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연구초

조선사연구초(수정판)

상 상 2011. 9. 26. 22:23

< 이 수정본은 인터넷에 위키문헌으로 올려진‘조선사연구초’를 알기 쉽고, 읽기 쉽게 수정한 것임.>

 

 

* 조선사 연구 초(朝鮮史硏究草, 저자: 신채호)

 

 

     차      례

.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법

나.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동서 양자(東西兩字)의 상환(相換) 고증(考證)

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라. 평양 패수고(平壤浿水考)

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가. 古史上(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

    : 옛 사서(史書)에 나오는 이두문 명사 해석법

 

 

--- 차  례 ---

1. 서론

2. 해석 방법

1) 본문(本文)의 자증(自證)

2) 동류(同類)의 방증(傍證)

3) 전명(前名)의 소증(遡證)

4) 후명(後名)의 연증(沿證)

5) 동명이자(同名異字)의 호증(互證)

6)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

3. 결론

 

 

 

 

1. 서론

혹은 이를 웃으리라, 번잡 자질구레하고 무익한 일이라고.

그러나 착오가 이에서 교정 되느니라.

 

그릇된 것과 틀린 것이(訛誤-와오가) 이에서 바로 잡히게 되느니라.

각기 제 시대의 본색이 이에서 탈로 되느니라.

 

이미 흩어져 없어진 조선 역사상의 대사건이 이에서 발견 되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이 곧 땅속 고적을(地中古蹟-지중고적을) 발굴함에 비길 만한 조선사 연구의 비밀 열쇠 이니라.

 

예로부터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不知者-부지자들이) 이 비밀 열쇠를 망령되게 침범하여 도리어 본래의 뜻을

어수선하게 한 일이 많다.

 

예를 들면,

무명씨의 동언고략(東言考略)에 「신라가 부여를 미워하여(惡-악하여) '부여 죽인다'는 말이 생기었다」하며,

 

이아정(李雅亭)이 고구려는 깨고리의 뜻을 취함이라 하며,

정다산이 위례성은 울(圍籬-위리)의 뜻을 취함이라 하며,

 

근일 일본의 어떤 학자들이 변한(弁韓)의 변(弁)은 음이 “배”라, 뱀의 배니 사한(巳韓)의 뜻이요

마한은 오한(午韓)의 뜻이니 진한 마한 변한은 다 12지(支)에서 취하여 있는 곳의 방위를 증명함이라고 하니,

 

이같이 증거없이 비슷한 음을 취하여 억지 판단(武斷-무단)을 내릴진대,

 

구태여 부여 죽인단 말이 부여 때문에 생겼겠느냐?

비었다(空-공), 부옇다(白-백) 등의 말도 다 부여 때문에 생긴 말 일지며,

 

구태여 개구리만 고구려의 이름 지은 원인이 될 뿐이랴.

꾀꼬리(鶯-앵), 개꼬리(狗尾-구미), 게꼬리(蟹尾-해미) 등이 모두 고구려란 이름의 유래(所自出-소자출)가 될지며,

 

백제 초년에 병산(甁山) 마수(馬首) 고목(高木) 우곡(牛谷) 등 성책(城柵)이

다 그 소재지의 지명(地名)을 가져다 이름 지은 것인데,

홀로 그 수도의 위례성을 한강의 옛 이름“아리”에서 취하지 않고

울(圍籬:위리)의 뜻으로 이름 하였다 함이 무슨 설이며,

 

변한의 변을 뱀의 배에서 뜻을 취하였다 함은 더욱 반박할 가치가 없지만,

삼한(三韓)의 위치가 명백한 진한은 동이며 마한은 서이며, 변한은 남 이어늘

이제 마한은 오방(午方: 정 남방)이라, 변한은 사방(巳方:동남방)이라 함이 무엇에 근거함이뇨.

 

무릇 옛 사서상(古史上-고사상) 이두문으로 쓴 명사의 해석에 허다한 곤란이 있으니

 

대개 이두문은 한자의 전체 음(全音-전음), 전체 뜻(全意-전의),

혹은 반쪽 음(半音-반음), 반쪽 뜻(半意-반의)으로 만든 일종의 문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두문이 구역문(口譯文: 소리를 번역한 글)으로 되기 전에는

자모(字母:자음과 모음)의 발견만 않된 게 아니라 일정한 법칙도 없어서,

 

같은 백(白)자 이지만 무슨 까닭으로 上白是白은 그 전체 뜻을 읽어 “살”이라 하면서

 

<※上白是: 샹살이,‘상사리’라고 읽고 그 뜻은 웃어른께 올리는 편지의 첫머리나 끝에 사용되어‘살외어(사뢰어) 올립니다’이다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白良의 白은 그 반음을 읽어“바”라고 하느냐 하면 그 해답이 없으니 그 곤란이 첫번째요.

 

<※ 白良:‘바라’라고 읽고 그 뜻은‘~는 바이다’: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

 

한자(漢字)로 지은 주, 군, 현의 이름은 경덕왕이 시작한 바,

그 변경할 때, 밀불(推火-추화)이 밀성(密城)이 되고, 거물라(今勿奴)가 흑양(黑壤)이 된 것 같이

옛 이름을 번역하여 사용한 것도 있지만,

 

퇴화(退火)가 의창(義倉)이 되며, 비화(比火)가 안강(安康)이 되어

아주, 옛 이름의 본래 뜻을 버리고 한자로 지은 지명이 더 많으며,

 

중국의 관명(官名)을 모방함은 궁예 왕에서 시작하여 고려 광종에서 완성이 되었으나,

이는 또 한개도 옛 이름을 번역해서 사용한 것이 없은즉,

 

그 이름의 뜻(名義-명의)의 원류를 찾는 동시에 매번 앞뒤 사이가 끊어진 유감이 없지 아니하니

그 곤란이 두번째요.

 

삼국사기나 기타 사책(史冊)에 이두문으로 쓴 당시의 본명으로 실록에 기록치 아니하고

후에 와서 번역하여 사용한 한자의 명사를 기록 하였으니

 

예를 들건대 백제가 쓰던 한강의 이름인 욱리하(郁里河)가 겨우 개로왕 본기에 한번 보인 이래에는

오직 신라가 고친 이름인 한강이 온조 초년부터 보이었으며,

 

고구려가 쓰던 요동성의 이름은 오렬홀(烏列忽)이거늘,

삼국사기에 오렬홀이 겨우 지리지(地誌-지지)에 한번 보인 이외에는

모두 수당(隨唐: 수나라 ~ 당나라)사람이 칭호한 요동성으로 적히었을 뿐이니,

 

그러면 아주 참고 할수없이 된 본명도 허다할 뿐더러

 

어떤 것은 당시의 본명인지, 후에 와서 번역한 이름인지 알 수 없이 된 것도 적지 아니하리니

그 곤란이 세번째다.

 

조선의 사책(史冊)은 옛날부터 저자만 있고 독자는 없는 서적이라,

 

무슨 사책이든지 와자(訛字: 그릇된 글자), 오자(誤字: 틀린 글자),

첩자(疊字: 겹친 글자), 누자(漏字: 빠진 글자)가 지면에 충만한 중에,

 

더욱 옛 지명과 옛 관명(古官名-고관명)같은 것은 오랑캐 언어로 배척하여

그 와(訛: 그릇됨), 오(誤: 틀림), 첩(疊: 겹침), 누(漏: 빠짐)를 거의

베껴쓰는 사람이나 인쇄 조판하는 사람의 자유에 방임하여 정정(訂正)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중국 24사(史) 중 이른바 조선열전 혹 동이열전에 적힌 명사가

전해들은 대로 음역한 것도 있지만,

직접으로 당시 이두문의 본명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것도 적지 않으나,

 

수백년래로 옛 서적 고증(考證)에, 늙은 중국 문사(文士)들이

남의 역사에는 사정도 깜깜일(隔膜-격막일) 뿐더러 노력도 좀 아낀지라,

 

그리하여 모든 사실의 오류나 문구의 와전(訛傳:그릇되게 전함)도 발견한 이가 없거든,

하물며 저들의 눈에 서투른 일반명사이랴.

 

그러므로 그 조선열전 등의 와(訛: 그릇됨), 오(誤: 틀림), 첩(疊: 겹침), 누(漏: 빠짐)가 또한 대단하여

신용하기 위험한 기록들이니 그 곤란이 네번째다.

 

언어는 사판적(死板的: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활판적(活板的: 변경 가능한 것)이라

시대를 따라 생성 소멸하며 변화하는 고로

 

훈몽자회나 용비어천가나 처용가 같은 것에 의거하면,

“코 鼻(비)”가 “고”이며,

“가랑 脚(각)”이 “가랄”이며,

“잇기 苔(태)”가 “잇”이며

“강 江”이 “가람”이며,

“바다”가 “바랄”이요,

 

삼국사기나 만주원류고 같은 것에 의거하면

“철(鐵)”이 “물”이며,

“삼림(森林)”이 “와지”이며,

“관경(管境)”이 “주선”이니,

 

그러면 이밖에 소멸, 혹 변하고 고쳐진 말이 얼마인지 모를지니 그 곤란이 다섯번째라.

 

그러나 조선사를 연구하지 아니하려면 모르거니와 연구하려면 여기에 힘을 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라.

 

이제 아래에 어리석은 사람도 많은 생각 가운데는 한 가지쯤 좋은 생각이 미칠 수 있음을(千慮一得:천려일득을)

진술하여 일반 독사자(讀史者:역사를 읽는 사람)의 밝게 살펴 바로잡음을(斤正-근정을) 구하노라

 

 

2. 해석 방법

 

1) 본문의 자증(自證)이니,

   :사서에 쓰인 본문으로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본문 자체에서 해석방법을 얻을 수 있는 경우)

 

이를테면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각간(角干)을 일명 서불한(舒弗邯) 혹은 서발한(舒發翰)이라 하였으니

 

각(角)은 쇠뿔의 뜻이요, 서불 혹은 서발은 쇠뿔의 음이라.

무관(武官)이 쇠뿔로 만든 활을 씀으로 관명을 지음이니,

근세까지도 영남인(嶺南人)이 무관을 “쇠뿔에기”라 함이 그 유풍이요,

 

간(干), 한(邯), 한(翰)은 다 “한”의 음이니 ('邯-한'은 '邯鄲-한단'의'邯-한'과 동음),

그런즉 각간(角干), 서불한(舒弗邯), 서발한(舒發翰)은 다 “쇠뿔한”으로 읽을 것 이니라.

 

열전(列傳)에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苔宗)이라 하며, 거칠부(居柒夫) 일명 황종(荒宗)이라 한 바,

 

이사(異斯)는 태(苔: 이끼)의 뜻이니 “잇”이요

거칠(居柒)은 황(荒: 거칠다)의 뜻이니 “거칠”이요,

 

부(夫)는 경서언해의 사대부(士大夫)를“사태우”로 풀이함에 의거하여

그 옛 음이 “우”임을 알지니,(종-宗:마루, 즉 위에 사투리로 '우에'의 뜻이니)

 

이사부는 “잇우”로, 거칠부는 “거칠우”로 읽은 것이며,

 

본기(本紀: 신라본기)에

“소지일작비처(炤智一作毘處: 소지는 비처라고도 한다)”라 하며

“벌휘일작발휘(伐暉一作發暉: 벌휘는 발휘라고도 한다)”라 하였은즉,

 

소지(炤智)의 소(炤: 비추다, 밝다)에서 반쪽 뜻을 취하여 “비”로 읽고,

지(智)는 전체 음을 취하여 “치”로 읽은 것이니

“소지”와 “비처”가 동일한 “비치”이며,

 

이두문에 늘 불(弗), 발(發), 벌(伐)은 통하는 글자인즉,

벌휘(伐暉)와 발휘(發暉)가 동일한 “뿔휘”니

뿔휘는 용비어천가에 의거하여

지금의 말, 뿌리이다(根-근이다).

 

지리지에 “삼척군은 본래 실직국이다(三陟郡本悉直國)”이요

“금양군은 본래 휴양군이다(金壤郡本休壤郡)”이라 하였은즉,

 

“세치”의 음이 실직(悉直)이 되며 “세치”의 “세”는 뜻으로 쓰고

세치의 “치”는 음으로 써 “삼척”이 됨이요,

 

“쇠라”를 음으로 써 휴양(休를 중국에서는“쉬"라고 읽는 다고 함)이 되고,

“쇠” 뜻으로 써 금양(金壤)이 됨이니라.

