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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남사[南史] 동이열전(東夷列傳)
차 례
1. 서(序) 2. 고구려(高句麗) 3. 백제(百濟) 4. 신라(新羅)
○ 남사(南史)[註001] 동이열전(東夷列傳)[註002]
1. 서(序)
1)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 중에서 조선(朝鮮)이 제일 강대하였는데, 기자(箕子)의 교화(敎化)를 입어 그 문물(文物)이 예악(禮樂)에 합당하였다고 한다. 위(魏)의 시대에는 조선(朝鮮)의 동쪽에 있는 마한(馬韓)· 진한(辰韓)의 무리가 대대로 중국(中國)과 왕래하였다. 진(晋)이 [양자(揚子)]강(江) 이남으로 옮겨간 후부터 바다를 건너 사절(使節)을 파견한 나라로는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가 있었는데, 송(宋)· 제(齊) 시대에도 계속하여 직공(職貢)하였으며, 양(梁)나라가 흥기하자 [조공(朝貢)이] 더욱 빈번해졌다.
2) ○ 부상국(扶桑國)이란 옛날에는 듣지 못하던 나라이다. 양(梁)나라 보통(普通) 연간(A.D. 520~526; 高句麗 安藏王 2~8)에 어떤 도인(道人)이 스스로 그곳에서 왔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말이 사리에 매우 합당하므로 함께 기록한다.[註003]
2. ○ 고구려(高句麗)[註001]
1) ○ 고구려(高句麗)는 요동(遼東) 동쪽 천리 밖에 있다. 그 선조의 출자에 대한 서적은『북사(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나라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 산에서] 흘러 나온다. 한(漢)· 위(魏) 시대에는 남으로는 조선(朝鮮)· 예맥(獩貊),[註004] 동으로 옥저(沃沮), 북으로 부여(夫餘)와 인접하였다. 그 나라의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註005] 아래에 있다.[註006] 국토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판이 없어서, 백성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시냇물을 식수로 한다. 비록 토저생활(土著生活)을 하고 있지만 좋은 토지는 없어 그들의 습속에 음식을 아껴 먹고 궁실을 잘 지어 치장한다. 왕의 궁실 왼편에 큰 집을 지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또한 영성(零星)과 사직(社稷)에도 제사지낸다. 사람들의 성질은 포악하고 성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2) ○ 벼슬아치로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鄒加)· 주부(主簿)· 우태(優台)·조의(皁衣)· 선인(先人) 이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언어나 생활 관습은 부여(夫餘)와 같은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 및 의복은 서로 달랐다. 본래 5족(族)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신노부(愼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처음 소노부(消奴部)에서 왕이 나왔으나 미약하여지자, 계루부(桂婁部)에서 왕위(王位)를 차지하였다. [그 나라는] 관리를 설치할 적에 대로(對盧)가 있으면 패자(沛者)를 두지 않고, 패자(沛者)가 있으면 대로(對盧)를 두지 않는다.
3) ○ [그들의] 습속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국중(國中)의 부락(部落)마다 남녀가 밤마다 떼지어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유희를 즐긴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경우 한쪽 다리는 펴며, 길을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하듯 빨리 간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대회(大會)가 있다.[註007] 그들의 공식(公式)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金)과 은(銀)으로 장식한다. 대가(大加)· 주부(主簿)의 머리에 쓰는 것은 [중국(中國)의] 책(幘)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변,弁)과 같다. 그 나라에는 감옥이 없고,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모여 평의(評議)하여 중죄(重罪)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註 008] 그 처자는 몰수한다.
