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6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08, 6. 토번의 침공 이후-8)

상 상 2016. 8. 17. 20:01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264,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08, 6. 토번의 침공 이후-8)

 

차례

 

.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

2. 구당서 토번전()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6. 토번의 침공 이후

1) 연표

 

1) 연표-8

당나라의 상황

(출처: 신구당서 토번전 등 및 자치통감)

838

백관 가운데 입조한 사람은 9명 뿐이었다 경성(장안)은 며칠이 지나서야 안정되었다.(83816)

중서시랑 이석을 환관 구사량이 죽이려하자 당 문종이 형남절도사로 충당하였다(838117)

29, 형주사마 이종민을 항주자사로 삼았다.

장가(牂柯)에 사는 부족이 부주(涪州)의 청계진(清溪鎮)에 침입하였으나 군사들이 물리쳤다.(3)

황제의 후비(后妃) : 귀비,숙비,덕비,현비(초기)혜비,여비,화비,귀비(후기)

의무(義武)절도사 장번이 사망하자, 군사들이 아들 장원익을 세우려 봉기하니

이주(易州)자사 이중천을 의무절도사로 삼았다(917)

역정감군이 주문을 올려서 군사들이 이중천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고

장원익을 유후로 삼가를 청하였다(10)

재상들이 역정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다가 황제가 않된다고 하자 장원익을 대주자사로 삼았다.

얼마 후 군사들이 논의하여 이중천이 불가하다고 말하니 조정에서 이중천을 파직시켰다.(10)

채주자사 한위를 의무절도사로 삼았다(1124)

 

이해에 토번의 이태찬보가 죽고 동생 달마가 섰다.

 

<자치통감>

839

개성 4(839), 태자첨사 이경유를 사신으로 보내니, 토번이 논집열을 보내 내조하고, 옥기와 양, 말을 바쳤다. 그로부터 토번에는 지진이 일어나 물이 솟아 오르고, 민산(岷山)이 붕괴되었다. 조수(洮水)가 역류하기를 삼 일, 쥐가 곡식을 먹고, 사람들은 전염병과 기아에 허덕이니, 죽은 자를 종횡으로 쌓아 올렸다. 선주()와 곽주() 사이에서 밤이면 비고(鼙鼓) 치는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서로 놀랐다.<신당서 토번전>

 

배도가 경사(서울)에 도착하였으나 병으로 집에 돌아갔다.(116)

배도가 죽었다(34)

경종의 어린 아들인 진왕 이성미를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1018)

당 문종은 예전의 태자를 모함하였던 교방 유초재 궁인 장십십 등 10명을 죽이고 이것 때문에

예전의 병이 늘었다(1021),

 

당 문종이 주지와 말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을 주()의 난왕과 한 헌제와 비교하며 난왕과 헌제는 강한 제후에게 통제를 받았고 지금 짐은 집안의 노복(환관)에게 통제를 받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짐이 거의 같지 않겠소!”라고 말하고 이어서 눈물이 옷깃을 적시니 주지는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고 이로부터 당 문종은 다시 조회에 나타나지 않았다.(127).

 

이해에 전국의 호구는 4996752호였다.(839)

회골에서 내란이 일어나 창신가한이 자살하여 나라사람들이 약라길애삽 특륵을 세워 가한으로 삼았다

이해에 전염병과 큰 눈으로 양과 말이 많이 죽어 회골이 드디어 쇠약해졌다.(839)

 

<자치통감>

840

환관 구사량과 어홍지는 황태자 이성미가 황제가 되면 자신들의 공이 없으니 내쫓고 조서를 고쳐 당 문종의 동생인 영왕 이전을 황태제로 삼았다.(84012),

 

당 문종 사망(14)

구사량이 황태제 이전으로 하여금 전 황태자 이성미 등을 죽이게 하였다.

 

황태제 이전이 당 무종으로 즉위(14)

 

의무군(義武軍)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 진군상을 내쫓았으나. 진군상이 병사 수백병을 모아

다시 의무군에 들어가 평정(8)

회남절도사 이덕유를 경사(서울)로 불러 문하시랑 동평장사로 삼았다(94).

사실은 이것도 이덕유가 뇌물을 준 환관 양흠의가 힘을 쓴 덕택이었다.

 

굴라물이 창신 가한을 죽이고 개삽을 추대하니 회골의 별장 구록막하가 힐알사의 10만 기병을 이끌고 회골을 공격하여 그를 대파하고 개삽과 굴라물을 죽이고 그의 아장을 다 불사르니 회골의 여러부락은 도망하고 흩어졌다.(9)

 

그 재상 삽직과 특륵 약라갈방 등 15개의 부락은 서쪽 갈라록으로 달아나고,

다른 한가닥은 토번으로, 또 한가닥은 안서로 달아났다.

가한의 형제 올몰사 등은 그 재상인 적심복고특륵 나힐철과 각각 무리를 인솔하고 천덕의 요새 아래 이르러 여러 오랑캐들과 무역을 하면서 내부적으로 귀부 해달라고 요구하엿다.

회골의 무너진 군사들이 침입하여 西수항성(受降城) 압박(1014),

진무절도사 유면에게 그에 대비토록 함.

 

위박절도사 하진도가 죽자 군대 안에서는 그의 아들인 도지병마사 하중순을 추대하여 지유후로 하였다

하중순을 지()위박유후사로 하였다.(1218)

 

<자치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