 

이 따위는 이루 셀 수 없으므로 아직 생략하거니와,

이상은 곧 다른 먼 증거를 기다릴 것 없이 그 해석을 얻는 것 이니라.

 

 

2) 동류(同類)의 방증(傍證)이니,

   :본문에서 그 해석을 얻을 수 없는 명사는

    그 같은 종류(同類-동류)를 수집을 하고,

    수집된 것을 근거로 추정 판단하여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이를테면 옛 사서를 읽다가 지명(地名)의 꼬리에 달린

홀(忽), 파의(波衣), 홀차(忽次), 미지(彌知) 같은 것들을 만난다 하자.

 

홀(忽)이 곧 “골”인가의 의문이 있지만 의문이 확설이 되지 못하나니

반드시 미추홀(彌鄒忽), 술이홀(述爾忽), 비렬홀(比列忽), 동비홀(冬比忽) 등

모든 홀의 같은 종류를(同類-동류를) 얻어야 학설이 될지며,

 

파의(波衣)가 곧 바위인가의 가정이 생기지만 가정으로 단언을 내리지 못할지니

반드시 조파의(租波衣- 조바위: 추울 때 여자가 쓰는 방한 모자),

구사바위(仇斯波衣), 별사바위(別史波衣) 등 모든 파의의 같은 종류를 얻어야 단안이 될지며,

 

갑비홀차(甲比忽次), 요은홀차(要隱忽次),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 등 모든 홀차의 같은 종류를 얻으면

홀차가 곧 “고지”즉, 반도(半島)인 줄을 알지며,

 

송미지(松彌知), 고마미지(古馬彌知), 무동미지(武冬彌知) 등 모든 미지의 같은 종류를 얻으면

미지가 곧 수만(水灣: 물이 땅으로 움푹 들어 온 곳)인 줄을 알지니라.

 

한양(漢陽)의 남산도 목멱(木覔)이요 평양의 남산도 목멱인즉,

남산과 목멱(木覔)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 관계로 인하여

목멱은“마메”곧 남산의 이두문인 줄을 알지며,

 

송산(松山)의 옛 이름이 부사대(扶斯達)요,

송현(松峴)의 옛 이름이 부사파의(扶斯波衣)요,

송악(松嶽)의 옛 이름이 부사갑(扶斯甲)인즉,

 

송(松)과 부사(扶斯)의 서로 따라다니는 원인으로 인하여

송(松)의 고어(古語)가 “부스” 곧 부사(扶斯)인 줄을 알지니라.

 

이상 본문에서 그 해석을 얻을 수 없는 명사는

그 같은 종류를 수집하여 추정, 판단할(추단-推斷할) 것 이니라.

 

 

3) 전명(前名)의 소증(遡證)이니,

: 옛 이름(前名-전명)을 찾아 그것을 근거로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본명사가 발생한 지방이 모호하거든 그 옛 이름을 찾아 진짜와 가짜를 아는 것과 같은 종류)

 

이를테면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을 단군의 아사달(阿斯達)이라 하고,

풀이하는 글이(解字-해자가) 가로되(曰-왈),

 

아사(阿斯)는 아홉이요, 달(達)은 달(月)이니 구월(九月)의 뜻이라 하나,

 

아사(阿斯)를 앗, 엇, 옷, 웃 혹은 아쓰, 어쓰, 오쓰, 우쓰 등으로 읽을 수 있으나

아홉으로는 읽을 수 없으며

 

달(達)의 음은“대”이니 “대”는 산 고개(山嶺-산령)의 뜻이니

청주(淸州)의 상당산(上黨山)을 “것대”라 칭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니(類-유니),

 

삼국사기 지리지에 난산(蘭山)의 옛 이름이 석대(昔達)요

청산(靑山)의 옛 이름이 가지대(加支達)이요,

송산(松山)의 옛 이름이 부사대(扶斯達)이니,

 

아사달(阿斯達)의 달(達)도 그와 같이

음은 “대”요,

뜻은 “산 고개(山嶺-산령)”이니 달(月)의 뜻으로 풀이함이 불가하며,

 

구월산의 옛 이름은 궁홀(弓忽)이요, 궁홀의 별명은 검모현(劍牟縣) 혹 궁모현(窮牟縣)이니,

세가지 이름을 합하여 보면 궁홀(弓忽)은 “굼골”로 읽을지니,

고구려 말엽에 의병대장 검모잠(劍牟岑)이 의병을 일으켜 당나라와 싸우던 곳이며,

 

“굼골”의 명산(名山)인 고로 “굼골산”이라 함이니,

마치 금강산이 “개골”에 있는 산(山)인 고로 “개골산”이라 한 것과 같은 종류((類-유) 이거늘,

 

이제 굼골을 구월로 와전하고 구월을 아사달로 위증하여

단군의 후예가 구월산으로 도읍을 옮긴 것처럼, 사실을 위조하였으나,

 

이는 신라 경덕왕이 북방에 있었던 주와 군명을 옮기고 따라서 고적까지 옮길 때에 만든 것이요

사실(史實)이 아니니라.

 

북부여(北夫餘)의 옛 이름이 조리비서(助利非西)요,

합이빈(哈爾賓: 하얼빈)의 옛 이름이 비서갑(非西岬)이라.

 

속어에 팔월 추석을 가우절이라 하고 삼국사기에는 가배절(嘉俳節)이라 하였으니,

비(非), 배(俳) 등의 글자가 옛 음(古音-고음)에“우”임이 명백하니

비서(非西)와 아사(阿斯)가 음이 서로 가까울 뿐더러

 

단군 후예인 해부루는 합이빈(하얼빈)에서 동쪽으로 옮겨 동부여가 되며

해모수는 합이빈(하얼빈)에서 굴기하여(堀起: 우뚝 일어남) 북부여가 되었은즉,

 

아사달은 곧 비서갑(非西岬)이니,

지금의 합이빈(하얼빈) 완달산(完達山)이 그 옛 땅(유지-遺地)이 될지니라.

 

이상은 그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성씨를 얻으면 그 자손된 그 사람의 성씨도 자연 알게 되듯이

본명사가 발생한 지방이 모호하거든 그 옛 이름을 찾아

진짜와 가짜를 아는 것과 같은 종류이니라.(類-유니라)

 

 

4) 후명(後名)의 연증(沿證)이니,

   :나중에 지어진 이름(後名-후명)의 원래 음과 뜻을 찾아

    그것으로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이를테면, 진수(陳壽)의 삼국지 삼한전에

“모든 관직(諸官-제관)”을  다“지(智)”라 이름 하였다 하며,

그 중의 대관(大官)은 신지(臣智)라 이름 지었다 하고,

 

신지(臣智)를 혹 “신운견지(臣雲遣支)”라 칭한다 하였으니,

지(智), 신지(臣智), 신운견지(臣雲遣支) 등을 당시에 무엇으로 읽었겠느뇨.

 

고대에 여러 소국의(諸小國- 제 소국의) 으뜸이 되는 대국을 진국(辰國)이라 하며,

모든 작은 왕을(諸小王- 제소왕을) 관할하는 대왕(大王)을 진왕(辰王)이라 하며,

 

모든 소도(諸蘇塗-제소도:神壇-신단)의 으뜸되는(宗主-종주되는) 대소도(大蘇塗)를

신소도(臣蘇塗)라 한바,

 

신(臣)과 진(辰) 등을 다 “신”으로 읽을 지니,

신은 태(太: 가장 크다)의 뜻이며, 총(總:모든)의 뜻이며,

상(上: 위)의 뜻이며, 제일이란 뜻이요,

 

지(智)의 음은 “치”니 관명의 支(지)와 智(지) 등의 글자는 모두 “치”로 읽을 지니

신지(臣智) 즉 신치는 집정(執政: 권력을 집행함)의 수상(首相)이요

 

“신운견지(臣雲遣支)”의 운(雲)은 아랫 글의 거운신국(巨雲新國)의 “운”을

여기에 중첩 기재(첩재: 이중 기재)한 자니,

'운' 자를 빼고 “신크치”로 읽음이 옳으며,

 

신견지(臣遣支)는 고구려의 태대형(太大兄)이요 신라의 상대등(上大等)이니

신크치의 음이 신견지(臣遣支)가 되며

뜻이 태대형(太大兄) 혹 상대등(上大等)이 됨 이니라(大兄一名近知: 대형은 일명‘근지’라고 한다).

 

무릇 태대(太大)는 모두 “신크”니,

연개금(연개소문)의 태대대로(太大對盧: 金庾信傳 - 김유신전에 보임)는 “신크마리”로 읽을지며,

김유신의 태대각간(太大角干)은 신크쇠뿔한(쇠뿔한의 뜻은 이미 前述-전술)으로 읽을 지니라.

 

저자가 연전에 북경 순치문내 석등암에 우거할때에 일개의 동몽고승(東蒙古僧)을 만나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몽고말로 무엇이냐 물은즉

 

“동은 준라, 서는 열라, 남은 우진라, 북은 회차”라 하여 그 명칭이

 

고구려의 순나(順那), 연나(涓那), 관나(灌那), 절나(絶那) 등,

동서남북 4부와 비슷하므로 매우 놀랐다(驚起-경기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자로 쓰며 서로 문답하다가 원태조 황제의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 칭한 뜻을 물어본즉

 

성길(成吉)은 “싱크”니 몽고말로 최대의 뜻이요,

사(思)는 음이 “쓰”니 위엄과 권력(威權-위권: 권위)의 뜻이요,

한(汗)은 제왕의 뜻이니,

성길사한은 곧 무상최대의 위엄과 권력을(威權-위권: 권위를) 가진 제왕이란 뜻이라 하니,

 

싱크는 대개 조선 고어(古語)의 신크가 변화한 자니,

삼국 이두문 학자의 붓으로 원 태조의 이름을 쓰자면 태대사(太大思)라 할지로다.

 

그러면 태대(太大)의 이름을 가지고 역사상에 나타난 자가 김유신, 연개소문, 성길사한(칭기스칸) 3인이니,

비록 문명과 야만의 구별과 활동 범위의 대소는 현격하게 다르나

각기 일시 동양 정치무대상의 대괴물이니 또한 일종의 아름다운 이야기라(佳話-가화라) 할지로다.

 

 

5) 동명이자(同名異字)의 호증(互證)이니,

   :다른 이름으로 된 글자에서 음과 뜻과 연혁으로써

    그 같은 이름 됨을 발견하여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전술한 모든 명사가 거의 동일한 명사를 서로 다른 글자로 쓴 것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복잡한 글자가 두 가지니,

 

하나는 “라”이다.

 

사라(沙羅)가 사량(沙良)이 되기도 하며,

가슬라(加瑟羅)가 가서량(加西良)도 되며,

평양(平壤)이 平穰(평양), 평나(平那), 백아(百牙), 낙랑(樂浪), 낙량(樂良) 등도 되며,

대량(大良)이 대야(大耶)도 되고,

가라(加羅)가 가락(駕洛), 가야(加耶), 구야(狗邪), 가량(加良) 등도 되며,

안라(安羅)가 안아(安邪)도 되며,

매라(邁羅)가 매로(邁盧)도 되며,

신라(新羅)가 사로(斯羅)도 되며,

순나 연나(順那 涓那) 등이 순노 연노(順奴涓奴) 혹 순루 연루(順婁 涓婁) 등도 되어

갈피를 잡을 수 없으나

 

기실(사실)은“라(羅) 량(良) 로(盧) 노(奴) 루(婁) 나(那) 아(牙) 양(壤) 야(耶) 아(邪)”등이

모두 “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니 “라”는 천(川: 내, 강)의 뜻이라.

 

삼국사기에

“故國壤一名故國川(고국양 일명 고국천)”이  양(壤) 등이“라”됨을 증명하며,

“素那一名金川(소나 일명 금천)”이  나(那) 등의 “라”됨을 증하며,

“沸流奴一名沸流川(비류노 일명 비류천)”이  노(奴) 등의 “라”됨을 증하니라.

 

“穰(양) 壤(양)” 등의 글자가 어찌 “라”가 되느뇨.

훈민정음에 “ㅿ如穰字初發聲:ㅿ은 양(穰) 자(字)의 처음 나오는 소리와 같다”라고하니

ㅿ은 이제 소멸된 음이나

 

노걸대(老乞大), 박통사 언해(朴通事諺解) 등의 책에

북경말(北京話-북경화)의 일(日: 북경화의 발음으로는 '르'임)을 ㅿ로 발음하였은즉,

ㅿ은 즉 ㄹ에 비슷한 자(字) 이다.

