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정원 2년(786)에 창부랑중 조건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는데, 오랑캐는 이미 경(涇), 농(隴), 빈(邠), 영(寧)을 침입하여 백성과 가축을 노략질하고 농작물을 훼손하여 당 영내의 모든 주가 성문을 닫아걸었다. 적의 유격부대가 호치(好畤: 섬서성 건현 동남)에 이르니 좌금오장군 장헌보, 신책장 이승담 등이 함양에 주둔하였고, 하중(河中)의 혼감, 화주의 낙원광이 원군을 보냈다. 좌감문장군 강성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상결찬은 상채원(上砦原)에 주둔하고, 논걸타에게 명하여 [당에] 회맹을 청하게 했다. 봉상(鳳翔)의 이성은 부장 왕필을 보내 정예병 3천으로 밤을 틈타 견양(汧陽: 섬서성 견양현)에 들어가도록 했고, 다음날 토번의 중군을 압박하니 적군은 괴멸되었고, 상결찬은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 오랑캐의 군대 2만이 봉상(鳳翔)을 침범하였는데, 이성(李晟)이 이를 막았고, 여세를 몰아 최사보(摧沙堡: 감숙성 고원현 서북으로 청수 회맹 당시 토번군의 동쪽 변경이었다. 이 때 당의 서쪽 변경은 감숙성 평량현-平凉縣 동쪽 반원-潘源이었다)를 습격하여 곡식 창고를 불태우고 창고지기 병사를 참수했다. 토번이 염주(鹽)와 하주(夏州: 섬서성 유림현 서북)를 공격하니 자사 두언광과 탁발건휘가 지키기 못해 수하의 무리가 남쪽으로 도망가고 오랑캐가 그 땅을 얻었다. 천자는 변경의 백성이 고통을 받고 토번에 함락되니 조서를 내려 정전(正殿)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책망하였다. 낙원광에게 명하여 염주(鹽)와 하주(夏)를 경략하게 했다. | 貞元二年,詔倉部郎中趙建往使,而虜已犯涇、隴、邠、寧,掠人畜,敗田稼,內州皆閉壁。游騎至好畤,左金吾將軍張獻甫、神策將李昇曇等屯咸陽,河中渾瑊、華州駱元光援之。以左監門將軍康成使焉。尚結贊屯上砦原,亦令使論乞陀來請盟。鳳翔李晟遣部將王佖以銳兵三千夜入陽,明日,薄其中軍,虜驚潰走,結贊僅自脫。虜衆二萬侵鳳翔,李晟擊卻之,因襲破摧沙堡,燒儲廥,斬守者。吐蕃攻鹽、夏,刺史杜彥光、拓拔乾暉不能守,悉其衆南奔,虜遂有其地。天子以邊人殘沒,下詔避正殿,痛自咎。詔駱元光經略鹽、夏。 |
55) [정원] 3년(787)에 좌서자 최한, 이섬(李銛)을 차례로 토번에 사신으로 보냈다. 상결찬은 염주와 하주를 얻은 후 모두 병사를 주둔시켜 지켰고, 자신은 명사(鳴沙: 영하 중위현 동남)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의 수급에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낙원광, 한유괴가 변경에 인접하여 주둔하고, 마수(馬燧)가 석주(石州: 산서성 이석현)에 주둔하여 황하를 사이에 두고 서로 호응하니 상결찬이 크게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회맹을 청했으나 천자가 불허했다. 이에 [상결찬이 휘하의] 귀장(貴將) 논협열을 보내 많은 재물로 마수(馬燧)를 회유하니, 마수가 사사로운 정을 앞세워 몸소 천자를 알현하는데 변경의 여러 장수가 마수의 입조를 보고 모두 변경만 지키고 싸우지 않았다. 상결찬은 그 틈에 재빨리 도주하였는데, 말은 다수가 죽고, 병사는 걸을 수 없었으며 배고픈 기색이 역력했다. 