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본기

백제 시조 온조왕 본기- 1

상 상 2011. 11. 6. 13:30

시조 온조왕

0 년 (BC 18) : 온조왕이 왕위에 올랐다.

[번역문]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天險地利]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 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씨(氏)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처음 대왕이 부여에서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孺留)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그저 군더더기 살[疣贅]처럼 답답하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명(東明)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다. [그는] 처음에 대방의 옛 땅[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漢)나라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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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원본 출처: http://koreandb.nate.com/history/saki/saki?kind=b

 

<해설과 분석>

 

1. 삼국사기는 백제의 시조에 대해 세가지의 다른 기록에 있는 것을 전하고 있다.

 

첫째, 시조는 온조왕이며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둘째,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이며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이다.

셋째, 시조는 구태(仇台)이다. 그는 동명(주몽)의 후손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록은 우리민족에게 전해오는 사서인 고기(古記)의 내용을 옮겨 기재한 것이고,

세 번째 기록은 삼국사기가 밝혔듯이 중국측 기록인 북사와 수서에 있는 내용이다.

그러면서 김부식은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또한번 알수 있는 것은 삼국사기가 기존 사서를 추려 재단(오려 붙이기)하는 방법으로 편집한 책이라는 것이다.

김부식이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서 말한 “추려 재단”했다는 말과 “폐하께서 편집을 하명”했다는 말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임금께서 편집을 명하신 바에 따라 충실하게 기존사서를 추려 재단하여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김부식의 창작내지는 조작이기 때문에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얼마나 근거없고 엉터리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온조왕 본기는 또한번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턱도없는 거짓말임을 증명해 주었다.

 

2. 그 다음, 첫 번째 이야기와 두 번째 이야기가 다른 것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고기(古記)의 내용은 인용한 까닭인데,

이것을 보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만 하더라도 전해 내려오는 고기(古記)가 여러 가지가 있었음을 알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고기(古記)가 지금도 전해내려 왔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고대사에 관한 극심한 사료(史料)부족 사태를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중에서 아마 상당부분은 왜인들이 일제시대에 가져가서 숨겨 놓았다고 한다.

무려 삼십만권에 달하는 우리 사서를 약탈해가서 일본 곳곳에 숨겨 놓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하루빨리 강국이 되어 이것을 찾아온다면 진정한 우리 역사를 밝히는데 획기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3. 첫 번째 고기(古記)의 내용에 따르면,

 

1)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고, 주몽이 나라를 세운게 아니고

졸본 부여의 왕위를 이은(계승한) 것이다

그리고 졸본부여 왕은 딸만 셋이 있었는데 그중 둘째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비류와 온조이다.

(이 이야기는 해모수가 하백의 세 딸중 맏딸인 유화와 혼인하는 장면과 비교된다.)

 

그리고 이 고기(古記)에서도 또하나의 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른바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하였다.> 이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또한번 기존사서를 재단하여 편집했다는 사실을 충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할만큼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즉, 우리민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사서인 고기(古記)는 그 내용이 제각각이어서 도대체 무엇이 옳은지 알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고 그만큼 수많은 고기(古記)가 그때까지만 해도 전해 내려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2)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세운 까닭은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孺留]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이고

 

비류는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살았고, 온조는 하남(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후 비류는 위례에 돌아와 죽고 그 신하와 백성들은 온조에게 귀부하였다.

국호는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그 후 [처음] 올 때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世系]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성씨(氏)로 삼았다.

 

 

4. 두 번째 고기(古記)에 따르면,

 

1)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이고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이며, 우태는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다.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라는 말에 대하여:

해부루는 동명성왕 본기 처음에 나오는 부여의 왕이며, 친자식이 아닌 금와를 얻어 태자를 세우고 동쪽으로 나라를 옮긴 사람이다.

그리고 원래 도읍지에 나타난 사람이 해모수이다.

그 다음, 금와는 일곱아들이 있었는데 우태는 그 일곱 아들중 하나라는 말로도 이해 할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비류와 온조는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 낳은 아들이고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그 뒤에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두 고기,古記는 한결같이 주몽이 졸본에 왔다고 한다)

 

주몽은 그녀가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와 애쓰고 노력함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그러나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친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자기들은 주몽의 친아들도 아니니 재산이 많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자고 하여

드디어 동생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살았다.

즉, 백제를 세운 사람은 비류이며 첫 도읍지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이다.

 

 

5. 마지막으로, 북사(北史)와 수서(隋書)의 이야기는 틀린 기록이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

 

구태(仇台)를 백제의 시조라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고 했는데

공손도가 자기 딸을 시집보낸 사람은 '위구태(尉仇台)'라는 사람이며 그 사람은 부여왕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遼東郡)에 복속하였다. 이 때에 고구려([高]句麗)와 선비(鮮卑)가 강성해지자,

공손도([公孫]度)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부여와 동맹(同盟을) 맺으려고] 일족(一族)의 딸을

[그 王에게] 시집보내었다.>

 

따라서 북사와 수서는 삼국지에 있는 '위구태(尉仇台)'를 '구태(仇台)'로 성을 빼고 이름만 기록한 것으로써 잘못 인용한 것이며

'일족의 딸'을 '자기 딸'로 잘못 기록한 것으로서 백제 시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위구태' 내지는 '구태'를

백제 시조로 오인 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북사와 수서의 기록은 명백히 틀린 기록으로서 백제 시조의 기록으로는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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