 

양(穰) 자(字)의 전체 음이‘랑’에 비슷한 “ㅿㅏㅇ(합쳐진 글자가 여기에는 표시되지 않음)”인 고로

이두문에 펴라(‘펴ㅿㅏ’이라 씀이 옳으나 'ㅿㅏ'이 소멸된 자인 고로“라”로 대신함)란 물 이름을 쓸새,

 

음으로 써서 平壤(평양), 平穰(평양), 百牙(백아) 등이 되며,

 

윗 글자는 뜻으로, 아래 글자는 음으로 써서 樂浪(낙랑), 樂良(낙량) 등이 되며,

 

윗 글자는 음으로, 아래 글자는 뜻으로 써서 浿河(패하), 浿江(패강), 浿水(패수) 등이 됨이니,

 

속어에 평양립(平壤笠: 평양 삿갓)을 “펴랑이”라 함을 보아도

평양(平壤)을 이두문에 “펴라”로 읽음이 명백하니라.

 

평양(平壤)이나 패수(浿水)가 동일한 “펴라”이면

“펴라”가 어찌 물 이름(水名-수명)이 되는 동시에 또 땅 이름(地名-지명)이 되겠느뇨.

 

공주의 “버드새”가 물 이름(水名-수명)이지만,

그 수변(水邊- 물가)의 역명(驛名)도 “버드새”요,

 

청주의 “까치내”가 수명(水名)이지만 그 수변(水邊)의 촌명(村名)도 “까치내”니,

 

삼국지에 “고구려 사람들은 나라를 세울 때 큰 물가에 세워 살기를 좋아 한다

(句麗作國好傍大水而居)”라 한 바,

수변(水邊- 물가)에 나라를 세움은 조선인(朝鮮人) 고래의(古來: 옛부터 내려오는) 습속이다.

 

그러므로 라(羅), 량(良), 로(盧), 노(奴) 등 모든 “라”의 지명(地名)이 있게 된 것이며,

나라의(國家-국가의) 명칭이 나루(津渡-진도)에서 비롯됨 이니라.

 

평양(平壤)과 패수(浿水)가 이와 같이 갈리지 못할 관계가 있거늘,

순암(順菴- 안정복) 선생은 패수는 대동강으로 잡고서 위만의 평양을 그 오백리 이외의 한양(서울)에 와서 구하며,

백조고길(白鳥庫吉)은 평양을 지금의 평양으로 잡고서 위만이 건넌 패수를 압록강 하반부라 하였으니,

 

이는 다 “펴라”란 이름이 이두문의 평양(平壤), 패수(浿水) 등 됨을 모른 까닭이라.

 

 

두번째는 “불”이니,

 

삼한의 비리(卑離)와 백제의 부리(夫里)와,

동부여, 북부여, 졸본부여, 사비부여(泗沘扶餘) 등의 부여(扶餘)와,

추화(推火), 음즙화(音汁火) 등의 화(火)와,

불내성(不耐城)의 불(不)과,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등의 벌(伐)이

다 “불”로 읽을 것이니,

 

불은 평지(平地)의 뜻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흠정만주원류고에 삼한의 비리(卑離)를 곧 청조 관명(淸朝 官名)의

패리(貝勤)와 같은 것이라 하였으나,

 

이를 백제의 지리지와 대조하면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요, 피비리(辟卑離)는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요, 감해비리(監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니,

 

비리(卑離)는 국명이요 관명이 아니니,

그 상세는 졸저 전후삼한고에 보이니라.

 

이상은 곧 복잡한 다른 이름으로 된 글자에서

음과 뜻과 연혁으로써 그 같은 이름 됨을 발견한 자이니,

조선고사의 연구에 비상한 도움이 있는 자 이니라.

 

 

6) 이신동명(異身同名)의 분증(分證)이니,

   :글자의 같고 다름을 불문하고,

    이름이 같은 것을 분석하여 이두문을 해석하는 방법이니,

 

전술한 이름이 같으나 글자가 다른 것“라”와 “불” 등 보통명사에 관하여

같은 이름이 다른 글자로 쓰인 것을 논술한 바 이어니와,

 

여기에서는 고유명사 가운데 글자의 같고 다름은 불문하고 이름이 동일한 것을 논증하려 한다.

 

예를 들면,

동사강목 지리고에 대동열수(大同列水), 한강열수(漢江列水)의 따짐이(辨-변이) 있으며,

송화압록(松花鴨綠), 요하압록(遼河鴨綠), 지금 압록의 다툼이 있으나,

 

기실은(사실은) 맞다 하면 모두 맞는 것이요, 틀리다 하면 모두 틀린 것이니,

 

조선 고어(古語)에 긴 것을(長-장을) “아리”라 하였으니

장백산의 옛 이름인 아이민상견(阿爾民商堅)의 “아이”가 이를 증명하며,

 

압(鴨:오리)도“아리(원래는 0+아래아, 리 이나 이 블로그는 아래아를 표기 할수 없음)”라 하였으니,

“압수 일명 아리수(鴨水一名阿利水)”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대개 옛 사람이 일체의 긴 강(長江-장강)을 “아리가람”이라 칭하니라.

(0+아래아를 이 지면에서는 표기를 못하여 대신 '아'로 씀. 이하 전부 같은 방법으로 표기함)

 

한자를 수입하여 이두문을 만들어 쓸 때에 “아리”의 음을 취하여

아리수(阿利水), 오열강(烏列江:오리강), 구려하(句麗河:구리하), 욱리하(郁里河: 우리하) 등으로 썼으니,

 

“아리”의 “아(아래아)”가 “아”, “오”, “우”의 사이 소리인 고로

아(阿), 오(烏), 구(句), 욱(郁) 등 각종 음을 취함이(取音-취음이) 같지 않음이요,

 

뜻으로 써서 압자하(鴨子河) 혹은 압록강(鴨綠江)이라 함이니

 

압록(鴨綠)도 소지(炤智)의 이두와 같이“아리”의 “아(아래아)”를“鴨(아리: 오리)”의 뜻에서 취하고,

“아리”의 “리”를 록(綠)의 음에서 취함이니,

 

조선족분포의 순서를 따라 아가람이 이름을 얻은 순서를 추상해본다.

 

제1차에 완달산(完達山) 아래 하얼빈(哈爾賓)에 조선을 건설하고

송화강(松花江)을 “아리 가람”이라 하였으니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주(註)에 인용한 고기(古記)의 유화왕후가 가리킨

“웅심산 아래 압록수(熊心山下鴨綠水)”와

 

요사(遼史) 성종본기의“압자하의 이름을 고쳐 혼동강이라고 하였다(改鴨子河爲混同江)”가

송화(松花)의 옛 이름이 “아리(오리)”임을 증명하며,

 

제2차에 남하하여 요하(遼河)를 보고는 또한 “아리 가람”이라 하였으니,

삼국사기 지리지의 “요동성의 본명은 오열홀이다(遼東城本名烏列忽)”와

삼국유사의“요하는 일명 압록이다(遼河一名鴨綠)”가

요동하(遼東河)의 옛 이름이“아리(오리)”임을 증명하고,

 

제3차에 동쪽으로 나아가 현재 압록강을 보고 또한“아리 가람”이라 하였나니

지금까지 변치 않은 압록의 이름이 그 옛 이름은“아리”임을 증명하며,

 

제4차에 서쪽으로 진출하여 영평부(永平部)의 난하(灤河)를 보고

또한“아리 가람”이라 하였으니

영평부지(永平部志)의 욱렬하(郁列河: 우리하), 무열하(武列河)가

난하의 옛 이름이“아리(오리)”임을 증명하고,

 

제5차에 경기도의 한강을 보고 또한 “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온조 본기의 위례성과 광개강토호태왕의 비문의“아리수를 건었다(渡阿利水)”와

개로왕 본기의 욱리하(郁里河)가 한강의 옛 이름이“아리”임을 증명하며

 

제6차에 경상도에 이르러 낙동강을 보고 또한“아리가람”이라 하였으니,

신라 지리지의 아시량(阿尸良)과 일본서기의 아례진(阿禮津)이 낙동의 옛 이름이“아리”임을 증명하니라.

 

열수(列水), 렬수(烈水) 등은 중국인이 오열수(烏列水), 욱열수(郁列水) 등을 줄여서 쓴 것이니,

모든 열수가 곧 모든 압록강이요 모든 압록강이 곧 모든 열수니, 시대와 경우를 따라 위치를 구별함은 옳거니와,

만일 열수를 한 개를 만들며, 압록강을 한 개를 만들려 함은 어리석은 상상에(癡想-치상에) 불과하니라.

 

산해경이 비록 후세 사람이 쓰고 백익(伯益)이 쓴 것처럼 한 서적이나 사마천 사기에 산해경을 언급(설급)하였은즉,

중국의 진, 한(秦,漢) 이전의 서적 됨은 명백한 바,

 

그중의 “조선은 열양 동쪽, 바다 북쪽, 산 남쪽에 있는데, 열양은 연에 속한다

(朝鮮在列陽東海北山南列陽屬燕)”는 문장을 가지고

 

선배 유학자(先儒-선유)들이 열(列)은 한수요(漢水-한수: 한강이요)

양(陽)은 강북(水北-수북)의 뜻이요, 조선은 지금 평양이라 하여

朝鮮在列陽(조선은 열양에 있다)을 한구(一句)로 읽었으니,

그러면 列陽屬燕(열양은 연에 속한다)을 어떻게 해석할까?

 

列陽(열양)의 陽(양)은 평양(平壤)의 뜻과 같이 물(水-수)의 뜻이요

초성을 읽어 “라”로 발음할 것이니,

 

중국인이 당시 조선인이 쓰는 이두문의 오열양(烏列陽), 혹은 욱열양(郁列陽)을 줄여 열양(列陽)이라 쓴 것이다.

 

그러므로,

朝鮮在列陽東(조선은 열양 동쪽에 있다)가 한 구(一句)이고,

海北(바다 북쪽)이 한 구(一句)이며,

山南(산 남쪽)이 한 구(一句)이고,

列陽屬燕(열양은 연에 속한다)이 한 개의 구(句)니

 

위의 열양(列陽)은 곧 영평부의 난하(灤河)를 가리킨 것이요,

조선은 광녕 평양(廣寧 平壤) 혹은 해성 평양(海城 平壤)을 가리킨 것이요,

海北(해북)은 발해의 북을 가리킴이요,

山南(산남)은 무려(無閭: 의무려산)의 남을 가리킴이니,

 

이것이 대개 진개가 쳐들어 온 이후의 기록이므로

列陽屬燕(열양은 연에 속한다)이라 함이니라.

 

관야정(關野貞:일본인)의 조선고적도설 해설 점제비(朝鮮古蹟圖說解說 黏蟬碑) 주(註)에

그 비의 발견에 의하여 역래 논쟁이(歷來爭論이) 되던 열수는 대동강이 됨이 옳다 하였으나,

 

이는 반드시 한서 지리지의

“列水西至黏蟬入海(열수는 서쪽으로 점선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를 근거함 일지나,

 

그러나 이는

(1) 열수의 다수(多數-수가 많음)됨과

(2) 한서 주(註)의 안사고(顔師古)등의 위증이 있음을 모른 말이라.

 

(2)에 속한 논변은 졸저 “평양 패수고”와 “전후 삼한고”에 보이니라.

 

나의 친구 모군이 압록(鴨綠)의 鴨은 음이“압”이니 앞의 뜻이요,

압록(鴨綠)의 옛 칭호인 마자(馬訾)의 馬는 음이 “마”니

南(남: 남의 고어는 '마'이다. 그래서 남풍을 마파람이라고 함)의 뜻이요,

 

송화강의 옛 칭호인 粟末(속말)의 粟은 음이“속”이니,

안(裡-뜻은 속, 음은 리)의 뜻이라 하였다.

 

압록의 “압”은 잘못 이해한 것이나 그 나머지는 거의 이치에 가깝다.

송화강은 만주어에“송아리”라 하니“송아리”는“속아리"의 변화일지니,

"속아리"는“나라 안(國裡-국리)”의 “아리”란 뜻 일지며,

 

압록의 일명이 매하(梅河)이니 매(梅)가 마자(馬訾)의 마(馬)와 비슷하니

나라의 남쪽(國南-국남)의 장강(長江)인 고로 “마아리”라 함이며,

 

난하(灤河), 요하(遼河), 한수(漢水) 등의 구별한 명사는 찾을 수 없으나

모두 “아리(뜻은 오리)”로 하고 그 앞에 구별의 말이 있었을지니라.