최한이 명사(鳴沙)에 이르자 곧 상결찬에게 조서를 전하여 그가 약속을 어기고 염주와 하주를 함락시킨 일에 대해 꾸짖자 상결찬이 회답하기를, “본래 무정천(武亭川)의 공을 상주지 않아 온 것이며, 또한 변경의 경계비가 쓰러져 강역을 분명히 알기 어려웠으니 이것이 변경에 온 까닭입니다. 경주(涇州)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으며, 봉상(鳳翔)의 이령공(李令公: 이성-李晟)은 우리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다만 [당측에서] 강성(康成)이 사신으로 왔으나 모두 그간의 사정을 분명히 말 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대신이 당도하기를 바랐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고, 이에 철군하여 돌아갔습니다. 염주와 하주의 장수들은 우리 토번군을 두려워하여 성곽을 내어 우리와 화의하기를 청했으니 우리가 공격하여 함락시킨 것이 아닙니다. 만약 천자가 다시 회맹을 허락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이며, 오직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염주와 하주를 당에 반환하겠습니다.” 또한 청수의 맹약을 말하면서, 당시 참여한 대신이 적어 쉽게 맹약이 파기되었으니 재상과 원수 21명을 파견하여 회맹할 것을 청하였다. 또한 영염절도사 두희전, 경원절도사 이관은 외번(外蕃)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이들로 하여금 회맹을 주재하도록 청했다. 황제는 다시 최한을 보내 상결찬에게 말하기를, “두희전은 영주(靈州)를 지키고 있으며 관할 범위가 정해져 있으므로 경계를 넘는 것이 불가하다. 이관은 이미 다른 관직으로 이임하였으니 혼감을 맹회사(盟會使)로 삼고자 한다.”라고 전하였다. 오월에 청수(淸水)에서 회맹하기를 약정하고 토번으로 하여금 먼저 두 주(염주와 하주)를 반환하도록 하여 오랑캐의 신의를 시험하도록 했다. 상결찬이 청수가 길한 곳이 아니라고 하여 원주(原州) 토리수(土梨樹)에서 회맹할 것을 청하고 곧 두 주를 반환하니 천자가 이를 따랐다. | 三年,命左庶子崔澣、李銛踵使。結贊得鹽、夏,皆戍以兵,乃自屯鳴沙,然饋餉數困。於是駱元光、韓游衆濱塞而屯,馬燧次石州,跨河相掎角。結贊大懼,屢請盟,天子不許。即以貴將論頰熱厚賂乞和於燧,燧以為情,身入見天子,諸將以燧入,皆守壁不戰。結贊遽還走,馬多死,士不能步,有飢色。澣始至鳴沙,傳詔讓結贊破約陷鹽、夏,對曰:「本以武亭功未償乃來,又候碑仆,疆埸不明,故行境上。涇州乘城自保,鳳翔李令不納吾使,雖康成等來,皆不能致委曲。我日望大臣而卒無至者,我故引還。鹽、夏守將懼吾衆,以城丐我,非我敢攻也。若天子復許盟,虜之願也,唯所命,當以鹽、夏還唐。」又言清水盟,大臣少,故約易壞,請悉遣宰相元帥二十一人會盟。衆言靈鹽節度使杜希全、涇原節度使李觀,外蕃所信,請主盟。帝復使澣報結贊曰:「希全守靈州,有分地,不可以越境;觀既徙官,以渾瑊為盟會使。」約五月盟清水,使先效二州,以驗虜信。結贊辭清水非吉地,請會原州之土梨樹,乃歸二州。天子從之。 |
