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7,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1), 돌궐족 묵철의 침공-15)
차례
가. 관련 사료 1. 구당서 토번전(상) 2. 구당서 토번전(하) 3. 신당서 토번전 4. 구당서 돌궐전 5. 신당서 돌궐전 6. 구당서 측천본기 7. 신당서 측천본기 8. 구당서 거란전 9. 신당서 거란전 10. 구당서 발해전 11. 신당서 발해전 12. 구당서 숙종본기 13. 구당서 회홀전 14. 신당서 회골전 15. 구당서 남조전 16. 신당서 남조전 17. 구당서 신라전 18. 신당서 신라전 19. 삼국사기 신라본기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4. 안사의 난 5. 토번의 침공 6. 토번의 침공 이후 7. 민란의 발생과 남조의 침공 8. 황소의 난 9. 절도사의 시대 10. 당의 멸망
다. 통일신라와 당 1. 통일신라 이후의 당나라 약사 2. 신구당서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통일신라와 당 4. 사료를 통합해서 본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
나.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 1. 이진충의 난 이전 2. 이진충의 난 3. 돌궐족 묵철의 침공 1) 연표 2) 연표 분석 및 해설 3) 요약
2) 연표 분석 및 해설: ⇒ 이진충의 난이 미친 파장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698년 ~ 755년) (2) 나라별 분석 및 해설
(1) 연도별 분석 및 해설-5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돌궐은 715년 큰 내분이 일어난데 이어
716년 뜻하지 않게 묵철이 죽는다. 신당서 돌궐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그 전후 사정을 알 수 있다. 『묵철이 또 9성(九性:돌궐부족) 발야고를 토벌하는데 독락하에서 싸워 발야고를 크게 패배시켰다. 승리에 취한 묵철이 무장을 갖추지 않은 채 돌아오다가 숲이 우거진 속을 지나가는 데 발야고의 남은 백성들이 갑자기 나와 묵철을 공격해 목을 베고 바로 입번사(入蕃使) 학령전에게 그의 수급을 주어 경사(장안)에 전하게 했다.』
이렇게 되니
골돌록의 아들 궐특근이 옛 부락을 규합해 묵철의 아들인 소가한과 여러 아우들, 그리고 친신(親信)을 거의 모두 살해하고, 그의 형인 좌현왕 묵극련을 옹립하니 이 사람이 바로 비가가한이다. 비가가한은 개원4년(716년)에 즉위하였는데,본래 돌궐에서는 소살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항호 아실란과 협질사태 등이 반란을 일으키고 돌궐로 돌아갔다. 소살(비가가한, 묵극련)이 항호를 얻자 당나라를 침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편 이때(716년) 해(奚)와 거란, 발예고 등이 서로 (백성을) 이끌고 장성(당나라) 안으로 들어오니
717년 해왕(奚王) 이대보의 비(妃) 신씨를 고안공주로 삼고 거란왕 이실활에게는 종실의 외질녀(外姪女)인 양씨를 봉해 영락공주로 삼아 그에게 시집보냈다.
즉, 돌궐에 이탈한 세력을 끌어들여 당에 우호적인 세력을 만들어 혼인동맹을 맺고 돌궐에 대항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718 이실활이 죽자 이실활의 종제 파고(婆固)가 이어 그 무리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런데 파고의 대신인 가돌우가 용맹하여 민심을 두루 얻게 되자 파고가 모의하여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러나 가돌우가 도리어 파고를 공격하자 파고는 영주로 달아났다.
영주도독 허흠담이 설태에게 명하여 용맹한 병사 5백 명과 해왕(奚王) 이대보, 그리고 파고가 모은 무리를 징발해 가돌우를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으며 파고와 이대보는 모두 가돌우에게 살해되었고 설태는 생포되었다.
이렇게 되니 영주의 관아가 놀라고 두려워하자 허흠담이 군대를 옮겨 서쪽의 유관(渝關:임유관)으로 들어갔다. 즉, 영주를 현재의 조양시에서 임유관으로 옮긴 것이다. 한편, 가돌우는 파고의 종제 울우(鬱于)를 세워 군주로 삼았다.
719년(개원 7년) 대조영이 죽으니, 당 현종이 사신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이어서 그의 적자(嫡子) 계루군왕 대무예를 책립(冊立)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
이때는 돌궐의 묵철이 죽고 소살(비가가한=묵극련)이 돌궐의 군주가 되어 당나라를 공격하겠다는 소식이 당에 전해진 때이다. 따라서 당나라는 이웃나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당의 안전을 꾀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당 현종이 사신까지 발해에 보내 대조영의 죽음을 조문한 것이고, 그 기회에 발해와 다시 동맹을 강화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 표현을 보면 책립하였다느니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느니 하고 있다. 이 역시 자기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표현법인 춘추필법의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720년 한편, 716년 돌궐이 당나라를 침략하려고 한다는 소식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나라에서는 겨울에 어사대부 왕준을 삭방대총관으로 임명했는데, 왕준이 서쪽의 발실밀과 동쪽의 해(奚)와 거란 두 종족을 징발해 다음해 가을 초를 작전 시기로 삼아 삭방(朔方)의 병사들을 끌어들여 계락하(稽落河)부근에서 돌궐의 아장(衙帳)을 포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위의 내용을 보면 당나라가 돌궐을 공격하는데 발해가 빠져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발해는 당의 추종세력이 아니다. 즉, 713년 당예종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였다느니 719년 대무예를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삼았다느니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느니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거나 허울뿐인 말장난이거나 실체가 없는 거짓이거나 최소한 발해가 당나라의 종속국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721년 가을에 발실밀은 돌궐의 아장까지 왔으나, 왕준의 병사들과 거란과 해(奚) 두 종족이 도착하지 못했다. 발실밀이 두려워 물러나 돌아가려고 하자 돌궐은 북정도호부를 먼저 습격해 차지하고 후퇴하는 발실밀 무리를 모두 사로잡았다 이어서 돌궐은 군대를 돌려 적정(赤亭)을 나아가서 양주(涼州)의 양과 말을 노략질했다. 이때 양경술이 양주도독이었는데, 부장(副將) 노공리와 판관(判官) 원징을 보내 군대를 내서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대패하고 원징은 몸만 빠져나와 도망가야 했다.
소살(비가가한, 묵극련)은 이로 말미암아 세력을 크게 떨치게 되었고, 묵철의 백성들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살은 당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당 현종의 아들이 될 것을 청하였다. 또한 공주와의 혼인도 청했으나 당현종은 불허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소살(비가가한, 묵국련)의 평화정책은 치명적인 실수가 된다. 이러한 돌궐의 정책은 돌궐이 멸망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째든 돌궐의 화친정책은 당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당에게 가장 커다란 골치덩어리인 돌궐과의 전쟁이 일단락되어 모처럼 당나라에 평화가 찾아왔다.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9,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3), 돌궐족 묵철의 침공-17) (0) | 2016.01.08 |
---|---|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8,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2), 돌궐족 묵철의 침공-16) (0) | 2016.01.06 |
유라시아 호령한 고조선 기마군단…8000㎞ 초원길에 한민족DNA (0) | 2016.01.04 |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6,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20), 돌궐족 묵철의 침공-14) (0) | 2015.12.30 |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175, 나당전쟁 이후의 당나라-19), 돌궐족 묵철의 침공-13) (0) | 2015.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