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

고구려 사람은 고조선인 이다.

상 상 2011. 9. 24. 08:49

고조선인(조선인)과 고구려 사람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막연하게 “고조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져 왔다

그러니까 고구려인은 고조선인(조선인)이다“ 라고 말하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다.

 

어느 누구도 승복할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객관적 과학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1. 이와 관련하여 우리 사서에는 기록이 없으므로, 부득이 중국 사서를 봐야 하겠다.

   이 관계를 밝혀 준 최초의 사서가 바로 후한서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을 보면

‘동이(東夷)는 거의 모두 토착민(土着民)<원문: 東夷率皆土著>’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역시, 후한서 동이열전 중 예전(濊傳)에는

‘예 및 옥저· 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조선(고조선)의 지역이다. <원문: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라고 기록되어있다.

 

동이(東夷)는 거의 토착민이고,

동이(東夷)중에서 예 및 옥저 고구려가 본디 모두 조선(고조선)지역이라고 하였으니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조선(고조선) 지역이며

예, 옥저, 고구려 사람들도 조선(고조선) 토착민 즉, 조선(고조선)사람들 이라는 말이다.

 

고구려 사람들만 놓고 다시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고구려 사람은 조선인(고조선인)’이라는 말이다.

 

2. 좀 더 직접적인 증거로 묘지명을 보자.

※ 고자의 묘지명(묘지명: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써놓은 글)

 

고구려 사람이며 당나라에서 죽은 고자(高慈)의 묘지명을 보면

“공은 이름은 자(慈)이고 자(字)는 지첩(智捷)으로 조선인이다. <원문: 公諱慈字智捷朝鮮人也>“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쓰여 있다.

아주 고구려 사람이 조선인이라고 명확하게 씌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이란 우리가 말하는 고조선이고

조선인이란 우리가 말하는 고조선인이다.)

 

이는 중국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이 조선인 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증거도 된다.

 

그러면 고자가 고구려 사람이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의 묘지명을 계속 보면,

 

「고자의 선조는 주몽왕을 따라 고구려를 건국한 후 대대로 공후재상이 되었으며,

20대조 밀(密)은 연나라 모용씨가 고구려에 침입하여 고구려가 위험에 빠졌을때

연을 격파하는 결정적 공을 세워 고구려 왕으로부터 고씨 성을 사성받고 이후에

대대손손 후(侯)에 봉해졌다.(요약)」이렇게 씌여있다.

 

따라서 고자는 명확하게 고구려 사람이다.

 

그런데 고자의 묘는 1923년 중국 하남성 낙양의 북쪽 근교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역시 그의 묘지명을 계속보면 그 해답을 찾을수 있다.

 

「증조부 무(式)는 고구려에서 막리지에 등용되었으며

조부 양(量)은 책성도독(柵城都督) 위두대형(位頭大兄)에 등용되었고 대상(大相)을 겸했다.

부 문(文)이 고구려의 멸망을 미리 예견하고 형제를 이끌고 당에 귀속했다.(요약)」

(자세한 번역문 및 원문은 아래에 있음)

 

그래서 고자가 중국에서 살게 되었으며 고자의 묘가 중국 땅 낙양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고구려 사람을 조선인(고조선인)이라고 하는 직접적 증거가 있으니

고구려 사람은 고조선인이라는 말이 명명백백 함을 알수 있을 것이다.

 

3.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이 조선(고조선) 사람이고

고구려가 조선(고조선)을 뒤이은 나라인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망했을 때 당나라는 고구려의 유민을 달래기 위하여

고구려가 망했을 때의 왕, 보장왕을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즉 망한 고구려국의 왕을 조선왕으로 봉했던 것이다.

