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3, 신당서 토번전-15)

상 상 2015. 1. 9. 17:55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33, 신당서 토번전-15)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下(吐蕃下)

                                            번               역             문

                    원           문

69) 토번은 논구립장을 보내 내조했고, 아직 토번 사신이 국경을 나가지 못했는데, 토번이 유주(宥州: 영주성-靈州城)를 공격하여, 영주(靈州)의 병사와 정원성(定遠城: 영하성 영하현 동북)에서 싸웠는데, 오랑캐가 이기지 못하고, [당군이 토번군] 2천 급을 참수했다. 평량진(平涼鎭)의 알사(遏使) 학자(郝玼)가 또 오랑캐 병사 2만을, 하주절도사 전진이 오랑캐 3천을 격파했으며, 이에 조정에서는 명을 내려 구립장 등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검남(劍南)의 병사가 아화(峨和: 사천성 송반현 서남)와 서계성(栖雞城: 사천성 면양현 부근)을 함락했다.

[원화] 14(819) 구립장 등을 돌려보냈다. 토번절도(吐蕃節度) 논이마, 재상 상탑장, 중서령 상기심아 등이 15만의 군대를 이끌고 염주를 포위해 비제(飛梯)와 아차(鵝車)로 성을 공격하니 자사 이문열이 이를 막았는데, 성이 무너지면 보수하고, 야간에는 적의 진영을 습격하며, 낮에는 나가 싸워 오랑캐 만 명을 격파하니 30일이 되어도 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삭방장사 ()경봉(敬奉)이 기습부대를 이끌고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대파하니 적이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吐蕃使論矩立藏來朝未出境吐蕃寇宥州與靈州兵戰定遠城虜不勝斬首二千級平涼鎮遏使郝玼又破虜兵二萬夏州節度使田縉破其眾三千詔留矩立藏等不遣劍南兵拔峨和栖雞城十四年乃歸矩立藏等吐蕃節度論二摩宰相尚塔藏中書令尚綺心兒總兵十五萬圍鹽州為飛梯鵝車攻城刺史李文悅拒之城壞輒補夜襲其營晝出戰破虜萬人積三旬不能拔朔方將史敬奉以奇兵繞出虜背大破之解圍去

70) 처음에 사주자사(沙州刺史- 사주: 감숙성 돈황현) 주정이 당 조정을 위해 [사주를] 굳게 지켰는데, 젠뽀(찬보)가 아장(牙帳)을 남산(南山: 감숙과 청해 교계 지역의 산간지방)으로 옮겨 상기심아로 하여금 그것을 공격하게 했다. 주정이 회골(回鶻)에 도움을 구했으나 일 년이 지나도록 원병이 이르지 않자, 성곽을 불태우고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도망가고자 하였으나, 모두 불가하다고 했다. 이에 주정은 도지병마사 염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초원의 수초를 살피게 하였는데, 새벽에 [염조가 주정을] 알현하고 하직 인사를 하는데, 주정의 근신 주사노와 함께 활을 쏘기로 하고, 활을 힘껏 당긴 후 서로 겸양하다가 갑자기 주사노에게 활을 쏘니 그가 즉사하였고, 곧 주정을 잡아 목 메달아 죽게 하고 자신이 사주를 장악했다. 사주성을 지키길 8년 능() 한 단()으로 맥() 일 두()를 매집하니 이에 응하는 자가 많았고, 이에 염조가 기뻐 말하기를, “백성에게 양식이 있으니 끝까지 성을 사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두 해가 지나 양식과 군수품이 고갈되자 성에 올라 소리치며 말하기를, “만약 나를 다른 곳으로 유배시키지 않는다면 투항하겠습니다.”하니, 상기심아가 허락하고, 이에 [염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 성을 공격한 이래 11년 후의 일이었다. 젠뽀는 상기심아로 하여금 사주성을 지키도록 했다. 후에 [염조는] 모반 혐의로 의심을 받았는데, 그의 장화 속에 독을 놓아 독사시켰다. 사주 사람들이 모두 오랑캐의 옷을 입고 토번의 신하가 되었으나 매년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는 중국의 옷을 입고 대성통곡한 후에 이를 숨겼다.

沙州刺史周鼎為唐固守贊普徙帳南山使尚綺心兒攻之鼎請救回鶻踰年不至議焚城郭引眾東奔皆以為不可鼎遣都知兵馬使閻朝領壯士行視水草晨入謁辭行與鼎親吏周沙奴共射彀弓揖讓射沙奴即死執鼎而縊殺之自領州事城守者八年出綾一端募麥一斗應者甚眾朝喜曰:「民且有食可以死守也。」又二歲糧械皆竭登城而謼曰:「苟毋徙佗境請以城降。」綺心兒許諾於是出降自攻城至是凡十一年贊普以綺心兒代守後疑朝謀變置毒鞾中而死州人皆胡服臣虜每歲時祀父祖衣中國之服號慟而藏之