 

고대에는 지명뿐 아니라 인명도 아버지와 아들, 할아버지와 손자(父子祖孫-부자조손)가 같이 짓고,

세대(世代) 혹 대•소 등 글자를 그 앞에 씌워 구별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이 신라에 두 유리왕(儒理王)이 있음을 의아하게 여겨

그 하나는 례(禮)자로 고친다고 명확하게 말했으며(그래서 신라에는 유리 이사금과 유례 이사금이 있음),

 

백제에 두 개루왕(蓋婁王)을 의아하게 생각하여 그 하나는 개로왕(蓋鹵王)으로 하였으나,

(이래서 백제에는 개루왕과 개로왕이 있음)

 

이는 다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휘법(諱法: 높은 사람의 이름 쓰기를 피하는 법)이 수입된 뒤의 안목으로

옛 우리 사서를(古史-고사를) 읽은 까닭이다.

 

여조(麗朝: 고려조, 고려시대) 초년까지도 그 유풍이 있었으므로

안동권씨의 족보에 의거하면 권태사(權太師: 안동 권씨 시조)의 이름이 행(幸)이요,

그 아들의 이름이 인행(仁幸) 이니라.

 

이 따위 관계를 모르고 옛 사서(古史-고사)를 연구하면 마침내 장님이 밤길 가는 것 처럼 되느니라.

 

 

3. 결론

이상의 서술한 바는 곧 졸견으로 얻은 바 옛 사서상(古史上- 고사상)의 이두문으로 쓴 명사의 해석법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얻는 사학적 연구상의 효과를 간략하게 펼처 보이리라(略陣-약진하리라).

 

1) 앞 사람이 이미 증명한 것을 더욱 확실하게 함이니

마치 함창(咸昌)이 고령가야(古寧加耶)임은 앞 사람의 설(說)도 있지만,

이제 야(耶), 라(羅)가 같은 음(同音-동음)인 줄을 발견하여 고령가야를 고링가라로 읽는 동시에

함창(咸昌) 공갈못의 공갈이 곧 고링가라의 줄인 음 임을 알지며,

따라서 고링가라의 위치가 더욱 명백할지니라.

 

2) 유래의 의문을 명확하게 답할 수 있으니,

마치 고려사 지리지에 익산의 무강(武康)왕릉을 기준(箕準)의 능으로 기재하고,

“사람들은 말통대왕 능이라고 부른다(俗號末通大王陵)”라고 주(註)를 달고

“또 이르기를 백제 무왕의 아이 때 이름은 서동이다(一云百濟武王小名薯童)”이라고

두번째 주(再註-재주)를 달아 두 설을 같이 실었으나,

 

삼국유사에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를 꾀어 장가들은 사실을 기록 하였으며,

동국 여지승람에는 무강왕이 선화부인과 미륵산성을 지을때 진평왕이 수많은 공인을 보내 도왔다 하니

 

서(薯)의 뜻은“마”니 서동(薯童)은 곧“마동(童)”이요, 말통(末通)은 곧 '마동'의 음을 취한 것인즉,

무강왕은 곧 백제 본기의 무왕(武王)인 장(璋)이라.

 

장(璋)의 시호가(諡-시가) 무강(武康)왕 이어늘

잔결한(殘缺: 부스러져 빠진 게 많은) 백제사에서 강(康)을 뺐으며

(撅-궐하며: 원래는 무강왕인데 강을 빼고 무왕이라고 했다는 말씀),

 

장(璋)의 왕후가 선화요, 미륵산성은 장(璋)과 선화의 연애를 노래하던 옛 터 이거늘

 

사가(史家)의 참고가 정밀하지 못하여(不精-부정하여)

8백세의 연령이나 차이가 있는 격세(隔世: 세월의 사이가 뜬)의 왕인 기준(箕準)의 궁인(宮人)으로

인식해(認-인하여)

 

유냉재(柳冷齋)같은 박식한 학자(박학자)로도 그 익산의 회고시(懷古詩)에

“가엽구나 정신없이 배타고 떠나면서(可惜蒼黃浮海日)”,

“뱃머리에 선화부인은 태웠구나(船頭猶載善花嬪)”라고 하는 웃음거리(笑話-소화)를 남겼다.

 

 

3) 앞 사람이 위증한 것을 교정할 수 있으니,

역옹패설에 신라 진흥대왕이 벽골제(속칭 김제만경-金堤萬頃 외밤이 들)를 짓고

벼를 파종하므로 후세 사람이 그 은덕을 생각하여 벼를 나록(羅祿: 나락)이라 한다고 하였으나,

 

나록(羅祿: 나락)의 풀이도 고린 한문쟁이((漢文쟁이)의 해석 이어니와,

완산(完山)에 그친 진흥(眞興)의 족적이 어찌 김제의 벽골제에 가서 벼를 파종 하리요.

 

백제 지리지에 의거하면 벽골(碧骨)은 곧 김제의 옛 이름이요 백제의 군(郡)이니,

벽골(碧骨)은 벼골(稻邑-도읍)이니 백제가 이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고

그 이익이 대단히 많음을 기념하여 “벼골”이란 군 이름을 냄이 명백하다.

 

백제본기에 논을 기록한 것이 둘이니,

하나는 다루왕 6년의 "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始作稻田)" 가 그것이요

두번째는 고이왕 9년의 "남택에 논을 개간하였다(開稻田於南澤)" 가 바로 그것이니

벽골은 곧 두번째에 속한 남택의 논이 될지니라.

 

 

4) 이전 사서에 두찬(杜撰: 근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문자를 쓰거나 오류가 많음)을 타파할 수 있으니

 

삼국사기에 석탈해는 금궤에서 탈출한 고로 이름을 탈해라 하고, 까치 울음의 상서로움이 있었으므로

작(鵲:까치) 자(字) 좌변의 昔(석)을 빌려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하며,

 

동사회통에 고주몽은 나라안의 모든 사람이 높이 우러러 보았기 때문에(高仰-고앙한 고로)

성을 고씨(高氏)라 하였다 하며,

 

문헌비고에 여수기(余守己)가 단군의 9부 군장이 되어 많은 사람(중인-衆人)이 붙으므로

중인변(衆人邊)을 더하여 서씨(徐氏)가 되었다 하여,

각종의 괴설이 분분하나,

 

그러나 삼국 중엽 이전에는 인명(人), 지명(地), 관명(官) 등 각종의 명사를

모두 우리말로 짓고 이두문으로 쓴 것이니,

어디 이 같은 한자 파자(漢字 破字)의 괴벽스러운 습속이(僻習-벽습이) 있었으랴.

 

이따위 파자(破字)가 여조(麗朝- 고려조, 고려시대) 중엽에 성행하여

황규(黃葵:노란 해바라기)가 황규(皇揆: 황제의 법, 황제의 신하)가 되고,

계명성(鷄鳴聲: 닭울음-꼬끼오)이 고귀위(高貴位: 높고 귀한 지위)가 되고,

무고지나(無古之那: 탈없이 편히 지냄)가 무고지난(無古之難:오래지속된 어려움이 없어짐)이 되고

신부삼연(身負三椽: 몸에 세개의 서까래를 지다)이 王(왕)자가 된다는 등등의 설(說)이

고려사에 보인 것이 허다한 바,

 

이 시대의 이 습관을 잘 아는 문사들이 고기(古記)를 수습하다가

말로 지은 명사를 한자의 뜻으로 풀어(의성어로 된 명사를 한문으로 엉터리 표기하여, 예: 꼬끼오를 고기위-高貴位로 표기)  

옛 사서(古史-고사)의 면목을 더럽히고 손상함이(汚損-오손함이) 적지 아니하니라.

 

이두문적 명사의 해석이 이와 같이 옛 사서(古史-고사) 연구에 유익하나, 그러나 반드시 독단을 피함이 옳으니,

 

예하면,

연개소문의 蘇文(소문)은 '신'으로 읽음이 옳으나

을지문덕의 文德(문덕)은 '묵'인지 '묻'인지 '무드'인지 알 수 없음은

전자(前者)는 삼국사기의 그 본주(本註)의“일명 개금(一名蓋金)”이 그 해석을 전하거니와,

후자(後者)는 그 해석을 잃어버린 까닭이라.

 

고자미동(古資彌凍)의 고자(古資)는 구지(뜻:半島-반도)로 읽음이 옳으나,

마리미동(彌難彌凍)의 마리(彌難)는 '밀'인지 '미리'인지 '머리'인지 알 수 없음은

전자(前者- 앞에 것)는 고자군(古自郡: 田城의 古號-전성의 옛 이름)의 지형과 역사의 연혁이 그 설명을 주거니와

후자(後者-뒤에 것)는 그 증거가 없나니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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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삼국사기 중 동서 양자의 상환 고증(三國史記中 東西 兩字相換 考證)

    :삼국사기 중 동서 두 글자가 서로 바뀐 것에 대한 고증

 

 

----- 차 례 -----

 

1. 동유낙랑(東有樂浪)의 시비

2. 삼국사기에 바뀐 동서 양자(東西 兩字)

3. 동서양자(東西兩字)의 바뀐 원인의 가정

4. 가정부터 실예(實例)

5. 양종사책(兩種史冊)의 부동(不同)

6. 김부식의 호도(糊塗)

 

 

 

1. 동유낙랑(東有樂浪)의 시비(是非)

   :동쪽에 낙랑이 있다(東有樂浪)의 옳고 그름

 

낙랑은 평양의 별명이요, 평양은 백제의 서북 이어늘,

이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를 보면

“나라 동쪽에 낙랑이 있다(國家東有樂浪)” 라는 1구가 있다.

그리하여 여태까지 역사가(史家-사가)의 논제(論題)가 되었다.

 

 

안순암(安順菴: 안정복)은

“낙랑이 비록 백제의 서북이지만 낙랑국(최씨)이 강성할 때

강원도 반쪽이(半幅-반폭이) 거의 낙랑의 속지(屬地)가 된 고로

백제가 강원도 부분의 낙랑을 가리켜 「동쪽에 있다.(東有-동유)」라고 하였다” 하고,

 

정다산(정약용)은

“오른쪽(右-우: 동쪽)의 낙랑은 춘천 낙랑이요 평양 낙랑이 아니니,

대개 춘천의 토착 추장(土酋-토추) 최씨가 우뚝 서서(굴기-堀起하여) 낙랑국이라 칭하고

매양(늘) 신라와 백제를 침범하므로 신라 백제 양국의 초엽에 보인 낙랑은

모두 춘천 낙랑이니, 춘천 낙랑인 고로 「동쪽에 있다.(東有-동유)」고 하였다” 하나,

 

낙랑의 본부가 평양인즉, 백제인이 낙랑을 거론할 때에 본부를 버리고

그 부분인 강원도 낙랑을 말할 리가 없으므로 나는 순암 선생의 말을 좇으려 아니한다.

 

춘천이 한(漢)의 낙랑 동부가 되었단 주장은 있으나 춘천을 낙랑이라 칭한 때는 없으며,

또는 삼국사기에 의거하면 신라와 백제의 초년에 모두 낙랑국의 침입으로 인하여

비상히 고생하다가(困苦-곤고하다가) 고구려 대무신왕 17년에 낙랑을 멸하고

20년에 낙랑을 다시 한(漢)에게 빼앗김으로부터 낙랑의 침입이

나제(羅•濟: 신라 백제) 양국 역사에 보이지 아니하였은즉,

 

그 각각의 글에 보인 낙랑들이 곧 1개의 낙랑임이 명백하여,

한(漢)이 낙랑을 취하여 살수 이남이 한에게 속하였다 한즉 그 낙랑들이 모두 지금 평양임이 명백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산 선생의 말도 좇으려 아니한다.

 

그러면 동유(東有:동쪽에 있다)의 두 글자를 어떻게 해석하려 하는가?

다음 절에 이를 해설하려 한다.