4)○ 그 나라의 습속은 음란하여 남녀가 서로 야합(野合)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을 한 뒤에는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壽衣)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데에 곽(椁)은 쓰지만 관(棺)은 사용하지 않는다. 후장(厚葬)하는 풍속이 있어서 금· 은과 재화를 모두 장례에 소비한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작아 산에 오르기 편리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氣力)을 숭상하여 활· 화살· 칼· 창을 잘 쓰고, 갑옷이 있으며, 전투에 익숙하여 옥저(沃沮)· 동예(東濊)를 모두 복속시켰다.[註009]
5) ○ 진(晋) 안제(安帝) 의희(義熙) 9년(A.D.413; 高句麗 長壽王 1)에 고(高)[구(句)]려왕(麗王) 고련(高璉)이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자백마(赭白馬)를 바쳤다. 진(晋)나라는 련(璉)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영주(都督營州) 제군사(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고려왕(高麗王)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송(宋)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련(璉)에게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의 벼슬을 더 주고, 다른 관직은 모두 그래도 인정하였다. [註010] [영초(永初)] 3년(A.D.422; 高句麗 長壽王 10)에 련(璉)에게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독평주제군사(督平州諸軍事)라는 벼슬을 더해 주었다.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A.D.424; 高句麗 長壽王 12)에 련(璉)이 장사(長史) 마루(馬婁) 등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므로, 알자(謁者) 주소백(朱邵伯)과 왕소자(王邵子) 등을 파견하여 노고를 치사(致謝)하였다.[註011]
6) ○ 원가(元嘉) 15년(A.D.438; 高句麗 長壽王 26)에 풍홍(馮弘)이 위(魏)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하여 고려(高[구(句)]麗)의 북풍성(北豊城)으로 달아나서, [송 문제(宋 文帝)에게] 표문을 올려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고 하였다. 문제(文帝)는 왕백구(王白駒)와 조차흥(趙次興)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고, 아울러 고[구]려에게 [풍홍(馮弘)을 송나라로] 보내 주도록 하였다. 련(璉)은 [풍(馮)]홍(弘)이 남쪽(송나라)으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손수(孫漱)· 고구(高仇) 등을 보내 기습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왕(王)]백구(白駒) 등은 휘하의 7천여명을 통솔하여 [손(孫)]수(漱)를 생포하고 [고(高)]구(仇) 등 2명을 살해하였다. 련(璉)은 [왕(王)]백구(白駒) 등이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 하여, 그들을 체포해서 송나라로 압송하였다. 황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고구려)의 뜻을 거슬리고 싶지 않아, [왕(王)]백구(白駒) 등을 옥에 가두었다가 놓아 주었다. [고(高)]련(璉)이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였다.[註012] [원가(元嘉)] 16년(A.D.439; 高句麗 長壽王 27) 문제(文帝)가 위(魏)를 침략하고자 련(璉)에게 말을 보내라고 조서를 내리자, [련(璉)은] 말 8백필을 바쳤다.
7) ○ 효무(孝武)(제,帝) 효건(孝建) 2년(A.D.455; 高句麗 長壽王 43)에 련(璉)은 장사(長史) 동등(董騰)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리고, 국상(國喪) 3주기(周忌)에 대한 조문과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대명(大明) 2년(A.D.458; 高句麗 長壽王 46)에 또 다시 숙신씨(肅愼氏)의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헌상(獻上)하였다.[註013] [대명(大明)] 7년(A.D.463; 高句麗 長壽王 51) 조서를 내려 련(璉)의 벼슬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올려 주고 여타의 관직은 모두 그대로 인정하였다.[註014] 명제(明帝) 태시(泰始) 연간(A.D.465~471; 高句麗 長壽王 53~59)에서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연간(A.D.473~476; 高句麗 長壽王 61~64)까지도 공물의 헌상이 끊어지지 않았다.[註015] [련(璉)은] 제(齊)나라 때에도 한결같이 작위를 받았으며, [나이] 백여세에 죽었다.
8) ○ 그의 아들 [고(高)]운(雲)이 왕위에 올랐다. 제(齊) 융창(隆昌) 연간(A.D.493; 高句麗 文咨王 2)에 [운(雲)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고려왕(高麗王) 낙랑공(樂浪公)으로 삼았다. 양(梁) 무제(武帝)가 즉위하여 운(雲)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올려 주었다.
9) ○ 천감(天監) 7년(A.D.508; 高句麗 文咨王 17)에 조서를 내려 무동대장군(撫東大將軍)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벼슬을 내리고, 지절(持節)· 상시(常侍)· 도독(都督)· 왕(王)은 모두 그대로 인정하였다.[註016] [천감(天監)] 11년(A.D.512; 高句麗 文咨王 21)과 15년(A.D.516; 高句麗 文咨王 25)에도 거푸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감(天監) 17년(A.D.518; 高句麗 文咨王 27) 운(雲)이 사(死)하고 그의 아들 [고(高)]안(安)이 왕위에 올랐다.