56) 혼감이 와서 명령을 받들었고, 최한형에게 병부상서를 제수하여 혼감의 부관을 삼았다. 혼감은 병사 2만을 거느리고 때를 기다렸는데, 낙원광에게 조서를 내려 그를 돕도록 했다. 재상이 회맹의 장소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좌신책장(左神策將) 마유린이 건의하여 말하기를, “토리수는 수풀이 우거지고 지세가 험하여 군대가 쉽게 매복할 수 있으므로 지세가 평탄하고 탁 트인 평량(平涼: 감숙성 평량현에 소재한 평량천)보다 못합니다. 또한 [평량은] 경주(涇)와 가까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에 회맹 장소가 평량으로 정해졌다. 혼감은 상결찬과 약속하여 주객(主客)이 모두 병사 3천을 거느리고 회맹단 밖에 이르고, [임시로 편성한] 시종 4백 명이 회맹단에 오르고, 순찰대가 서로의 군영을 왕래하여 감시하게 했다. 장차 회맹을 하려는데 상결찬이 정예 기병 3만을 서쪽에 매복시키고, [토번측] 순찰 기병이 혼감의 군영으로 들어갔을 때 혼감의 장수 양봉정 역시 토번의 군영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몰래 그들을 잡아 혼감이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객(客: 회맹에 참석한 토번측 인사)이 혼감 등에게 관을 쓰고 검을 찰 것을 청하니 모두 장막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이 때] 갑자기 오랑캐가 세 번 북을 울리자 무리가 소리지르며 일어났고, 혼감은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모른채 장막 뒤쪽으로 가서 재갈도 물리지 않은 말을 타고 십리나 달려 겨우 재갈을 물렸다. 오랑캐가 추격했고, 화살은 비오듯 하였으나 부상을 입지는 않았고, 낙원광의 군영에 도착하여 위험에서 벗어났다. 비장(裨將) 신영이 병사 수백을 거느리고 북쪽 언덕에 의지하여 적과 싸웠는데 화살이 다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판관 한엄, 감군 송봉조가 죽었다. 최한형, 판관 정숙구, 노필, 장서기(掌書記) 원동직, 열장(列將) 부여준, 마녕, 맹일화, 이지언, 낙연명, 범징, 마엄, 중인(中人: 환관) 유연옹, 구문진, 이조청 등 60여 명이 모두 포로가 되었고, 죽은 병사가 오백이며, 포로가 된 병사가 천여 명이었다. 최한형이 오랑캐에게 말하기를, “나는 최상서(尙書)이다. 상결찬은 나와 좋은 사이인데, 만약 나를 죽인다면 상결찬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하니, 이에 죽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에게 등에 나무 몽둥이를 지게 하고, 밧줄로 세 번 묶고, 다시 [그] 밧줄로 머리카락을 묶어 끌고 갔다. 밤에는 말뚝을 땅에 박아 거기에 묶어 눕히고, 다시 모직물로 덮어 보초가 그 위에 누웠다. 처음에 상결찬은 두희전(希全)과 이관(觀)을 붙들고자 하여 정예병을 이끌고 경사로 곧장 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또한 혼감 등을 잡고자 하여 빈틈을 타 침입하였으나 그의 계략이란 것이 원래 그런 정도였다. [상결찬이] 이미 떠난 후 옛 원주(原州)에 이르렀는데 장막에 앉아 최한형 등을 만나 오만하게 말하기를, “혼감이 무공(武功)에서 싸워 이긴 것은 모두 우리 군대가 힘쓴 까닭이다. 땅을 할양하여 우리에게 상주기로 하고도 이행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금가(金枷: 목에 채우는 형구)를 만들어 두고, 장차 반드시 혼감을 잡아 찬보(젠뽀)를 알현하게 할 것이지만, 지금은 기회를 잃었고, 헛되이 그대들을 붙잡아 두었으니 모두 무익하다. 