 

 

2. 삼국사기에 바뀐 동서 양자(東西 兩字)

 

삼국사기에 서(西)자가 동(東)자로 바뀐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온조왕 24년에 마한 왕이 온조를 질책하여 가로되

“왕이 처음 강을 건너왔을 때 발 디딜 곳이 없었는데 내가 동북 1백리 땅을 나누어 주어

왕이 안착 되었소.(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라 한 바,

 

백제가 마한의 서북인즉 마한이 떼어 준 백리 땅은,

온조가 초기에 자리잡고 살았던 미추성, 위례성 등도 서북이 됨이 명백하니

“동북일백리”는 “서북일백리”로 지음이 옳으며,

 

온조왕 37년에

“한수 동북 부락에 기근이 들어 고구려로 들어가는 자들이 일천여 호나 되어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비어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다.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 空無居人.)”이라 한 바,

패수는 대동강이요, 대수는 임진강이면, 한수 서북 됨이 확연한 즉,

한서 서북 부락이 도망하여야 패수와 대수 사이에 자리잡고 사는 사람이 없으리니,

“한수동북”은 “한수서북”으로 지음이 옳으며,

 

삼국사기 지리지에 “신성국 동북대진(新城國之東北大鎭).”이라 한 바,

신성(新城)은 고노자(高奴子)가 선비(鮮卑)를 막고 남건(男建)이 이적(李勣)을 막던

고구려의 서북 요새인 고로, 신당서에도 “신성 서쪽 변경 요새(新城賊之西邊要鄙.)”라 함이니

“동북대진”은 “서북대진”으로 지음이 옳다.

 

위에서 모든 동(東)자를 서(西)자로 지었음을 볼때

나는 동유낙랑(東有樂浪)도 서유낙랑(西有樂浪)으로 지음이 옳다한다.

 

 

3. 동서 양자(東西兩字)의 바뀐 원인의 가정

 

무슨 까닭으로 삼국사기 중에 서(西)자를 동(東)자로 바뀐 자가 이다지 많으냐.

만일 당시의 사람들이 해와 달이 출몰하는 동서의 방향까지 몰랐다 하면 삼국 문명이 모두 거짓말이 될 뿐이며,

 

혹은 당시의 베껴 쓴 사람이나 후세의 인쇄하는 사람이 틀린 것이라 하면

다른 문자는 그렇지 않은데 홀로 서(西)자만 쫓아다니면서 동(東)자로 틀릴 리가 없으며,

 

또는 西(서) 자의 자형과 비슷한 兩(양) 자나 雨(우) 자나 而(이) 자나 亞(아) 자 등으로 잘못 베껴 쓰지 않고

오직 글자 뜻이 반대되는 東(동) 자로 잘못 베껴 쓸 리도 없으며,

또는 반대되는 南(남) 자나 北(북) 자로 틀리지 않고

이제 공교히 3, 4 처에나 동일한 西(서)자로만 틀렸다 함도 성립하지 않는 설이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말에 “동방”을 “시”라 하고 “서방”을 “한”이라 하므로

삼국시대의 학자들이 한자를 취하여 이두자를 만들 때에 서(西) 자의 음 “시”를 취하여

“동(東)”쪽을 “시(西)”로 쓰고, 그 대신에 “西(서)”를 “東(동)”으로 써서

 

동서(東西) 양자가 바뀌었으며

 

사가가 사책을 지을 때에 그 바뀐 동서 양자(東西 兩字)를 그대로 썼으므로

옛 사서상에(고사상-古史上에) 바뀐 동서 양자(兩字)가 있다 라는 가정을 세웠다.

 

 

4. 가정부터 실예(實例)

 

그러다가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읽으니

“가슬라 일명 하서량(迦瑟羅一名河西良)”이라 하였다.

 

가슬(迦瑟)은 “가시”요, “가시”는 포구 동쪽의 뜻이니

고구려는 훈춘(琿春) 등지를 가시(迦瑟)라 하고,

신라 경덕왕 이후에는 지금 강릉을 가시(迦瑟)라 한 것이니,

 

그러면 고구려의 가시는 고구려 동북의 지명이요, 신라의 가시는 신라 동북의 지명인즉,

가시를 하동량(河東良)이라 하지 않고 하서량(河西良)이라 함은

東(동)의 뜻을 취하지 않고 西(서)의 뜻을 취함이니

이것이 이두자의 東(동) 자를 西(서) 자로 바꾸어 쓴 실예가 아니냐.

 

이로써 나의 제1 가정을 확증하였으며,

 

고구려에서 제천대회를 한맹(寒盟)이라 칭한 바

한맹의 일명이 동맹(東盟)이니, 한맹(寒盟)은 그 음이 한몽이 될지며,

한몽은 대회(大會)의 뜻이니, 함몽의 한을, 음으로 쓰면 寒盟(한맹)의 寒(한)이 되려니와

뜻으로 쓰면 서(西)가 될 터인데, 이제 서맹(西盟)이라 하지 않고 동맹(東盟)이라 함은

이두자의 서(西) 자를 동(東) 자로 바꾸어 쓴 실례가 아니냐.

 

이로써 나의 제 2가정을 확증하였다.

 

 

5. 두 종류 사책(兩種史冊-양종사책)의 서로 다름

 

그러면 옛 사서 상(고사상-古史上)에 동서 양자가 모두 바뀌지 않고

바뀐 동서 양자가 있는 이외에 바뀌지 아니한 동서 양자도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대개 삼국시대에 이두자로 쓴 사책(史冊)과 한자로 쓴 사책(史冊)이 있었으니,

 

가령 백제사에 왕근왕(王斤王–본기本紀에 삼근왕三斤王이라 함은 잘못 인쇄誤板-오판 한 것이다)

일명(一名: 다른 이름)을 임걸왕(壬乞王)이라 하니,

 

하나는 한자 사책(史冊)에서 전한 이름이면

다른 하나는 이두자 사책(史冊)에서 전한 이름이며,

 

삼국유사에 노례(弩禮; 누리 즉, 世-세)왕의 다른 이름이 유례왕(儒禮王)이라 하니,

 

하나는 한자 사책(史冊)에서 전한 이름이면,

다른 하나는 또 이두자 사책(史冊)에서 전한 이름이니,

 

기타 모든 관명 지명 등에 두 이름이 있는 것은

다 두 종류의 사책에 쓰인 이름을 다 같이 전한(竝傳-병전)한 것이며,

 

소문전(蘇文傳: 연개소문전)에 “그 아버지는 동부대인(其父東部大人)”이라 하고,

주(註)에 “혹은 서부대인 이라고도 한다(或云西部大人)”이라 하였으니,

본문과 주가 인용한 것이 이같이 다른 것은

 

양자 중의 하나가 한문 사책(史冊)에서 나온 동시에

다른 하나는 이두자 사책(史冊)에서 나온 것일지니,

 

동부 서부의 분별하지 못하게 됨이 더욱 옛 사서상에(古史上-고사상에)

동서 양자 바뀐 것이 있는 실증이다.

 

 

6. 김부식의 호도(糊塗: 얼버무림)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미 한문의 저작인즉 이두자가 쓰인 옛 말이나(古詞-고사이나)

방위 같은 것을 모두 개정치 아니함은 무슨 까닭인가?

 

김씨는 황당 조잡하고 맹랑한 사가(史家)라.

發岐(발기)와 拔奇(발기)는 한사람의 이름을 두가지로 번역한 것 이어늘,

김씨가 하나는 고구려사에 의거하며

다른 하나는 중국사에 의거하여 쓸 쌔, 잘못 구분하여 두 사람을 만들었으며,

 

살수는 삼국시대 가장 유명한 전장(戰場:전쟁터) 이어늘 김씨는 이를 알수 없는 지역에 넣었으며,

이밖에도 이러한 호도(糊塗: 얼버무림)가 하나 둘이 아니다.

 

김씨가 이두문에 무식하므로 모든 알기 쉬운 우리나라 말로 된 관명(官名)도

“오랑캐의 말 이어서 그 뜻을 알수 없다(夷言不知其意)”라고 자기 주를(自註-자주)하였으며,

 

게다가 이두문 배척에 격렬하여 신라시대에 남긴 시가(詩歌), 삼국유사에 적힌 시가(詩歌)를

삼국사기에는 한 짝도 쓰지 아니하였으니,

 

만일 김씨가 전술한 인명, 지명, 동서(東西) 등이 이두문의 것인 줄을 알았더라면

모두 배척하고 거두어 싣지 아니하였을 것이니 어찌 개정 여부가 있으랴.

 

그러면 삼국사기에 바뀐 동서(東西) 등 글자의 존재는 누가 거두어 실은 것이냐

 

고려 초의 문사, 혹 승려들이 각종의 고기(古記)를 한문으로 지을 때에

모든 이두자의 사책(史冊)을 번역해 내는 동안

 

그들이 뜻하지 않게(不經意-불경의 하는 가운데서) 우연히 빠뜨려

몇 개 바뀐 동서 양자가 남아 있음이 아닌가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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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 차 례 ------

 

1. 교정의 이유

 

2. 자구(字句)의 교정

1) 서문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는데...

2) 예전(濊傳)에 “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라 하였는데,

3) 한전(韓傳)의 “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이니

4) 변진전의 “차읍(借邑)”이니

5) 변진전의 미오야마(彌烏邪馬)니

6) 한전의 사로(駟盧), 막로(莫盧)와 변진전의 마연(馬延)이니,

 

3. 기사의 교정

1) 辰韓(진한)을 秦人(진인)의 자손이라 함이니

2) 동부여를 예(濊)로 오(誤)함이니,

3) 낙랑(樂浪)을 뺌이니

4) 발기(拔奇), 즉 신대왕(新大王)의 제2자의 차서를 오(誤)하여 장자(長子)라 하며,

 

4. 결론

 

 

 

1. 교정의 이유

조선사 연구의 제목을 가지고 무슨 까닭으로

중국 위진(魏晋)시대 사관(史官)이 지은 삼국지 동이열전 같은 것을 취하는가.

 

조선 옛 문헌이 너무 멸망하여 상고(上古)의 조선을 연구하자면

마치 바빌론고사를 연구하는 자가 헤로도투스의 희랍사를 참고하지 아니할 수 없음과 같이

중국 고사(古史)에 힘입은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쓰인 조선열전은

중국 망명자로 조선의 한 구석을 훔쳐 거처한

위씨(衛氏: 위만) 일가(一家)가 한(漢)과 대항하던 간략한 기록이니

조선열전 이라느니 보다 도리어 중국 떠돌이 도적의 침략사라 함이 옳으며,

 

남북사, 수서, 당서 등의 동이열전은 비교적 상세히 갖추어져 있으나

또한 각기 당시 중국에 관계된 일만 적었으니

이는 한족(漢族)의 대외 투쟁사(外競史-외경사)라 함이 옳거니와,

 

위진시대(魏晋: 위나라에서부터 진나라 시대)의 사관(史官)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단군왕검의 건국이 왕침(王沈)의 위서(魏書)에 보이며,

조선왕 부(否), 조선왕 준(準) 등의 간략한 역사가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에 보이며,

고대 열국(列國)의 국경 관제 풍속 등이 진수의 삼국지에 보이어,

중국과 관계되지 않은 옛 역사(古史-고사)까지도 간혹 기재하였다.

 

이는 고구려 동천왕 때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환도(丸都: 고구려 서울)에 처들어와 주워간 서적과 전설이 있어

이를 근거로 기록한 것이 있은 듯하니,

당시에는 비록 국치(國恥-국가의 치욕)이나 후세의 사적 재료는 이에서 더 진귀한 것이 없을 까닭이다.

 

위진(魏晉) 사관(史官)의 기록 가운데서 무슨 까닭으로 삼국지만 취하는가.

 

전술(前述)한 모든 사관의 기록에 왕침(王沈)의 위서(魏書)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

(往在二千載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의 수십자가 고려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에 전하였을 뿐이며,

 

어환의 위략(魏略)은 배송지(裵松之)의 삼국지 주(註)에 인용한 4, 5조가 전하였을 뿐이요,

그 두 책의 전부가 다 없어졌으므로 할수없이 삼국지만을 취하게 됨이며,

 

선배 유학자(先儒: 선유)는 늘 삼국지 동이열전을 버리고 후한서의 것을 취하였으나,

이는 다만 후한이 삼국의 앞시대인 줄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이 삼국지 저자 진수보다 백여년 이후의 사람임을 생각지 아니함일뿐더러,

 

양 동이열전을 대조하면 후한서의 것이 명백히 삼국지의 베껴 쓴 기록 이건만

이를 깨닫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후한서를 버리고 삼국지를 취함이다.

 

무슨 까닭으로 이를 취하는 동시에 교정을 가하는가.