10) ○ 보통(普通) 원년(A.D.520; 高句麗 安藏王 2)에 안(安)에게 조서를 내려 지절(持節) 독영평이주제군사(督營·平二州諸軍事) 영동장군(寧東將軍)의 봉작을 승습케 하였다. [보통(普通)] 7년(A.D.526; 高句麗 安藏王 8) 안(安)이 졸(卒)하고 그의 아들 [고(高)]연(延)이 왕위에 올랐다.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므로, 조서를 내려 연(延)에게 작위를 승습케 하였다. 중대통(中大通) 4년(A.D.532; 高句麗 安原王 2)과 6년(A.D.534; 高句麗 安原王 4)·대동(大同) 원년(A.D.535; 高句麗 安原王 5)과 7년(A.D.541; 高句麗 安原王 11)에 거푸 표문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태청(太請) 2년(A.D.548; 高句麗 陽原王 4) 연(延)이 졸(卒)하였으므로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고(高)]성(成)에게 연(延)의 작위를 승습케 하였다.[註017]
3. 백제(百濟) ○ 백제(百濟)[註001]
1)○백제(百濟)는 그 시초가 동이(東夷)의 삼한국(三韓國)인데, [삼한국(三韓國)의]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辰韓)이요, 또 하나는 변한(弁韓)이었다. 변한(弁韓)과 진한(辰韓0은 각각 12국(國)이 있었고, 마한(馬韓)은 54국(國)이 있었다. 대국(大國)은 1만여가(萬餘家), 소국(小國)은 수천가(數千家)로서 모두 10여만호(餘萬戶)가 되었는데, 백제(百濟)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차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를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고(高)]구려(句麗)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리 밖에 있었다.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고(高)]구려(句麗)가 이미 요동(遼東)을 경략하자,[註002] 백제(百濟) 역시 요서(遼西)· 진평(晋平) 2군(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註003]
2)○ 진(晋) 의희(義熙) 12년(A.D.416; 百濟 腆支王 12)에 백제왕(百濟王) 여영(餘映)[註004]을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장군(鎭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송(宋) 무제(武帝)가 즉위한 뒤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벼슬을 올려 주었다. 소제(少帝) 경평(景平) 2년(A.D.424; 百濟 久爾辛王 5)에 영(映)이 장사(長史) 장위(長威)를 파견하여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3)○ 원가(元嘉) 2년(A.D.425; 百濟 久爾辛王 6)에 문제(文帝)가 조명(詔命)으로 겸알자(兼謁者) 여구은자(閭丘恩子)와 겸부알자(兼副謁者) 정경자(丁敬子) 등을 보내어, 칙지(勅旨)를 펴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 후 백제는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다.[註005] [원가(元嘉)] 7년(A.D.430; 百濟 毗有王 4)에 백제왕(百濟王) 여비(餘毗)[註006]가 다시 공물을 바치므로, [여(餘)]영(映)의 작호(爵號)를 승습케 하였다.[註007] [원가(元嘉)] 27년(A.D.450; 百濟 毗有王 24)에는 [여(餘)]비(毗)가 방물을 바치며, 국서(國書)를 올려 사사로이, 대사(臺使)[註008]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로 삼을 것을 추인해 주고,[註009] 표문으로 역림(易林)· 식점(式占) 및 요노(腰弩)를 요구하자 문제(文帝)는 모두 들어 주었다. [여(餘)]비(毗)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경(慶)[註010]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註011]
4)○ 효무(孝武)[제(帝)] 대명(大明) 원년(A.D.457; 百濟 蓋鹵王 3) 에 사신을 보내어 벼슬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하자, 조명(詔命)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대명(大明)] 2년(A.D.458; 百濟 蓋鹵王 4)에는 경(慶)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행관군장군(行冠軍將軍) 우현왕(右賢王) 여기(餘紀)[註012] 등 11인이 충성스럽고 부지런하므로, 모두 벼슬을 높여줄 것을 구합니다.”[註013] 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모두에게 더 높은 벼슬을 내려 주었다.[註014]
5)○ 명제(明帝) 태시(泰始) 7년(A.D.471; 百濟 蓋鹵王 17) 에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註015] 경(慶)이 사(死)하고 그의 아들 모도(牟都)[註016]가 왕위에 올랐다. 도(都)가 사(死)하고 그의 아들 모대(牟大)[註017]가 왕위에 올랐다.