71) 목종(穆宗, 재위: 820~824)이 즉위하고(장경 원년 즉, 821), 비서소감 전계를 토번에 보내 이를 알리니, 토번의 사신이 다시 왔다. 오랑캐가 군대를 이끌고 영무에 주둔하였고, 영주(靈州)의 병사가 이를 막았다. 또한 청새봉을 침범하고 경주(涇州)로 들어와 하천을 따라 주둔하니 그 행렬이 50리에 이르렀다. 앞서 전계가 [젠뽀(찬보)] 아장에 도착했을 때 오랑캐가 장무(長武)에서 회맹하고자 하였는데, 전계는 입을 닫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토번측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를, “전계가 우리와 회맹할 것을 허락했다. 우리가 그래서 온 것이다.” 그리고 경주()와 일 사(: 30)의 거리에 와서 멈춰 섰다. 우군중위 양수겸을 좌우신책군 및 경서·북행영도감에 임명하고, 8개 진()의 병사를 내어 경주(涇州)를 돕도록 했다. 또한 전계를 침주사호참군으로 좌천시키고, 태부소경 소동을 화호사(和好使)로 삼아 토번에 파견했다. 처음에 하주(夏州) 전진(田縉)이 탐욕스러워 당항이 이를 원망하다가 토번을 끌어들여 약탈하게 되었다. 이에 학자(郝玼)가 맞서 싸워 많은 무리를 죽였고, 또한 이광안이 빈주()의 병사를 이끌고 당도하니 토번이 퇴각했다. 다시 사신을 보내 왔다. 남쪽으로 아주(雅州)를 경략하고, 여러 방진(方鎭)에 조서를 내려 오랑캐와 접경한 경우 모두 삼가 변방 수비에 주의하도록 했다.

穆宗即位遣祕書少監田洎往告使者亦來虜引兵入屯靈武靈州兵擊却之又犯青塞烽進寇涇州瀕水而營緜五十里始洎至牙虜欲會盟長武洎含糊應之至是顯言:「洎許我盟我是以來。」逼涇一舍止詔右軍中尉梁守謙為左右神策軍京西北行營都監發卒合八鎮兵援涇州貶洎郴州司戶參軍以太府少卿邵同持節為和好使夏州田縉裒沓党項怨之導虜入鈔郝玼與戰多殺其眾李光顏又以邠兵至乃引去復遣使者來南略雅州詔方鎮與虜接者謹備邊

72) 장경 원년(821) 회골과 []의 화친 소식이 들리자, [토번이] 청새보를 침입하였으나 이문열에 쫓겨갔다. 곧 사신 상기력타사를 보내 내조하였는데 다시 회맹을 청하여 이를 허락했다. [당시] 최식, 두원영, 왕파가 정사를 맡고 있었는데, 이들은 태묘에 [회맹의 일을] 고할 것을 논의했다. 이에 예관(禮官)이 말하기를, “숙종과 대종(代宗) 모두 일찍이 토번과 회맹하였는데, 태묘에 고하지 않았습니다. 덕종의 건중 회맹은 그 약속한 내용이 중요한 것이어서 처음으로 태묘에 고했습니다. 평량 회맹 때는 또 다시 태묘에 고하지 않았으니 이는 당시 회맹에 의미를 두지 않은 것입니다.”하니, 이에 의논을 멈췄다. 대리경 유원정을 회맹사(盟會使), 우사랑중 유사로를 부관으로 삼았다. 또한 조서를 내려 재상과 상서우복사 한고, 어사중승 우승유, 이부상서 이강, 병부상서 소부, 호부상서 양어릉, 예부상서 위수, 태상경 조종유, 사농경 배무, 경조윤 유공작, 우금오장군 곽총 및 토번의 사신 논눌라로 하여 경사(장안)의 서쪽 교외에서 회맹하게 했다. 젠뽀(찬보)는 맹약에서 말하기를, “두 나라는 서로 침범하지 않으며, 포로의 문제가 발생하면 옷과 양식을 주어 돌려보낸다.”라고 하여, 조정에서 동의했다. 회맹에 참여한 대신들의 명단은 모두 문서에 기록했다. 바야흐로 회맹을 하려고 할 때, 토번의 정예 기병이 노주(魯州: 영하 서쪽, 하곡-河曲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영주절도사(靈州節度使) 이진성이 대석산(大石山: 노주의 동남쪽)에서 싸워 이를 격파했다. 오랑캐가 사신 조국장(趙國章)을 보내와 재상에게 서신과 폐물을 바쳤다.

長慶元年聞回鶻和親犯清塞堡為李文悅所逐乃遣使者尚綺力陀思來朝且乞盟詔許之崔植杜元穎王播輔政議欲告廟禮官謂:「肅宗代宗皆嘗與吐蕃盟不告廟德宗建中之盟將重其約始詔告廟至會平涼不復告殺之也。」乃止以大理卿劉元鼎為盟會使右司郎中劉師老副之詔宰相與尚書右僕射韓皋御史中丞牛僧孺吏部尚書李絳兵部尚書蕭俛戶部尚書楊於陵禮部尚書韋綬太常卿趙宗儒司農卿裴武京兆尹柳公綽右金吾將軍郭鏦及吐蕃使者論訥羅盟京師西郊贊普以盟言約:「二國無相寇讎有禽生問事給服糧歸之。」詔可大臣豫盟者悉載名於策方盟時吐蕃以壯騎屯魯州靈州節度使李進誠與戰大石山破之虜遣使者趙國章來且致宰相信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