이에 사신을 보내 그대들의 귀환을 알릴 것이다.” 처음에 최한형이 어려움을 맞아 종사(從史) 여온이 몸으로 적병을 막다가 여온은 부상을 입었으나 최한형은 위기를 모면했다. 오랑캐는 [여온의] 의로움을 가상히 여겨 후하게 대우하고 보살펴 주었다. 상결찬은 석문(石門)에 주둔하였는데, 구문진, 마녕, 마엄을 당으로 돌려보냈으나 최한형, 정숙구는 하주(河州)에, 신영은 곽주에, 부여준(扶餘準)은 선주(鄯州)에 구금하였다. 황제는 환관을 시켜 조서를 가지고 상결찬에게 주도록 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오랑캐는 염주와 하주에 주둔하였는데 봄 전염병이 크게 돌자 모두 귀환하고자 했다. 상결찬은 3천 기병으로 이들을 맞이하였는데, 불을 놓아 염주와 하주의 건물을 불태우고, 외성과 성루를 파괴하고 돌아가니, 두희전은 병사를 나눠 그것을(염주와 하주) 지켰다. 황제는 최한형 등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을 7품관에, 정숙구, 노필, 한엄, 맹일화, 신영, 이지언, 범징, 양분, 낙연명의 아들 한 명에게 8품관을, 원동직 이하 아들 한 명에게 9품관을 주었다. 결승군사(決勝軍使) 당량신에게 반원(潘原: 감숙성 평량현 동쪽)에 주둔하게 하고, 신책장(神策將) 소태평에게 농주(隴州)에 주둔하게 했다. 상결찬은 최한형, 맹일화, 유연옹을 석문으로 불러, 말 5필을 주어 변경으로 송환했으며, 표(表)를 받든 사신을 [함께] 보내 왔는데, 이관(李觀)이 말하기를, “황제의 명령으로 토번의 사신은 안에 들일 수 없다.” 이에 최한형 등은 안으로 들이고, 토번의 사신은 돌려 보냈다. | 瑊來受命,拜漢衡兵部尚書以副瑊。瑊率師二萬待期,詔駱元光助之。宰相議所盟地,左神策將馬有鄰建言:「土梨樹林薈巖阻,兵易詭伏,不如平涼夷漫坦直,且近涇,緩急可保也。」乃定盟平涼。瑊約結贊,主客均以兵三千至壇外,誕從四百叩壇,以游軍交邏相入。將盟,結贊伏精騎三萬于西,縱邏騎出入瑊軍,瑊將梁奉貞亦駷馬入虜軍營,陰執之,而瑊不知也。客請瑊等具冠劍,皆就幄更衣,從容胖肆。虜忽三伐鼓,衆譟而興,瑊不知所出,走幄後,得馬不銜而馳,十里始得銜。虜追,矢若雨不傷也,至元光營乃脫。裨將辛榮兵數百據北阜與虜戰,矢盡乃降。判官韓弇、監軍宋鳳朝死之。漢衡與判官鄭叔矩路泌、掌書記袁同直、列將扶餘準馬寧孟日華李至言樂演明范澄馬弇、中人劉延邕俱文珍李朝清等六十人皆被執,士死者五百,生獲者千餘人。漢衡語虜曰:「我,崔尚書也,結贊與我善。若殺我,結贊亦殺若。」乃不死。人負一木,以繩三約之,係其髮驅之;夜則杙地繫而仆,蒙以罽,守者寢其上。始結贊將劫希全、觀,急以銳兵直趣京師,既不克,又欲禽瑊等,擣虛入寇,其謀本然。既引去,至故原州,坐帳中見漢衡等,慢言:「渾瑊戰武功,我力也。許裂地償我,而自食其言。吾既作金枷,將必得瑊以見贊普,乃今失之,徒致公等,無益也。當使人歸報。」初,漢衡遇亂,從史呂溫身蔽兵,溫傷而漢衡脫,虜人嘉其義,厚給養之。結贊屯石門,以俱文珍、馬寧、馬弇歸唐,而囚漢衡、叔矩河州,辛榮廓州,扶餘準鄯州。帝猶使中人齎詔書賜結贊,拒不受。虜戍鹽、夏,涉春疫大興,皆思歸。結贊以騎三千迎之,火二州廬舍,頹郛堞而去,杜希全分兵保之。帝哀漢衡等陷辱,下詔賜其子七品官,叔矩、泌、弇、日華、榮、至言、澄、良賁、演明一子八品官,袁同直而下一子九品官。以決勝軍使唐良臣屯潘原,神策將蘇太平屯隴州。結贊召漢衡、日華、延邕至石門,以五騎送境上,遣使者奉表來。李觀曰:「有詔不內吐蕃使者。」受漢衡等,放其使。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