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4, 신당서 토번전-6)

상 상 2014. 12. 19. 17:38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4, 신당서 토번전-6)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홀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신당서 토번전 출처:

1) 번역문: 동북아 역사넷/ 도서/ 중국정사 외국전/ 신당서(新唐書)216 토번전(吐蕃傳)

2) 원문: 新漢籍全文(http://hanchi.ihp.sinica.edu.tw/ihp/hanji.htm) /免費使用//正史/新唐書/列傳/卷二百一十六上(吐蕃上)

                                            번          역          문

                 원            문

29) 재상이 건의하여 말하기를, “토번은 본래 []()를 경계로 삼는데 공주의 연고로 강에 다리를 놓고 성을 쌓아 독산군(獨山軍구곡군(九曲軍)을 두었으니 적석(積石)으로부터 이백 리 거리입니다. 지금 [토번이] 맹약을 어겼으니 다리를 훼손하고 맹약대로 황하를 [경계로] 지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여 조를 내려 허락했다. 좌효위랑장 위지괴를 토번으로 보내 공주를 위로하도록 했다. 그러나 작은 규모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매년 끊이지 않으니 곽지운왕군착이 차례로 농우(隴右하서(河西)의 절도사가 되어 일일이 모두 막아냈다. 이에 토번은 종아인자(宗俄因子)를 보내 조수(洮水)에서 전사자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기를 청하고 아울러 화평을 청했다. 그러나 토번은 국력이 강성함을 믿고 천자와 대등함을 요구하면서 언사가 매우 오만불손했다. 사신이 임조(臨洮)에 도착하였으나 조서를 내려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성공주가 글을 올려 수호를 청하면서 찬보와 토번의 신료들이 천자와 더불어 맹문에 서명하고자 함을 밝혔다. 토번이 또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려 말하기를, “효화황제(孝和皇帝: 당 중종)께서 일찍이 맹약을 허락하셔서 그 때 당조의 재상 두로흠망(豆盧欽望: 무측천 때의 재상), 위원충, 이교, ·기처눌 등 22명과 토번의 군주와 신하가 함께 서약했습니다. 효화황제가 붕어하시고 태상황(太上皇: 당 예종)이 계위하셨는데 양국이 화목하기가 옛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당조의 재상으로 맹문에 서명한 자들은 이미 모두 사망했고 현재의 재상은 앞선 맹약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새로이 맹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논걸력(論乞力) 등을 전후로 7차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모두 [내조를] 허락받지 못했으며, 장현표, 이지고 등은 병사를 이끌고 조카의 나라를 침입하였으므로 맹세를 어기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지금 외삼촌이 조카의 과오를 용서하시고 태평한 때로 다시 돌아가니 조카는 이미 굳게 결심하였습니다만 맹약을 다시 맺지 못하면 믿지 못하게 되니 새로운 맹약을 맺기를 바랍니다. [지금] 조카는 스스로 국사를 맡아 아래 [신하]에 이끌리지 않고 백성을 오래도록 편안하게 하고자 합니다. 비록 외삼촌이 화평하기를 약속하였으나 그 뜻이 완전히 모이지 못했으니 맹약에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외삼촌께서 걸력서(乞力徐)가 병사를 모았다고 꾸짖으셨으나 이는 신구 병사를 교대한 것이지 [병사를] 모은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양국 사이의] 변강은 백수(白水: 선주-鄯州 서북 약 230리 지점)로부터 모두 비워 두었는데, 얼마 전에 곽장군(곽지운)이 병사를 주둔시키고 성을 쌓았으므로 조카도 역시 성을 쌓은 것입니다. 만약 두 나라가 화평하게 되면 [이곳에 쌓은 성을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데에 쓰면 될 것이고, 만약 서로 교통하지 않게 되면 변경을 지키는 데 쓰면 될 것입니다. 또한 [외삼촌께서] 돌궐의 골돌록(骨咄祿)[조카 토번이] 우호함을 의심하시는데 이는 과거에 [토번과 돌궐이] 서로 통혼했기 때문이며 만약 즉시 외삼촌과 조카가 처음과 같이 [화평을 회복]한다면 [돌궐과] 더불어 왕래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보병(寶瓶술잔을 바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이미 화친하였고 맹약을 맺었으니 앞서 맺은 맹약에 의거하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맹약을 맺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예를 갖춰 사신을 대하고 돌려보냈으며 찬보에게 후하게 사례하니 이로부터 매년 조공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않았다.