 

천 년 이전에는 인쇄(印版:인판)가 없어 모든 서적이 모두 손으로 베껴 써서 전하므로

전도(顚倒: 거꾸로 뒤집힘), 와오(訛誤: 틀림), 탈락(脫落), 증첩(增疊)된 자구(字句: 글자와 어구)가 허다하여

중국의 경사(經史: 경서와 사서)가 모두 고증하는 사람의 손을 거친 뒤에야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조선열전 동이열전 같은 것은 저들이 고증(考證)에 힘을 쓰지 아니하였으며,

설혹 힘을 썼다 할지라도 자기들의 눈에 서투른 인명, 풍속, 사정 등을 잘 모르므로

그 교정한 것이 더 착오된 것이 있으니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하나요,

 

저들이 그 유전적 자존성으로 타국을 업신여겨 보고(藐視: 막시하여)

동(東)이라 칭한 것도 통분할 일이나(可痛-가통하나)

그러나 이는 사실에는 관계가 없거니와,

 

다만 고의로 속인 기록도(誣錄-무록한 것도) 있으며,

혹 전해들은 것으로 인하여

틀리게 기록한 것도 있어 교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이 두 번째이니,

 

그러므로 저자의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이 있게 된 것이다.

 

 

2. 자구(字句)의 교정

이제 전도(거꾸로 뒤집힘), 와오(와전과 오류), 탈락, 증첩된 자구(字句)를 교정하리라.

 

1) 서문에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는데...

   :서문에 “지극히 먼 지방까지 추격하니, 오환(烏丸)과 골도(骨都)를 넘었다.”라 하였는데

 

오환골도(烏丸骨都)는 오골환도(烏骨丸都)의 잘못이다.

 

오골과 환도는 다 성 이름이나,

오골성은 지금의 연산관(連山關) 일명 아골관(鴉骨關)이요,

환도성은 지금의 집안현 동선령(輯安縣洞仙嶺)이니,

 

오골과 환도의 위치 연혁은 조선사를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바이므로 이제 번거롭게 기록하지 아니하거니와,

 

관구검의 환도성 침입은 본 열전에 상세하게 기록한 바,

오골은 곧 관구검이 유주(幽州)로부터 환도성에 침입하는 경로인즉

 

“오환 골도를 넘었다(踰烏丸骨都)”가

곧“오골 환도를 넘었다(踰烏骨丸都)”의 잘못임이 명백하지 아니하냐.

 

대개 윗글에 오환전(烏丸傳)이 있음으로 인하여

베껴 쓴 사람이 오골의 골과 환도의 환을 바꾸어 오환골도(烏丸骨都)라 쓴 것이다.

 

 

2) 예전(濊傳)에 “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라 하였는데,

   :예전(濊傳)에 “염치가 있어 고구려에게 청하지 않았다. 언어, 법, 풍속이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有廉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이라 하였는데,

 

위의 문자(文字)는 문리(文理)가 닿지 아니하므로 중국학자들까지도 이를 의심하여

모두 그 오자가 있음을 인정하고 동시에 건륭의 흠정삼국지 위지 권 20 고증에는

 

有廉恥不請(유염치불청: 염치가 있어 청하지 아니하였다)의 請(청: 구걸하다)을 諳(암: 외우다, 알다)의

오자(誤字)라 하고 이를 아랫 글에 붙여 읽어

“고구려 언어를 알지 못하였다(不諳句麗言語-불청구려언어)”라 하였으나

 

윗글에 “예는 고구려와 동종이다(濊與句麗同種)” 라고 하였는데,

본 열전에서 이른바 동종(同種)이란 동일 언어(同言語-동 언어)의 인민을 가리킴인 즉

請(청)을 諳(암)으로 고쳐 “고구려 언어를 알지 못하였다(不諳句麗言語-불청구려언어)"라 읽음이

위 아래의 글의 뜻을(文意-문의를) 모순케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는 곧 동부여의 오류(誤-오)이니 (次節-차절: 다음절의 기사교정 참조)

동부여가 구려의 언어를 몰랐다 하면 갑의 사촌형제 을이 갑의 언어를 모른다 함과 같으니,

흠정삼국지의 운운은 다만 억측 단정이(臆斷-억단이) 될 뿐이다.

 

후한서 예전(濊傳)에

“자신들이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同 其人性愿慤少嗜欲不請匄)”에 의거하여 보면,

 

不請句麗言語(불청구려언어)의 請(청)은 틀린 글자(誤字-오자)가 아니요

句(구)가 匄(개: 빌다)의 오자(誤字)이며

麗(려)는 아래 글의 句麗(구려)의 麗(려)로 말미암아 잘못 덧붙여진 글자이니,

 

이를 개정하면 有廉恥不請匄 言語法俗與句麗同(유염치불청개 언어법속여구려동)이니

“염치가 있어 남에게 청하지-구걸하지 않는다(有廉恥不請匄)”가 1구요

“언어, 법,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言語法俗與句麗同)”가 1구이다.

 

 

3) 한전(韓傳)의 “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이니

   :한전(韓傳)의 “신지 혹은 높여서 신운견지라고 부른다(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이니,

 

삼한이나 부여가 각부 대신을 “크치”라 칭한 바,

크치를 음으로 써서 “遣支(견지)”, “遣智(견지)” 혹은 “近支(근지)”가 되고

뜻으로 써서 大兄(대형) 혹 大等(대등)이 되고,

 

각 대신의 수장(首長) 총리대신을 “신크치”라 칭한바,

 

신크치를 음으로 써서 신견지(臣遣支), 혹 신근지(臣近智)가 되고,

뜻으로 써서 태대형(太大兄), 혹 상대등(上大等)이 된다 함은 이미 졸저 이두문 명사 해석에 설명하였거니와,

 

위에 쓴 신운견지(臣雲遣支)의 운(雲)은 곧 아랫 글의 신운신국(臣雲新國)의 운(雲)으로 말미암아

잘못 덧붙여진 글자이니,

 

이를 개정하면 '신지 혹은 높여서 신견지 라고 부른다(臣智惑加優呼臣遣支 - 신지 혹 가우호 신견지)'라 할지니,

 

신크치의 약칭이 신치가 되어 당시의 습관어가 되고

신크치 라고 다 갖추어 부름이 희소하므로

 

“신견지를 혹 줄여서 신지라고 부른다(臣遣支惑略呼臣智 - 신견지 혹 감약호 신지)”라고 쓰지 않고 도리어

 

“신지를 혹은 높여서 신견지라 부른다(臣智惑加優呼臣遣支 - 신지 혹 가우호 신견지)”라고 씀이다.

 

 

4) 변진전의 “차읍(借邑)”이니

한전(韓傳)에는 읍차(邑借)란 관명이 있고 변진전에는 차읍(借邑)이란 관명이 있는 바

양자 중 하나는 반드시 거꾸로 베껴 쓴 것 일지니 어느 것이 거꾸로 베껴 쓴 것인가.

 

돈(頓)씨의 가보(家譜-집안의 족보)에 의거하면

돈씨는 을지문덕의 자손이니 을지는 관명이요 성이 아니라 하며,

 

일본인 백조고길(白鳥庫吉)은 퉁구스족의 말에 使者(사자)를 “일치”로 칭한 바,

읍차는 그 음이 일치와 비슷하니 또한 사자의 뜻이 될지며,

 

고구려의 관명에 울절(鬱折)도 또한 ”일치”인 듯하니

변진전의 차읍(借邑)은 곧 읍차(邑借)의 거꾸로 기재한(倒載-도재일) 것이다.

 

 

5) 변진전의 미오야마(彌烏邪馬)니

邪(야) 耶(야) 牙(아) 등의 글자가 모두 “라”의 음이 됨은

이미 고사상(古史上) 이두문 명사 해석에 설명하였거니와

 

해동역사 지리에 의거하면

지금(현금) 고령(高靈)이 곧 변진의 미나나(彌摩那)인즉

본전의 야마(邪馬)는 마야(馬邪)의 거꾸로 베껴 쓴 것이다.

 

 

6) 한전의 사로(駟盧), 막로(莫盧)와 변진전의 마연(馬延)이니,

위의 세나라는 중첩하여 베껴 쓴 것이므로 해동역사의 삭제가 옳은 것이다.

 

 

3. 기사의 교정

앞절에 진술한 바는 본 열전(列傳: 삼국지 동이열전)의 베껴쓰는 시대의

베껴 쓴 자들이 잘못 쓴 자구(字句)를 교정한 것 이어니와,

 

이제 본절(本節)에는 당초 그 본문의 잘못된 기사를 교정하려 함이다.

 

위진(魏晋) 사관(史官)이 관구검이 가져간 고구려의 서적이 있어 참고하였다 해도

기사의 다름과 틀림이(違誤-위오가) 많음은

 

마치 원명청 사관들이 원사나 명사나 일통지(청나라, 1902년-광서 28년에 간행된 지리책)

가운데서 고려의 사책이나 이조의 여지승람의 본문을 등록하자면

매양(늘) 엉터리로 고침과 거짓 증명이 있는 것과 같은 종류라(類-유라) 할 것이다.

 

 

이제 이를 간략하게 들어보면,

 

1) 辰韓(진한)을 秦人(진인-진시황의 진나라 사람)의 자손이라 함이니

 

사마천의 사기에 흉노를 하우씨의 자손이라 하며, 한시외전에 고죽국을 탕(湯)의 봉국(封國)이라 하며,

어환의 위략에 대진(大秦–로마)인을 중국인의 자손이라 하여 저들 나라 사가들이 매양(늘)

그 자존심의 편벽한 견해로 허다한 웃음거리(笑話-소화)를 끼쳤지만,

 

본 열전에도 그 못된 버릇이(謬習-유습이) 있어

辰韓(진한)의 일명은 秦韓(진한)이라 하고,

秦韓(진한)의 秦(진)에 억지로 갖다 붙여(傅會-부회하여)

辰韓(진한)은 秦人(진인-진시황의 진나라 사람)이 동쪽으로 달아난 자(者)라 하며

 

이를 위증(僞證-거짓 증명)하기 위하여

진마(辰馬:진한 마한) 양 한(韓)이 동일한 “나(羅), 나(那), 부사(不斯)” 등의 지명과

동일한 신지, 읍차 등의 관명(官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한은 ...언어가 마한과 같지 않다(辰韓…言語不與馬韓同)”의 억측 단정을(臆斷-억단을) 내리며,

애매모호한

 

“나라를 ‘방’이라 한다(國爲邦)”느니,

“도적을 ‘구’라 한다(賊爲寇)”느니,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이라 한다(行酒爲行觴)”느니,

“서로를 부를때 ‘도’라 한다(相呼爲徒)”는 등의 모함하여 헐뜯는 말을(讕句-난구를) 덧붙여

 

“언어가...진나라 사람과 유사하다(言語…有似秦人)”의 불충분한 증거를 발표하여

조선의 민족계보를(族系-족계를) 어지럽히려 하였으며,

 

 

2) 동부여를 예(濊)로 오인(誤認:잘못 인식)함이니,

 

중국인이 조선 일을 적을 때에 너무 무책임하게 적어, 공자의 춘추에 조선을 산융과 섞으며,

 

사마천의 사기에 진번조선의 연나라와의 전쟁을 흉노전의 동호 산융 혹 예맥 등의 사실에 넣어

만일 관자나 위략이 아니면 그 오류를 발견할 수 없이 되었거니와,

본지에도 또한 동부여를 예(濊)로 오인(誤認)한 잘못이 있다.

 

예맥은 곧 “려신”이니

“려신”을 혹 “려”의 한자로 번역하여

이지(離枝), 영지(令支), 예(濊), 예(穢), 예(薉) 등이 되며,

 

혹 “려신”을 두 자로 나란히 번역하여

여진(女眞), 야인(野人) 등이 되며,

 

혹 “려신”의 아리강으로 그를 이름하여

읍루(挹婁), 압로(鴨盧) 등이 되며,

 

혹 “려신”의 별부(別部)“물가”로, 전체를 총칭하여

물길(勿吉), 말갈(靺鞨) 등이 된 자(者)라 할 것이다.

 

여태까지 학자들이 조선의 삼국시대 초기인 중국의 한나라 말기에

읍루란 이름만 있은 줄 알지만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 본기에

“왕이 마한, 예맥 일만여 기병을 거느리고(王率馬韓濊貊一萬餘騎)”라 하여

읍루를 예맥으로 여전히 썼으며

 

조선의 삼국 말인 중국의 당나라 초기에 말갈(靺鞨)이란 이름만 있는 줄 알지만

김유신전에 “당고종이 고구려와 예맥이 짜고 몹쓸 짓을 한다고 말하였다

(唐高宗高句麗與濊貊向惡)”이라 하여 말갈을 예맥으로 여전히 불렀으니

 

“려신”의 명칭과 연혁이 대개 이러한 것이어늘,

본지(삼국지)에 읍루가 예(濊)의 별명임을 모르고

읍루전을 설림한 이외에 따로 예전(濊傳)을 설립함이 하나의 잘못이요,

 

동북 양 부여 가운데에 북부여는 그저 부여라 칭하는 동시에

동부여를 예(濊)로 인식함이(認-인함이) 두 번째 잘못이니라.

