랑캐 3천을 격파했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구립장 등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검남(劍南)의 병사가 아화(峨和: 사천성 송반현 서남)와 서계성(栖雞城: 사천성 면양현 부근)을 함락했다. [원화] 14년(819) 구립장 등을 돌려보냈다. 토번절도(吐蕃節度) 논이마, 재상 상탑장, 중서령 상기심아 등이 15만의 군대를 이끌고 염주를 포위해 비제(飛梯)와 아차(鵝車)로 성을 공격하니 자사 이문열이 이를 막았는데, 성이 무너지면 보수하고, 야간에는 적의 진영을 습격하며, 낮에는 나가 싸워 오랑캐 만 명을 격파하니 30일이 되어도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삭방장사 (사)경봉(敬奉)이 기습부대를 이끌고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대파하니 적이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 吐蕃使論矩立藏來朝,未出境,吐蕃寇宥州,與靈州兵戰定遠城,虜不勝,斬首二千級。平涼鎮遏使郝玼又破虜兵二萬,夏州節度使田縉破其眾三千,詔留矩立藏等不遣。劍南兵拔峨和、栖雞城。十四年,乃歸矩立藏等。吐蕃節度論二摩、宰相尚塔藏、中書令尚綺心兒總兵十五萬圍鹽州,為飛梯、鵝車攻城,刺史李文悅拒之,城壞輒補,夜襲其營,晝出戰,破虜萬人,積三旬不能拔。朔方將史敬奉以奇兵繞出虜背,大破之,解圍去。 | 70) 처음에 사주자사(沙州刺史- 사주: 감숙성 돈황현) 주정이 당 조정을 위해 [사주를] 굳게 지켰는데, 젠뽀(찬보)가 아장(牙帳)을 남산(南山: 감숙과 청해 교계 지역의 산간지방)으로 옮겨 상기심아로 하여금 그것을 공격하게 했다. 주정이 회골(回鶻)에 도움을 구했으나 일 년이 지나도록 원병이 이르지 않자, 성곽을 불태우고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가고자 하였으나, 모두 불가하다고 했다. 이에 주정은 도지병마사 염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초원의 수초를 살피게 하였는데, 새벽에 [염조가 주정을] 알현하고 하직 인사를 하는데, 주정의 근신 주사노와 함께 활을 쏘기로 하고, 활을 힘껏 당긴 후 서로 겸양하다가 갑자기 주사노에게 활을 쏘니 그가 즉사하였고, 곧 주정을 잡아 목 메달아 죽게 하고 자신이 사주를 장악했다. 사주성을 지키길 8년 능(綾) 한 단(端)으로 맥(麥) 일 두(斗)를 매집하니 이에 응하는 자가 많았고, 이에 염조가 기뻐 말하기를, “백성에게 양식이 있으니 끝까지 성을 사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두 해가 지나 양식과 군수품이 고갈되자 성에 올라 소리치며 말하기를, “만약 나를 다른 곳으로 유배시키지 않는다면 투항하겠습니다.”하니, 상기심아가 허락하고, 이에 [염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성을 공격한 이래 11년 후의 일이었다. 젠뽀는 상기심아로 하여금 사주성을 지키도록 했다. 후에 [염조는] 모반 혐의로 의심을 받았는데, 그의 장화 속에 독을 놓아 독사시켰다. 사주 사람들이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고 토번의 신하가 되었으나 매년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는 중국의 옷을 입고 대성통곡한 후에 이를 숨겼다. | 始,沙州刺史周鼎為唐固守,贊普徙帳南山,使尚綺心兒攻之。鼎請救回鶻,踰年不至,議焚城郭,引眾東奔,皆以為不可。鼎遣都知兵馬使閻朝領壯士行視水草,晨入謁辭行,與鼎親吏周沙奴共射,彀弓揖讓,射沙奴即死,執鼎而縊殺之,自領州事。城守者八年,出綾一端募麥一斗,應者甚眾。朝喜曰:「民且有食,可以死守也。」又二歲,糧械皆竭,登城而謼曰:「苟毋徙佗境,請以城降。」綺心兒許諾,於是出降。自攻城至是凡十一年。贊普以綺心兒代守。後疑朝謀變,置毒鞾中而死。州人皆胡服臣虜,每歲時祀父祖,衣中國之服,號慟而藏之。 | 71) 목종(穆宗, 재위: 820~824)이 즉위하고(장경 원년 즉, 821년), 비서소감 전계를 토번에 보내 이를 알리니, 토번의 사신이 다시 왔다. 오랑캐가 군대를 이끌고 영무에 주둔하였고, 영주(靈州)의 병사가 이를 막았다. 