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 본기- 2)

상 상 2012. 1. 5. 18:44

9 년 (AD 399) : 왕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번역문]

9년(399) 봄 정월에 왕은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연나라 왕 [모용]성(盛)이 우리 나라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했는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南蘇城)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11 년 (AD 401) : 군사를 보내 숙군[성]을 공격하니,

[번역문]

11년(401) 왕이 군사를 보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니,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13 년 (AD 403) : 군대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번역문]

13년(403) 겨울 11월에 군대를 내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14 년 (AD 404) : 연나라 왕이 요동성을 침공해 왔다.

[번역문]

14년(404) 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해 왔다.

[성이] 함락되려 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먼저 [성에] 오르지 말라. 성을 깎아 평지가 될 때를 기다려서 내가 황후와 함께 수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이 때문에 성 안에서 엄히 방비할 수 있어서 [연나라는]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15 년 (AD 405) : 누리가 날아들고 가뭄이 들었다.

[번역문]

15년(405) 가을 7월에 누리가 날아들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陘北)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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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

 

2. 해설 및 분석:

 

1) 광개토왕 9년(399년)

연나라 왕 [모용]성(盛)이 우리 나라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고 하여 스스로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습격했는데,

⇒ 이 기사를 보면 고구려가 연나라를 하대하였거나 평등하게 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가 연나라의 속국이거나 하위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고구려 왕을 책봉하였다느니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용성은 자기의 아버지인 모용보를 죽인 난한을 죽이고 왕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모용희는 모용성의 숙부입니다.(여기 나오는 연나라는 후연입니다)

 

※ 후연의 계통(모용수→모용보:모용수의 아들→모용성:모용보의 아들→모용희:모용수의 아들)

 

2) 광개토왕 11년(401년)과 13년(403년) 계속해서 연나라(후연)를 칩니다

 

3) 광개토왕 14년(404년) 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침공해 옵니다.

이때에는 연(후연)나라 왕이 모용성에서 모용희로 바뀌었는데, 그 경과가 자치통감에 나오있습니다.

 

자치통감을 보면(번역본 - 11권) 모용성은 자기 아버지 모용보를 거울삼아 신하들이 조금만 의심되면 우선 죽였는데

신하들이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반란에 의해 죽게 됩니다. 그 뒤를 모용수의 아들인 모용희가 잇게 됩니다.

 

(이때 모용희의 침공은 실패로 끝나고)

 

4) 광개토왕 15년(405년)에 또 모용희가 습격해 왔으나 패배하고 돌아갑니다.

자치통감에는 ‘겨울 12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였다’라고만 되어 있고 뒷부분이 없으니

삼국사기가 다른 사서를 더 참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편, 자치통감도 자기들의 패배는 감추어 버리는 춘추필법으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