宰相建言:「吐蕃本以河為境以公主故乃橋河築城置獨山九曲二軍距積石二百里今既負約請毀穚復守河如約。」詔可遣左驍衞郎將尉遲瓌使吐蕃慰安公主然小小入犯邊無閑歲於是郭知運王君相繼節度隴右河西一以扞之吐蕃遣宗俄因子到洮水祭戰死士且請和然恃盛彊求與天子敵國語悖傲使者至臨洮詔不內金城公主上書求聽脩好且言贊普君臣欲與天子共署誓刻吐蕃又遣使者上書言:「孝和皇帝嘗賜盟是時唐宰相豆盧欽望魏元忠李嶠紀處訥等凡二十二人及吐蕃君臣同誓孝和皇帝崩太上皇嗣位脩睦如舊然唐宰相在誓刻者皆歿今宰相不及前約故須再盟比使論乞力等前後七輩往未蒙開許且張玄表李知古將兵侵暴甥國故違誓而戰今舅許湔貸前惡歸於大和甥既堅定然不重盟為未信要待新誓也甥自總國事不牽于下欲使百姓久安舅雖及和而意不專於言何益?」又言:「舅責乞力徐集兵且兵以新故相代非集也往者疆埸自白水皆為閑壤昨郭將軍屯兵而城之故甥亦城假令二國和以迎送有如不通因以守境又疑與突厥骨咄祿善者舊與通聘即日舅甥如初不與交矣因奉寶瓶杯以獻。」帝謂昔已和親有成言尋前盟可矣不許復誓禮其使而遣且厚賜贊普自是歲朝貢不犯邊

30) [개원] 10(722) [토번이] 소발률국(小勃律國)을 공격하니 그 왕 몰근망(沒謹忙)이 북정절도사 장효숭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발률(勃律)은 당의 서쪽 관문이니 이를 잃으면 서쪽 여러 나라가 모두 토번에 함락되고 맙니다. 도호께서 이를 도모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장효숭이 듣고 허락하니 소륵부사 장사례를 보내 보병과 기병 4천이 밤낮으로 달려 몰근망의 병사와 함께 토번을 협공하여 죽은 자가 수만이며 노획한 군장과 양, 말이 많았다. 이로써 옛 9() 땅을 회복했다. 비로소 발률왕이 내조하였는데 황제를 섬기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 수원군(綏遠軍)을 두고 토번을 막은 까닭으로 매년 전쟁을 치뤘다. 토번은 매번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나라에 이익이 없다. 다만 길을 빌어 4진을 공격하고자 할 뿐이다.” 이 때 여러 해 동안 출병하지 않았다.

十年攻小勃律國其王沒謹忙詒書北庭節度使張孝嵩曰:「勃律唐西門失之則西方諸國皆墯吐蕃都護圖之。」孝嵩聽許遣疏勒副使張思禮以步騎四千晝夜馳與謹忙兵夾擊吐蕃死者數萬多取鎧仗馬羊復九城故地始勃律王來朝父事帝還國置綏遠軍以扞吐蕃故歲常戰吐蕃每曰:「我非利若國我假道攻四鎮爾。」及是累歲不出兵

31) 이 때 농우절도사 왕군착이 깊이 [적진으로] 들어가 되갚기를 원했다.

[개원] 12(724) 토번을 격파하고 포로를 바쳤다.

2년 후(726)에 실낙라의 군대가 대두발곡(大斗拔谷)으로 들어와 감주(甘州)를 공격하면서 촌락을 불태웠다. 왕군착이 병사를 이끌고 [토번의] 정예를 피해 싸우지 않았다. 큰 눈을 만나 얼어 죽은 토번군이 산처럼 쌓이니 적석군(積石軍: 청해 산맥 남록, 황하의 북안에 위치)을 넘어 서쪽 길을 따라 추격하다가 돌아왔다. 왕군착이 미리 척후병을 보내 변경을 나가 들판의 풀을 모두 태우도록 했는데 실낙라가 대비천(大非川)에 주둔하였으나 말을 먹일 수 없어 말의 과반수가 죽었다. 왕군착이 진주도독 장경순을 이끌고 장비를 간소히 하여 적군을 추격하였는데 청해의 서쪽으로 나아갔을 때 마침 [청해가] 얼어 군대가 이를 이용해 청해를 건넜다. 이 때 오랑캐는 이미 대비산(大非山)을 넘었으나 장비와 지친 병사들은 청해 주변에 남겨두었으므로 왕군착이 적병을 포로로 삼아 개선했다. 이때 중서령 장열이 토번이 [당의 변경을] 출입한 지 수 십년인데 [양국의] 승부는 거의 비슷하며, 감주(양주(하주(선주()의 백성들이 군비의 조달로 매우 고통 받고 있으므로 [토번이 요구한] 화평을 허락할 것을 청했다. 당시 황제가 왕군착을 총애해 [장열의 말을] 듣지 않았다.

於是隴右節度使王君請深入取償十二年破吐蕃獻俘後二年悉諾邏兵入大斗拔谷遂攻甘州火鄉聚王君勒兵避其銳不戰會大雪吐蕃皸凍如積乃踰積石軍趨西道以歸君豫遣諜出塞燒野草皆盡悉諾邏頓大非川無所牧馬死過半君率秦州都督張景順約齎窮躡出青海西方冰合師乘而度于時虜已踰大非山留輜重疲弱濱海君縱兵俘以旋時中書令張說以吐蕃出入數十年勝負略相當鄯之人奉調發困甚願聽其和帝方寵君不聽(王君 뒤에 '착'자가 전부 빠져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