또한 청새봉을 침범하고 경주(涇州)로 들어와 하천을 따라 주둔하니 그 행렬이 50리에 이르렀다. 앞서 전계가 [젠뽀(찬보)의] 아장에 도착했을 때 오랑캐가 장무(長武)에서 회맹하고자 하였는데, 전계는 입을 닫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토번측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전계가 우리와 회맹할 것을 허락했다. 우리가 그래서 온 것이다.” 그리고 경주(涇)와 일 사(舍: 30리)의 거리에 와서 멈춰 섰다. 우군중위 양수겸을 좌우신책군 및 경서·북행영도감에 임명하고, 8개 진(鎭)의 병사를 내어 경주(涇州)를 돕도록 했다. 또한 전계를 침주사호참군으로 좌천시키고, 태부소경 소동을 화호사(和好使)로 삼아 토번에 파견했다. 처음에 하주(夏州) 전진(田縉)이 탐욕스러워 당항이 이를 원망하다가 토번을 끌어들여 약탈하게 되었다. 이에 학자(郝玼)가 맞서 싸워 많은 무리를 죽였고, 또한 이광안이 빈주(邠)의 병사를 이끌고 당도하니 토번이 퇴각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 왔다. 남쪽으로 아주(雅州)를 경략하고, 여러 방진(方鎭)에 조서를 내려 오랑캐와 접경한 경우 모두 삼가 변방 수비에 주의하도록 했다. | 穆宗即位,遣祕書少監田洎往告,使者亦來。虜引兵入屯靈武,靈州兵擊却之。又犯青塞烽,進寇涇州,瀕水而營,緜五十里。始洎至牙,虜欲會盟長武,洎含糊應之。至是顯言:「洎許我盟,我是以來。」逼涇一舍止。詔右軍中尉梁守謙為左右神策軍、京西北行營都監,發卒合八鎮兵援涇州,貶洎郴州司戶參軍,以太府少卿邵同持節為和好使。初,夏州田縉裒沓,党項怨之,導虜入鈔,郝玼與戰,多殺其眾。李光顏又以邠兵至,乃引去。復遣使者來。南略雅州,詔方鎮與虜接者謹備邊。 | 72) 장경 원년(821) 회골과 [당]의 화친 소식이 들리자, [토번이] 청새보를 침입하였으나 이문열에 쫓겨갔다. 곧 사신 상기력타사를 보내 내조하였는데 다시 회맹을 청하여 이를 허락했다. [당시] 최식, 두원영, 왕파가 정사를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태묘에 [회맹의 일을] 고할 것을 논의했다. 이에 예관(禮官)이 말하기를, “숙종과 대종(代宗) 모두 일찍이 토번과 회맹하였는데, 태묘에 고하지 않았습니다. 덕종의 건중 회맹은 그 약속한 내용이 중요한 것이어서 처음으로 태묘에 고했습니다. 평량 회맹 때는 또 다시 태묘에 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당시 회맹에 의미를 두지 않은 것입니다.”하니, 이에 의논을 멈췄다. 대리경 유원정을 회맹사(盟會使), 우사랑중 유사로를 부관으로 삼았다. 또한 조서를 내려 재상과 상서우복사 한고, 어사중승 우승유, 이부상서 이강, 병부상서 소부, 호부상서 양어릉, 예부상서 위수, 태상경 조종유, 사농경 배무, 경조윤 유공작, 우금오장군 곽총 및 토번의 사신 논눌라로 하여 경사(장안)의 서쪽 교외에서 회맹하게 했다. 젠뽀(찬보)는 맹약에서 말하기를, “두 나라는 서로 침범하지 않으며, 포로의 문제가 발생하면 옷과 양식을 주어 돌려보낸다.”라고 하여, 조정에서 동의했다. 회맹에 참여한 대신들의 명단은 모두 문서에 기록했다. 바야흐로 회맹을 하려고 할 때, 토번의 정예 기병이 노주(魯州: 영하 서쪽, 하곡-河曲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영주절도사(靈州節度使) 이진성이 대석산(大石山: 노주의 동남쪽)에서 싸워 이를 격파했다. 오랑캐가 사신 조국장(趙國章)을 보내와 재상에게 서신과 폐물을 바쳤다. | 長慶元年,聞回鶻和親,犯清塞堡,為李文悅所逐。乃遣使者尚綺力陀思來朝,且乞盟,詔許之。崔植、杜元穎、王播輔政,議欲告廟。禮官謂:「肅宗、代宗皆嘗與吐蕃盟,不告廟。德宗建中之盟,將重其約,始詔告廟。至會平涼,不復告,殺之也。」乃止。以大理卿劉元鼎為盟會使,右司郎中劉師老副之,詔宰相與尚書右僕射韓皋、御史中丞牛僧孺、吏部尚書李絳、兵部尚書蕭俛、戶部尚書楊於陵、禮部尚書韋綬、太常卿趙宗儒、司農卿裴武、京兆尹柳公綽、右金吾將軍郭鏦及吐蕃使者論訥羅盟京師西郊。贊普以盟言約:「二國無相寇讎,有禽生問事,給服糧歸之。」詔可。大臣豫盟者悉載名於策。方盟時,吐蕃以壯騎屯魯州,靈州節度使李進誠與戰大石山,破之。虜遣使者趙國章來,且致宰相信幣。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