 

그러나 읍루전에

“읍루(挹婁)는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挹婁在扶餘東北千餘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言語不與扶餘句麗同)...

 

동이(東夷)들은 음식을 먹을 적에 대부분 조두(俎豆:나무로 만든 그릇)를 사용했으나,

오직 읍루(挹婁)만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법도나 풍속이 [동이(東夷) 가운데에서]

가장 기강이 없었다.(東夷飮食類皆用俎豆唯邑婁不法俗最無綱紀)” 라 하니

 

“부여 동북 천여리(扶餘東北千餘里)”가 송화 흑룡 연안의 려신국이 아니냐.

 

“언어가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言語不與扶餘句麗同)”가

후한서 읍루전과 북사 물길전의

“동이 중에서 언어가 홀로 다르다(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한 려신족이 아니냐.

 

“오직 읍루(挹婁)만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법도나 풍속이 [동이(東夷) 가운데에서]

가장 기강이 없었다(唯邑婁不法俗最無綱紀)“가 조선 열국 중 가장 미개한 려신이 아니냐.

 

그 위치 언어 풍속의 설명이 곧 려신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예전(濊傳)에는

“예(濊)는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북쪽으로는 고구려(高句麗)·옥저(沃沮)와 접하였고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

“언어, 법, 풍속이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이라 하였으니,

 

남으로 진한을 접하고 북으로 고구려와 옥저를 접한 자가 동부여가 아니냐.

 

언어는 당시 조선 여러나라이 려신 부락 이외에 모두 동일한 언어 이었지만,

법속이 부여 고구려 양국과 서로 같은 것이 동부여가 아니냐.

 

이는 그 위치 언어 풍속으로 말미암아 동부여를 예(濊)로 오인함이 명백하거늘

후세 학자들이 삼국지의 잘못을 발견치 못하여 조선사상 또는 동양사상

종족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지 못하여(劃淸-획청하지 못하여) 허다한 분규를 만들어 냈다

 

당(唐)나라 가탐(賈耽)의 “신라 북쪽 경계 명주는 옛 예의 땅이다.

이전 사서에서 부여를 예의 땅으로 생각한 것은 대체로 잘못이다(新羅北界溟州古濊地前史以扶餘爲濊地者蓋誤)”는

다만 북부여가 예(濊)가 아님을 발견할 뿐이요 동부여가 예(濊)가 아님은 여전히 발견치 못함이다.

 

혹 말하기를(或曰-혹왈) “려신이 수초(水草)를 쫒아 옮기는 야만족인(蠻族-만족인) 고로

삼국사에 나제려(羅濟麗: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중간에 잡거(雜居)한 말갈려신도 있으며,

 

고려사에 두만과 압록 등지에 침입하여 살았던 여진(女眞)려신도 있었은즉,

본지의 예(濊)도 이와 같이 일시 동부여 역내에 침입한 려신됨이 옳다”하나

 

설혹 그렇다 할지라도 주(主)인 동부여를 입전(立傳: 열전을 만듦)하지 않고

객(客)인 예(濊)를 입전(立傳: 열전을 만듦)함은 본지(삼국지)의 잘못이다.

 

 

3) 낙랑(樂浪)을 뺌이니,

 

낙랑은 조선사상 가장 장황하고 어지럽고 소란한 큰 문제다.

그 상세한 논의는 다른 날로 미루거니와, 이제 간략히 설명하건대

 

낙랑은 평양이요 평양은 펴라의 번역이니,

한무제(漢武帝)가 위만을 멸하고 낙랑을 주, 군(州郡)의 제일로 정하니,

그 위치가 지금 해성(海城:요동) 등지요,

 

최씨란 자(者)가 대동강 연안에서 우뚝 서 낙랑국이라 칭하다가

마지막 왕 최리가 고구려에게 망하니 이는 곧 대무신왕 20년이요,

 

그 뒤에 낙랑속국이 고구려에게 불복하여 한나라 군대를 영입하여

고구려에게 반항하니 이는 대무신왕 말년이라.

 

나제(羅濟: 신라 백제) 양국이 처음에 낙랑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안정한 날이 없다가

대무신왕 이후부터 그 침략이 끊어짐은 최씨 왕국이 멸망한 까닭이라.

 

한 광무 이후의 낙랑이 비록 한(漢)에 굴복하였으나

그 인민의 자치와 각 소국의 주권은 여전히 조선인이 주관하였으니,

소위 낙랑태수는 요동에 임시로 머물러 산 자(者)요,

 

태조대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까지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당 가탐(賈耽)의 사이술 자서(四夷述自序)에

“요동낙랑은 한 건안 때(서기 196~219)에 함락되었다(遼東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고 함이요,

 

동천왕 때에 이르러 대동강의 낙랑은 고구려에 여전히 속하였으므로

동천왕이 환도(丸都)를 관구검의 유린에 버리고종묘 사직과 인민을 평양에 옮겼으나,

 

요동의 낙랑은 위나라(魏)에 빼앗겼으므로

관구검이 군사를 되돌릴 때에 낙랑을 따라 나감이요,

 

미천왕 때에는 요동의 낙랑이나 대동강의 낙랑이 다 고구려에 들어 왔으므로

연나라 모용외가 영평부(永平部)의 유성(柳城)에 낙랑을 옮겨 세웠음이며,

 

광개토왕 장수왕 이후에는 유성(柳城)의 낙랑이 고구려의 침입 핌박을 당하다가

백제의 병(兵)이 바다를 건너 쳐서 점거하여

위제(魏帝: 拓跋氏 -척발씨)가 상곡(上谷: 지금 大同府-대동부)내에 낙랑을 옮겨 세웠음이니,

 

이상은 사책(史冊)에 증명된 것이다.

 

요동낙랑은 비록 조선의 소유된 때가 있으나

그 인민과 지리가 당시 중국사의 범위에 들었던 것이며,

 

대동강의 낙랑은 비록 한족(漢族)의 정복을 당한 적이 있으나

항상 조선에 속한 것 이어늘

 

삼국지가 한서 지리지의 남겨진 규칙을(遺規-유규를) 답습하여 낙랑을 조선열전 중에 빼었으므로

그 지리가 빠진 한(缺憾-결감)은 고사하고

 

첫번째는 고구려와 낙랑의 언어 풍속 등 같고 다름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두번째는 낙랑과 삼한의 언어 풍속 등 같고 다름의 관계를 말하지 아니하며,

세번째는 따라서 고구려 부여 등 북방제국과 삼한 등 남방 제국과의 연락이 단절하여

         본지(삼국지) 동이열전의 비상한 결점이 되었다.

 

 

4) 발기(拔奇), 즉 신대왕(新大王)의 제2자의 차서를 오(誤)하여 장자(長子)라 하며,

   :발기(拔奇), 즉 신대왕(新大王)의 둘째 아들의 차례를 잘못 알아 큰아들이라 하며,

 

공손강에게 병사를 빌린 사실에도 약간의 오류가 있으며

고구려왕을 고구려후(高句麗侯)라 하여 고구려사에 보이지 아니한 고구려후의 騶(추)란 이름이 있으며

왕망(王莽)이 고구려후 騶(추)를 머리 베었다 하며…

 

기타 모든 착오가 있으나 이는 사학상(史學上)에 그리 큰 문제 될 것이 아니라

쓸데없이 너저분하게 논의하지 아니한다.

 

 

4. 결론

역사를 연구하려면 사적 재료의 수집도 필요하거니와 그 재료에 대한 선택이 더욱 필요한지라.

고물이 산같이 쌓였을지라도 고물에 대한 학식이 없으면 일본의 관영통보(寛永通寶)가 기자(箕子)의 유물도 되며,

 

십만책의 장서루(藏書婁) 속에서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지라도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세 사람의 위조인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스러운 말이 되는 것이다.

 

여태까지 조선 사기(史家)들의 소위 사학은 매양(늘) 박학(博學: 넓은 학식)으로써

유일의 조건을 삼으며 그 소위 박학은 오직 서적뿐이요 그 소위 서적은 중국서적뿐이었다.

 

김부식은 조선 옛 사서(古史: 옛 사서)가 없어지고 망가진 까닭에

호랑이 없는 굴속의 살쾡이(弧狸-호리)와 같이 조선 사가(史家)들의 비조(鼻祖: 시조)가 되었지만,

 

저 사람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송나라 사람(宋人)의 책부원구 일천권을 사다가

자기의 참고에 제공하고는 내각(內閣)에 깊숙이 감추어 두어 타인의 열람을 불허하여

자가가 유일한 박학자(博學子:지식이 넓은 학자)의 명예를 가지는 동시에

삼국사기가 명예와 같이 국내 유일의 역사됨을 희망하였다.

 

저 사람의 악렬한 수단이 참으로 극악할 만할뿐더러 그 사학적 두뇌가 비상히 결핍하여,

즉 근세의 발달된 역사에 비하여 손색이 있을 뿐 아니라 동양 고대의 인물 중심주의의 역사의 저울로 달아볼지라도

삼국사기는 몇푼어치가 못되는 역사다.

 

삼국유사, 점필재집 등에 여기저기 보이는

천년 사상계의 지배자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부례랑(夫禮郞) 등 위인을 쓰지 아니하며,

 

문무왕 본기, 당서, 일본서기 등에 남겨 전해지는

백제 말일의 유일한 영물인 부여복신(夫餘福信)의 열전을 짓지 아니하며,

 

무공이 가장 많은 동성왕 시대를 미약(微弱)으로 잘못된 증언(誤證-오증)을 하며,

기이한 공을 세운 양만춘을 누락하며,

 

민족 계통(族系-족계)을 말하려면

왕검씨(단군왕검)의 정통인 부여를 말하여야 하는데 이를 삭제해서 버리며,

 

지리지를 기록하려면 고구려의 후계인 발해를 기록해야 하는데 이를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삼국사기는 문화사로나 정치사로나 가치가 심히 적다.

 

저 사람(김부식)이 중국서적에서 얻은 박학(博學: 넓은 학식)도 너무 창피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연과 제의 망명자들을 모아 그들의 왕이 되고 왕검에 도읍하였다

(聚燕齊亡命王之都王儉)”를 인용할 때에는 王之(왕지)를 아래 문장에 붙여

“王之都王儉(왕지도왕검: 왕의 왕검에 도읍하였다)”이라하여 그 귀절을 옳게 떼지 못하였으며,

 

송서(宋書) 고구려전의 “련(장수왕)이 홍(풍홍:북연 왕)을 남쪽으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璉不欲使弘南來)”를 옮겨 기록할 때 련(璉)을 왕으로 고치면서 래(來)는 그대로 두어 장수왕이 평양에 있지 않고

절강(浙江: 중국 절강성)에 앉아 하는 말이 되었으며,

 

수서(隋書)의 “고구려가 오만하여 공경하지 않음으로 황제는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다

(高麗傲慢不恭帝將討之)”는 “우리가 오만하여 공경하지 않음으로 황제는 장차 우리를 치려고 하였다

(我傲慢不恭帝將討之)”라 고쳐 써 허리부러질 아(我)란 주인을 찾았으며,

 

책부원구의 “성은 모름(모) 이름은 진이다(姓募名秦)”을 베껴 써

신라 박, 석, 김 3성 이외에 턱없는 의문의 모씨 제왕(募氏帝王: 성이 모씨)을 만들어 내게(人事-인사하게) 되고,

 

이밖에도 이 같은 장님이 밤길 가듯한 기사가 많으니 선택없는 박학은 박학이 아닌 자의 바른 선택만 못하다.

 

최근의 구암(한백겸), 순암(안정복) 등 여러 선배 유학자는 탄복할 만한

정밀하고, 상세하고, 신중하고, 엄밀함을 가져 김씨의 착오를 발견한 것이 적지 아니하나,

 

다만 중국 서적에 대한 신뢰가 너무 과하여

 

지리(地理)를 논(論)하면서 진실과 허위가 마구 뒤섞인수경(水經)을 그대로 인용하며,

연대를 표하려면 속석(束晳: 죽서기년의 학자) 이후에 위작(僞作)한 죽서기년을 그대로 존중하여 믿고

 

저들의 소위 경사(經史: 경서와 사서)는 글자 한자 한자 모두 절대적인 진리(字字金玉-자자금옥)로 보아

그 거짓 기록(僞證: 위증)과 틀린 기록(誤證-오증)을 발견하려는 생각이 없었다.

