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8, 신당서 토번전-10)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卷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史/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下(吐蕃下) 번 역 문 | 원 문 | 46) 영태(永泰: 765)와 대력(大曆) 연간(766~779), (토번이) 다시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춰 안부를 전하니, 호부상서 설경선이 토번에 답방하였다. 황상이 재상에게 조서를 내려 토번의 사신과 회맹을 맺도록 하였다. [그러나] 곧 [토번이] 영주(靈州)로 침입하여 의록(宜祿: 섬서성 장무현 동남쪽)을 약탈하니 곽자의가 정예 군사 3만으로 경양(涇陽)을 지켰으나, [토번군은] 봉천으로 들어와 주둔하였다. 영주의 병사가 오랑캐 2만을 격파하고, 수급 오백을 바쳤다. 설경선이 윤읍릉(倫泣陵)과 함께 와서 봉림관(鳳林關: 감숙성 임하현 서쪽)을 경계로 할 것을 청했는데, 노실(路悉) 등 15명이 다시 내조하였다. [대력] 3년(768) 오랑캐가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영주를 공격하고 빈주를 약탈하였다. 앞서 상실결이 보응 연간(762~763) 이래 여러 차례 변경을 침입하였다가 공이 크고 연로하였음을 구실로 [사직하니] 찬마(贊磨)가 그를 대신하여 동면절도사가 되었고, 하서(河)와 농우(隴)일대의 경영을 전담하였다. 빈녕(邠寧)의 마린과 삭방장군 백원광이 다시 그 무리를 격파하여 말, 양 등 수천 필을 획득하였고, 검남(劍南)에서도 역시 오랑캐 만 명을 격파했다. 상실마가 다시 내조하였다. 천자는 오랑캐가 여러 차례 변경으로 침입하자 조를 내려 변경의 요새를 정비하고, 당주(當州: 사천성 송반현 누계영 서북), 실주(悉州: 사천성 송반현 서남), 자주(柘州: 사천성 송반현), 정주(靜州: 사천성 송반현 서남), 공주(恭州: 사천성 무현 서북) 등 5개 주(州)를 옮겨 모두 지세의 험준함에 기대 수비를 강화하게 하였다. | 永泰、大曆間,再遣使者來聘,於是戶部尚書薛景仙往報。詔宰相與吐蕃使者盟。俄寇靈州,掠宜祿,郭子儀精甲三萬戍涇陽,入屯奉天。靈州兵破虜二萬,上級五百首。景仙與倫泣陵偕來,請境鳳林關,而路悉等十五人又來。三年,虜引衆十萬復攻靈州,略邠州。先是,尚悉結自寶應後數入邊,以功高請老,而贊磨代之,為東面節度使,專河、隴。邠寧馬璘、朔方將白元光再破其衆,獲馬羊數千,劍南亦破虜萬人。尚悉摩復來朝。天子以虜數入塞,詔治守障,徙當、悉、柘、靜、恭五州,皆據險以守。 | 47) [대력] 8년(773)에 오랑캐 만 기가 영주(靈州)를 침입해 백성과 곡식에 피해를 입히고, 경주(涇)와 빈주(邠)를 침범하니 혼감(渾瑊)이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부장은 죽어 수천 호가 약탈당했다. 혼감이 병사를 정비하여 밤에 적진을 습격하였고, 경원(涇原)의 마린이 병사로 반원(潘原)의 토번군을 습격하여 표피장(豹皮將)을 쏘아 죽이니 토번군이 울며 도망갔다. 마린이 포로가 되었던 군사와 남녀 백성들을 모아 돌아왔다. 곽자의 또한 토번군 10만을 물리쳤다. | 八年,虜六萬騎侵靈州,敗民稼,進寇涇、邠,渾瑊與戰不利,副將死,略數千戶。瑊整卒夜襲其營;涇原馬璘以兵掩之潘原,射豹皮將死,軍中哭,乃遁去。璘收所俘士及男女而還。郭子儀又破其衆十萬。 | 48) [대력] 9년(774), 황제가 간의대부 오손을 보내 강화하도록 하니 오랑캐 역시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이 때 곽자의는 빈주에 주둔하였고, 이포옥은 고벽(高壁: 산서성 영석현 동남)에, 마린은 원주에, 이충신은 경주(涇州), 이충성은 봉상, 장희양은 위북(渭北: 섬서성 중부현)에 주둔하여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이듬해(775년), 서천절도사 최녕이 서산(西山: 사천성 성도 서쪽)에서 오랑캐를 무찔렀다. 오랑캐의 군대가 임경(臨涇: 감숙성 진원현)과 농주(隴州: 섬서성 농현)를 침공하고 보윤(普潤: 섬서성 인유현 서쪽)에 주둔하면서 백성과 가축을 불태우고 노략질했다. 이포옥이 적과 의녕(義寧: 감숙성 화정현)에서 싸워 적군을 격파했다. 적군이 경주(涇州)를 지날 때 마린이 추격하여 백리(百里: 백리성으로 감숙성 영대현 동쪽에 있다)에서 적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이듬해(대력 11년-776년), 최녕은 토번의 고홍(故洪) 절도(節度)와 저(氐), 만(蠻), 당항 등의 군대를 파하여 만여 급을 참수하고, 수령 천 명을 포로로 삼았으며, 소, 양, 양식, 갑옷 등 많은 물품을 노획하여 조정에 진상하였다. 