 

구당서 동이열전 고구려전을 보면

『의봉(儀鳳) 연간(A.D.676∼678)에 (당) 고종(高宗)은 고장(高藏 : 보장왕의 이름)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제수(除授)하고

조선왕(朝鮮王)에 봉하여, 안동(安東)에서 살며 본번(本蕃:고구려)을 진무하는 주(主)로 삼았다.』

 

<원문: 儀鳳中, 高宗授高藏開府儀同三司·遼東都督, 封朝鮮王, 居安東, 鎭本蕃爲主>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즉, 고구려 사람들이 고구려를 부흥시키려고 봉기하자

망한 고구려국의 왕을 또다시 고구려왕 이라고 하면 고구려가 다시 살아나므로

그렇게는 못하고

그전의 이름, 조선왕이라고 하여

봉기하는 고구려 사람들을 진압, 위무하는 주군으로 삼은 것이다.

 

여기에서도 중국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가 조선(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며

고구려 사람들이 조선인(고조선인)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또한번 알 수 있다.

 

이상의 후한서와 고자의 묘비명, 구당서가 명명백백하게 증명하듯이

고구려 사람은 고조선인 이다.(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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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자의 묘지명 번역문 및 원문 >

 

『...(상략)...

공은 이름은 자(慈)이고 자(字)는 지첩(智捷)으로 조선인이다.

선조가 주몽왕을 따라 해동의 여러 오랑캐를 평정하여 고구려국을 건설한 이후

대대로 공후재상(公侯宰相)이 되었다.

후한말에 이르러 고구려는 연의 모용씨와 싸워 크게 패하여 나라가 장차 멸망하려 하였다.

이 때 20대조 밀(密)은 분연히 창을 잡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목을 벤 자가 무척 많았다.

(이로) 인하여 연군(燕軍)을 파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봉(封)을 내려 왕(王)으로 하려 했으나 세 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고성(高姓)과 식읍 3천호를 내리고 또한 금문(金文), 철권(鐵券)을 내려

“마땅히 고밀 자손은 대대로 후(侯)를 봉하고 까마귀의 머리가 희게 되고 압록강이 마르지 않으면

승계를 끊지 않는다”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처음 세워진 후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

30대동안 대대로 공후장상(公侯將相)이 끊어지지 않았다

....(중략)....

증조부 무는 본번(고구려)에서 2품 막리지에 등용되어 홀로 국정을 맡아

지위는 극히 막중하고 임무는 기모(機謀)있는 일을 관장하여 방국(邦國:고구려)이 공평무사하였으니

그 높음은 비길 바가 없었다.

조부 양은 3품 책성도독(柵城都督) 위두대형(位頭大兄)에 등용되었고 대상(大相)을 겸했다.

어려서는 부조(父祖) 전래의 가업을 계승했으며 장성하여서는 국가경영에 참여하여

방진(方鎭)의 영수가 되었고 속성(屬城)의 모범이 되었다.

부 문은 본번(고구려)에서 3품 위두대형이 되었고 장군을 겸했다.

고구려의 멸망을 미리 예견하고 형제를 이끌고 귀속했다.

........(하략)...........』

 

<원문>

『 ...(상략)...

公諱慈字智捷朝鮮人也先祖隨朱蒙王平海東諸夷建高麗國已後代爲公侯宰相至後漢」

末高麗與燕慕容戰大敗國幾將滅廿代祖密當提戈獨入斬首尤多因破燕軍重存本國賜」

封爲王三讓不受因賜姓高食邑三千戶仍賜金文鐵券曰宜令高密子孫代代封侯自非烏」

頭白鴨綠竭承襲不絶自高麗初立至國破已來七百八年卅餘代代爲公侯將相不絶

...(중략)...

曾祖式本蕃任二品莫離支獨知國政 位極樞要軄典機權邦國是均尊顯莫二祖量本蕃任三品栅城都督位頭大兄兼大相少稟」

弓冶長承基構爲方鎭之領袖實屬城之准的父文本蕃任三品位頭大兄兼將軍預見高麗之必亡遂率兄弟歸款

...(하략)...』

 

해석자: 박한제

출처: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 묘지명(墓誌銘)

무덤의 주인공을 기리고,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은 글을 말하며,

때로는 그 글을 기록하여 무덤에 넣는 물건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