6)○ 제(齊) 영명(永明) 연간(A.D.483~493; 百濟 東城王 5~15)에 대(大)에게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이라는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註018] 양(梁) 천감(天監) 원년(A.D.502; 百濟 武寧王 2)에 대(大)의 [장군(將軍)]호(號)를 정동장군(征東將軍)으로 올려 주었다.[註019] 얼마 뒤 고구려(高句麗)에게 격파되어 날로 [국력이] 쇠약해지더니, 남한(南韓)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註020]
7)○ 보통(普通) 2년(A.D.521; 百濟 武寧王 21)에 [백제]왕 여륭(餘隆)[註021]이 비로소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高[句]麗)를 무찌르며 [싸웠으나] 이제 비로소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하니, 백제(百濟)가 다시 강국이 된 것이다. 그 해 양(梁) 무제(武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융(隆)을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註022]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보통(普通)] 5년(A.D.524; 百濟 聖王 2)에 융(隆)이 사(死)하니,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명(明)[註023]을 지절(持節) 독백제제군사(督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註024]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8)○ [백제는] 도성(都城)을 고마(固麻)[註025]라고 하며, 읍(邑)을 담로(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 안에는 22담로(檐魯)가 있는데,[註026] 모두 [왕의]자제와 종족(宗族)에게 나누어 웅거케 하였다. 백제인의 키는 크며 의복은 깨끗하다. 그 나라는 왜(倭)에 가까이 있는 까닭에 문신(文身)[註027]한 자들도 꽤 있다. 언어와 복장은 고구려(高[句]麗)와 거의 같다. 모(帽)를 관(冠)이라 부르고, 유(襦)를 복삼(複衫), 고(袴)를 곤(褌)이라고 한다. 그 나라 말에는 중국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泰)· 한(韓)의 유속(遺俗)이라고 한다.[註028]
9)○ 중대통(中大通) 6년(A.D.534; 百濟 聖王 12)과 대동(大同) 7년(A.D.541; 百濟 聖王 19) 에 거푸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註029] 아울러 열반경(湼槃經)[註030] 등에 대한 의소(義疏)와 모시박사(毛詩博士) 및 공장(工匠)· 화사(畫師) 등을 구하므로 모두 공급하여 주었다. 태청(太淸) 3년(A.D.549; 百濟 聖王 27)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사신이 [국도(國都)에] 이르러 성궐(城闕)이 황폐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자, 후경(侯景)이 노(怒)하여 잡아 가두었다.[註031] 경(景)의 난리가 평정된 뒤에야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4. 신라(新羅) ○ 신라(新羅)[註001]
1)○ 신라(新羅)의 선조에 관한 사적은『북사(北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百濟)의 동남쪽 5천여리 밖에 있다. 국토의 동쪽은 큰 바다와 연(沿)해 있고, 남과 북은 [고(高)]구려(句麗)· 백제(百濟)와 접하고 있다. 위(魏)나라 때는 신로(新盧)라 불렀고, 송(宋)나라 때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하였는데,[註002] 나라가 작아서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수 없었다. 보통(普通) 2년(A.D.521; 新羅 法興王 8)에 성(姓)은 모(募), 이름은 태(泰)인 [신라]왕[註003]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백제를 따라와 방물을 바쳤다.
2)○ 그 습속에 왕성(王城)을 건모라(健牟羅)[註004]라 부르며 그 읍(邑)이 [건모라(健牟羅)의] 안에 있는 것은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邑勒)이라 하니,[註005] 이것은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은 말이다. 나라 안에는 6군데의 탁평(啄評)과 52군데의 읍륵(邑勒)이 있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五穀)을 심기에 적합하다. 뽕나무와 삼이 많아 비단과 베를 생산한다. 소는 수레를 끌게 하고 말은 탄다. 남녀간의 구별이 엄격하다.
3)○ 그 나라의 관직 이름에는 자분한지(子賁旱支)[註006]· 일한지(壹旱支)· 제한지(齊旱支)[註007]· 알한지(謁旱支)[註008]· 일길지(壹吉支)[註009]· 기패한지(奇貝旱支)[註010]가 있다. 그들은 관(冠)을 유자례(遺子禮)라 하며, 저고리(유,襦)를 위해(尉解), 바지(고,袴)를 가반(柯半), 신(화,靴)을 세(洗)라 한다. 그들의 절하는 방법과 걷는 모양은 고구려(高[句]麗)와 비슷하다.[註011] 문자(文字)가 없으므로 나무에 금을 새겨 신표로 삼는다. 의사는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 ===================================================================== 1. 출처: 중국정사 조선전 http://db.history.go.kr/url.jsp?ID=j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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