토번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여주(黎州: 사천성 청계현)와 아주(雅州: 사천성 아안현)로 침입하였는데 이 때 검남의 병사가 남조(南詔: 국가명)와 함께 토번과 싸워 적군을 패퇴시키고, 대총관(大籠官) 논기연을 사로잡았다. 또 [적군이] 방주(坊州)를 침입하여 당항의 말을 약탈했다. 최녕이 망한성(望漢城: 사천성 이번현 동남)을 공격하여 적을 무찔렀다. 산남서도절도 장헌공이 민주(岷州)에서 싸워 토번이 물러갔다. 최녕은 서산(西山)의 3로와 공남(邛南: 사천성 월휴현의 남쪽)의 병사를 무찌르고 8천 급을 참수했다. 대력 13년(778) 오랑캐의 수령 마중영이 4만의 기병으로 영주(靈州)를 침입하여 한(漢), 어사(御史), 상서(尙書)의 세 수로를 막아 둔전에 해를 입혔고, 삭방류후 상겸광에 쫓기게 되자 염주(鹽州: 영하성 영무현 동남)와 경주(慶州: 감숙성 경양현)를 유린하고 돌아갔다. 곧 [토번은] 남으로 남조 병사 20만과 연합하여 무주(茂州)를 공략하고 부주(扶州: 감숙성 문현 서북)와 문주(文州: 감숙성 문현)를 약탈하였으며 곧이어 여주(黎)와 아주(雅)를 침범하였다. 이 때 이미 천자는 유주(幽州)의 군대를 내어 방어하게 하니 적군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 九年,帝遣諫議大夫吳損脩好,虜亦使使者入朝。於是子儀屯邠州,李抱玉屯高壁,馬璘屯原州,李忠臣屯涇州,李忠誠屯鳳翔,臧希讓屯渭北,備虜之入。明年,西川節度使崔寧破虜於西山。虜攻臨涇、隴州,次普潤,焚掠人畜;與抱玉戰義寧,破之;道涇州,璘尾追,敗之於百里。又明年,崔寧破虜故洪節度、氐、蠻、党項等兵,斬首萬級,禽酋領千人,牛羊廩鎧甚衆,獻之朝。吐蕃不得志,入掠黎、雅,於是劍南兵合南詔與戰,破之,禽大籠官論器然。又侵坊州,取党項牧馬。崔寧攻望漢城,破之。山南西道節度使張獻恭戰岷州,吐蕃走。寧破西山三路及邛南兵,斬首八千級。十三年,虜大酋馬重英以四萬騎寇靈州,塞漢、御史、尚書三渠以擾屯田,為朔方留後常謙光所逐,重英殘鹽、慶而去。乃南合南詔衆二十萬攻茂州,略扶、文,遂侵黎、雅。時天子已發幽州兵馳拒,虜大奔破。 | 49) 앞서 적군의 사신이 여러 차례 왔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머물게 하여 돌려보내지 않고 [이렇게] 포로가 된 자들을 모두 강남(江南)으로 보냈다. 덕종(德宗, 재위 779~805)이 즉위하자 먼저 국내의 방진(方鎭)을 평정하고, 여러 해 토번과 교전할 것을 고려하니, 득실이 서로 비슷하다고 판단되어, 덕으로 회유하고자 하였고, 태상소경 위륜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부절을 지니고 가서 포로 오백 명을 귀환시키도록 했다. [포로들에게] 의복 등을 후하게 내리고, 변방의 관리들에게 엄히 명령을 내려 변경의 요새를 지키도록 하고 토번의 영토에 들어가지 말도록 했다. 토번이 처음 소식을 듣고 믿지 않았는데, 사신이 토번의 영역에 들어오자 이내 모두 은혜에 감사하고 경외하였다. | 初,虜使數至,留不遣,所俘虜口,悉部送江南。德宗即位,先內靖方鎮,顧歲與虜确,其亡獲相償,欲以德綏懷之,遣太常少卿韋倫持節歸其俘五百,厚給衣褚,切敕邊吏護亭障,無輒侵虜地。吐蕃始聞未信,使者入境,乃皆感畏。 | 그 때 걸립찬이 찬보(젠뽀)가 되었는데, 그의 성은 호로제(戶虜提)였다. [그가] 말하기를, “내게 세 가지 회한이 있으니, 천자가 승하한 것을 몰라 조문하지 못한 것이 하나요, 천자를 안장할 때 재물을 진헌하여 장례를 돕지 못한 것이 둘이요, 외삼촌이 즉위한 것을 모르고 병사를 일으켜 영주(靈州)를 공격하고 부주(扶)와 문주(文)로 들어갔으며, 관구(灌口: 사천성 관현 서북에 위치)를 침범한 것이 세 번째 회한입니다.” 이에 곧 사신을 파견하여 위륜을 따라 입조하였다. 황제는 다시 위륜을 보내 촉(蜀) 지방의 포로를 돌려 보냈다. 오랑캐는 위륜이 다시 당도하자 매우 기뻐하며 숙소를 제공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등 연회를 베풀었다. 아흐레 머문 뒤 논흠명사(論欽明思) 등 50명이 [위륜을] 따라 와서 토산물을 진헌하였다. | 是時,乞立贊為贊普,姓戶盧提氏,曰:「我乃有三恨:不知天子喪,不及弔,一也;山陵不及賻,二也;不知舅即位,而發兵攻靈州,入扶、文,侵灌口,三也。」即發使者隨倫入朝。帝又遣倫還蜀俘。虜以倫再至,歡甚,授館,作聲樂,九日留,以論欽明思等五十人從獻方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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