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의 원전(原典) 규명(糾明)- 7 삼국사기 동명성왕 본기의 내용 7.「성곽과 궁실지음, 주몽 사망」 사 료 | 내 용 | 삼국사기(동명성왕 본기) | 3년(서기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년(서기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6년(서기전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10년(서기전 28) 가을 9월에 난새[鸞]가 왕대(王臺)에 모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14년(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鶻嶺 秋七月 慶雲見鶻嶺南 其色靑赤 四年 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宮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太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爲城邑 十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猒 伐北沃沮滅之 以其地爲城邑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 饋方物 以報其德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 본기) |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 玄雲冪鶻嶺 산이 뻗쳐 연한 것이 보이지 않고 / 不見山邐迤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들려 / 有人數千許 나무 베는 소리와 방불하였다 / 斲木聲髣髴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 王曰天爲我 그 터에 성을 쌓는 것이라 한다 / 築城於其趾 홀연히 운무가 흩어지니 / 忽然雲霧散 궁궐이 우뚝 솟았다 / 宮闕高嵬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 왕위에 있은 지 십구 년 만에 / 在位十九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 升天不下莅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한다. 玄雲起鶻嶺。人不見其山。唯聞數千人聲以起土功。王曰。天爲我築城。七日。雲霧自散。城郭宮臺自然成。王拜皇天就居。在位十九年。升天不下莅。秋九月。王升天不下。時年四十。太子以所遺玉鞭。葬於龍山云云。 | 단군고기 (檀君古記) | 검은 구름이 골령(骨嶺)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을 보지 못하는데, 오직 수천 사람의 소리만 들리며 토공(土功)을 일으키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스스로 걷히고, 성곽과 궁궐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왕이 황천(皇天)께 절하고 나아가 살았다. 9월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 때의 나이가 40살이었다. 태자가 〈왕이〉 남긴 옥채찍[玉鞭]으로써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玄雲起鶻嶺, 人不見其山, 唯聞數千人聲, 以起土功。 王曰: “天爲我築城。” 七日, 雲霧自散, 城郭宮臺自然成。” 王拜皇天, 就居。 秋九月, 王乘天不下, 時年四十。 太子以所遺玉鞭, 葬於龍山。 | 위서 고구려전 |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음. | 북사 고구려전 | 여기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음. |
내용 7.「성곽과 궁실지음, 주몽 사망」의 비교, 분석. 1. 삼국사기와 구삼국사(舊三國史)의 비교 삼국사기(동명성왕 본기) |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 본기) | 3년(서기전 35) 봄 3월에 황룡(黃龍)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깔이 푸르고 붉었다. 4년(서기전 34)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은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6년(서기전 32) 가을 8월에 신작(神雀)이 궁정에 모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서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10년(서기전 28) 가을 9월에 난새[鸞]가 왕대(王臺)에 모였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삼았다. 14년(서기전 24)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써 장사지내고 마침내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을 갚았다.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昇遐]. 그 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동명성왕이라고 이름하였다. |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 玄雲冪鶻嶺 산이 뻗쳐 연한 것이 보이지 않고 / 不見山邐迤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들려 / 有人數千許 나무 베는 소리와 방불하였다 / 斲木聲髣髴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王曰天爲我 그 터에 성을 쌓는 것이라 한다 / 築城於其趾 홀연히 운무가 흩어지니 / 忽然雲霧散 궁궐이 우뚝 솟았다 / 宮闕高嵬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 왕위에 있은 지 십구 년 만에 / 在位十九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 升天不下莅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한다. |
1) 위에서 보다시피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에 있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다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를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2) 삼국사기에만 있는 내용: 행인국과 북옥저를 쳐서 병합한 내용과 주몽의 어머니 유화의 죽음 (이런 점을 보면 삼국사기가 상당히 많은 여러가지 사료를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유리가 도망쳐왔다는 내용은 아래에 나옴 2. 구삼국사와 단군고기의 비교.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구삼국사-舊三國史, 동명왕 본기) | 단군고기(檀君古記) |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 玄雲冪鶻嶺 산이 뻗쳐 연한 것이 보이지 않고/ 不見山邐迤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들려 / 有人數千許 나무 베는 소리와 방불하였다 / 斲木聲髣髴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王曰天爲我 그 터에 성을 쌓는 것이라 한다 / 築城於其趾 홀연히 운무가 흩어지니 / 忽然雲霧散 궁궐이 우뚝 솟았다 / 宮闕高嵬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土木)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 왕위에 있은 지 십구 년 만에 / 在位十九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았다 / 升天不下莅 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太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대신 용산(龍山)에 장사하였다 한다. | 검은 구름이 골령(骨嶺)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을 보지 못하는데, 오직 수천 사람의 소리만 들리며 토공(土功)을 일으키니,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7일 만에 구름과 안개가 스스로 걷히고, 성곽과 궁궐이 저절로 이루어지니, 왕이 황천(皇天)께 절하고 나아가 살았다. 9월에 왕이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 때의 나이가 40살이었다. 태자가 〈왕이〉 남긴 옥채찍[玉鞭]으로써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 |
1) 여기서도 보면 구삼국사 동명왕 본기와 단군고기가 완전히 똑같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동명왕에 대한 기록은 구삼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또한번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