 

저자가 시기를 얻으면 중국 서적 중 일체 조선에 관한 기록의 옳고 그름, 틀림과 바름(是非誤正: 시비오정)을

찾아보려 하거니와,

 

근래, 역사를 저술하는 사람들이 매양(늘) 각종의

진서(眞書: 진실을 쓴 책), 위서(僞書: 거짓을 쓴 책),

와언(訛言: 그릇된 말, 와전된 말), 정언(正言: 바른 말)을 모두 조선사의 재료로 삼아

 

서양 문장의 형식으로 편(篇), 장(章)을 갈라

신사학자(新史學者)가 지은 조선사라고 함은 좀 부끄러운 일인가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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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평양 패수고(平壤浿水考)

 

 

--- 차 례 ---

1. 서언(序言)

2. 제1의 착오

3. 제2의 착오

4. 제3의 착오

5. 제4의 착오

6. 결론

 

 

 

1. 서언(序言)

평양은 신지비사(神誌秘詞: 고려사 김위제전-金謂磾傳에 보임)

가운데 아주 먼 옛날의 세 서울(三京-3경)의 하나인 백아강(百牙岡)이요,

조선 문명이 발생한 7대 강의 하나인 패수(浿水) 가의 서울이다.

 

그러나 시대를 따라 지명이 옮겨졌으므로

만일 지금의 패수 즉, 대동강을 옛날 패수로 알고,

 

지금 평양 즉, 평안남도 수부(首府)를 옛 평양으로 알면

평양의 역사를 그릇 앎일 뿐 아니라 곧 조선의 역사를 그릇 앎이니,

그러므로 조선사를 말하려면 평양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환도(丸都)가 어디냐. 졸본이 어디냐. 안시성이 어디냐.

가슬라가 어디냐. 백제의 6방(方)이 어디냐. 발해의 5경이 어디냐.

이 모든 지리가 조선 역사상 수백년동안 미해결 되어 다투어 온 사안이다.

 

그러나 그 가장 중요하고도 유명한 다툼거리는 평양의 위치가 어디냐의 문제이다.

왜 그러냐 하면, 평양 위치의 문제만 결정되면 다른 지리를 알기 용이한 까닭이다.

 

평양의 위치가 시대를 따라 다르니

첫번째는 삼조선 시대의 평양이요,

두번째는 삼국시대와, 동북국(통일 신라와 발해)시대, 양 시대의 평양이요,

세번째는 고려 이후의 평양이다.

 

고려 이후의 평양은 지금 평양이니

지금의 평양은 오직 수백년동안 평양을 서울로 정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쟁론이

대강 변론할 거리가 되는 이외에 그 위치에 대하여는 문제가 없거니와,

 

삼조선의 평양인 고평양(古平壤)은

비상한 노력을 들이지 아니하면 도저히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어려운 문제요,

 

삼국시대와 동북국(통일신라와 발해) 시대의 평양은

혹 고평양(古平壤)을 가리킨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고,

혹 지금 평양을 가리켜 평양이라 한 기록도 있는 평양이므로 다음 어려운 문제이다.

 

본편은 곧 고조선의 평양인 고평양(古平壤)의 위치를 변별 증명하려 하는 바이다.

 

근세 우리 조선의 선배 유학자들이나 최근 일본 학자들이

경기 황해 평안 3도와 요동반도의 명산대천을 골마다 더듬어 고평양(古平壤)의 위치를 찾음에 비상히 노력하였지만

그 노력의 대가가 없고 평양이 어디라는 답안이 바로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찾는 방법이 착오된 까닭이다.

 

저자가 재력(才力)의 천박함을 불구하고 착오을 정정하여

여러백년 이래 잃어버린 평양을 제자리로 돌리려 하여 본편의 글을 쓴다.

 

대개 그들의 착오가 어디에 있는가

 

2. 제1의 착오

제1의 착오는 평양, 패수의

음의 뜻을 해독하지 못함이다.

 

사책(史冊)에 보면 평양(平壤), 평양(平穰), 평나(平那), 변나(卞那), 백아(百牙),

낙랑(樂浪), 낙랑(樂良), 패수(浿水), 패강(浿江), 패하(浿河) 등은

 

다만 “펴라”를 각종의 가음(假音: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 말을 표기한 글자)으로 쓴 것이니,

 

평양(平壤), 평양(平穰), 평나(平那), 변나(卞那), 백아(百牙)는

다 그 음의 첫소리(초성,初聲)을 읽어 “펴라”가 되고,

 

낙랑(樂浪), 낙랑(樂良)은 낙(樂)의 뜻 “풍류”의 첫소리(초성,初聲)을 읽으며,

랑(浪)과 랑(良은) 그 음(音) “랑”의 첫소리(초성-初聲) 가운데 소리(중성,中聲)를 읽어 “펴라”가 되고,

 

패수(浿水), 패강(浿江), 패하(浿河)는 浿의 음 “패”의 첫 소리(초성,初聲)을 읽으며

수(水) 강(江) 하(河)의 뜻 “라”의 모든소리를(全聲-전성을) 읽어 “펴라”가 된 것이니,

 

이상 운운(云云)은 졸저 이두문 해석에 설명한지라. 여기에서는 상술하지 않는다.

 

“펴라”는 본래 강의 이름으로

그 강상(江上)에 건설한 도성(都城)도 “펴라”라 이름 한 것이니,

 

졸본하(卒本河) 상(上)에 졸본국(卒本國)이 있고,

사비강(泗沘江) 상(上)에 사비국이 있는 것과 같은 종류니,

 

평양(平壤), 평양(平穰), 평나(平那), 변나(卞那), 백아(百牙), 낙랑(樂浪), 패수(浿水) 등이

비록 그 문자는 서로 다르나 그 “펴라”의 가음(假音: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 말을 표기한 글자)됨은 동일하며,

 

비록 그 펴라의 가음(假音)됨은 동일하나

다만 패수 패하 등은 ‘강’의 펴라를 가리키는 글자임에 반하여

 

平壤, 平穰, 平那, 卞那, 百牙, 樂浪 등은 ‘성(城)’의 펴라를 가리키는 글자됨이 다르며,

 

성(城)의 펴라와 강(江)의 펴라가 비록 하나는 물이고 하나는 땅으로 서로 다르나,

양 펴라의 거리가 마치 눈과 눈썹같이 매우 가까운 것 이어늘

 

후세에 이두문(吏讀文)을 모르는 학자들이 이를 한자의 음으로 그대로 읽어

平壤은 평양, 平那는 평나, 百牙는 백아, 樂浪은 낙랑 혹 락랑, 浿水는 패수가 되어

수륙 양 펴라의 밀접한 관계가 알 수 없이 된지라,

 

이에 다만 조선의 고기(古記)나 중국의 사기, 한서 등의 왕검성 평양(王儉城平壤)이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추상적 문자에 의하여 패수와 평양의 위치를 찾으니,

 

혹은 요하를 패수로 잡는 동시에 봉황성(鳳凰城)을 평양이라 하며,

혹 압록강을 패수로 잡는 동시에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며,

혹 대동강을 패수로 잡는 동시에 지금의 서울(한양,漢陽)을 평양이라 하며,

또 혹 평양이란 짝(배필-配匹)이 없는 예성강(禮成江), 벽란도(碧瀾渡) 등의 홀아비의 패수도 생기며,

혹 패수란 동무가 없는 춘천, 성천(成川)의 외아들의 평양도 생기어

 

삼국사기 삼국유사 여지승람 열하일기 동사강목 해동역사 아방강역고 등의 이에 대한 쟁론이 분분하였지만,

사실은 모두 맹인이 활을 쏨과 같아 과녁을 맞추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평양과 패수를 찾으려면

 

제1에 그 음의 뜻을 해독하여 패수를 떠나서 평양이 없고

평양을 떠나서 패수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3. 제2의 착오

 

제2의 착오는 평양과 패수와 관련된 고전(古典)

즉, 그와 관련된 사서(史書)의 본문을 잘 이해하지 못함이다.

 

이를테면 위략에

“조선이...후에 자손들이 점차 교만해지고 사나워지자 연(燕)이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 서방을 공격하여 2천 여리의 땅을 취하고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으므로 조선이 마침내 쇠약해졌다....

한(漢)이 노관을 연왕(燕王)으로 삼았을 때 조선과 연은 취(해동역사에 패로 개정)수를 경계로 삼았다.

(朝鮮…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 …

及漢以盧綰爲燕王朝鮮與燕界於溴- 해동역사에 浿로 개정- 水)”라 하고

 

사기 조선열전에

“처음 연(燕)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조선(眞番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 외요(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위만은...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왕검(王險)에 도읍을 정하였다.(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 漢興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爲界 … 都王儉)"라 하고

 

사기 흉노전에

“ 연의 장수 진개가 동호(胡)에 인질로 가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그를 매우 신임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 동호를 불시에 쳐서 깨뜨려 물리치자 동호는 1천여리 물러갔다....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부터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했다.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人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 燕亦築長城自造陽

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遼西 遼東郡)” 이라 한 바,

 

위의 세개의 책은 다 동일한 사실의 기록이다.

 

선배 유학자들이 혹 위략에 의거하여 흉노전의 1천 여리를 2천 여리의 오류라고 하고,

이에 의하여 패수를 대동강이라 하여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며,

 

혹 흉노전에 근거하여 위략의 2천 여리를 1천 여리의 오류라 하고,

이에 의하여 패수를 압록강이라 하여 만반한을 압록강 이남에 구하였다.

 

그러나 우견(愚見)으로 말하건대 위략의 2천 여리나, 흉노전의 1천 여리가

어떤 곳으로 부터 기산(起算) 할 것인지를 묻지 않고

종점인 만반한을 찾는 것은 비상한 착오라 하노라.

 

흉노전으로 보면 진개가 저들이 말하는 소위 동호 즉, 조선을 물리치고

조양(造陽)으로부터 양평까지 장성을 쌓고

상곡(上谷: 지금 대동부,大同府),

어양(漁陽: 지금 북경 북 60여리의 폐현,廢縣),

우북평(右北平: 지금의 영평부,永平部),

요서(遼西: 지금의 노룡현,盧龍縣),

요동(遼東: 지금의 요양,遼陽)까지의 연장 2천 여리의 지방

곧 조선의 소유를 진개가 약탈하여 빼앗음이니,

 

2천 여리는 곧 상곡(上谷)부터 기산(起算)하여 요양까지 이른 것이요,

 

만반한(滿潘汗)은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의 문현(汶縣)과 반한현(潘汗縣)의 양 현이니,

문반한(문현과 반한현)의 연혁이 비록 전하지 아니하였으나

 

위략에는 만반한(滿潘汗)이라고 하고, 흉노전에는 양평이라 한 바,

양평은 한(漢) 요동군의 군치(郡治: 지금 요양,遼陽)인 즉,

문반한((汶潘汗)은 곧 요양(遼陽) 부근의 땅이며,

 

연(燕)은 조선과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정하였다가 한(漢)은 물러나

패수를 지켰은즉, 패수는 곧 요양 이서(以西)의 물이며

 

같은 지리지에 패수(沛水)가 번한현(潘汗縣)의 경계 바깥에서 흘러 나온다 한 바

지금 해성(海城) 헌우락(蓒芋灤)의 옛 이름이 패수인 즉

 

남약천(南藥泉)의 설(說)을 따라 패수(沛水)를 곧 패수(浿水)로 잡는 동시에

만반한(滿潘汗)을 곧 해성 동북, 요양 서남으로 잡음이 옳으며,

 

험독현(險瀆縣) 주(註)에 험독은 조선왕 만(滿)의 도읍, 즉 왕검성(王儉城)이라 하였은 즉,

왕검성(평양,平壤)인 험독은 지금 해성(海城)이 됨이 명백하거늘

 

이제 2천 여리의 기점(起點)을 찾지 않고 종점(終點)을 찾으며

만반한의 연혁을 묻지 않고 그 위치를 억측해서 정하여 패수와 평양의 관계적 지방을

버리고 패수와 평양 왕검성의 연혁을 억지 주장하려 하니 어찌 실제에 부합하랴.

 

 

4. 제3의 착오

제3의 착오는 위조한 문자를 찾아 그 핵심을 명백하게 밝히지 못함이라.

 

이를테면,

1) 여태까지 학자들이 한서(漢書) 제기(帝紀)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 진번, 임둔에

대한 주(註) “신찬이 말하기를 무릉서에 의하면 임둔군은 그 치소(治所)가 동이현(東暆縣)이고

장안(長安)에서 6138리 떨어져 있으며 15개의 현이 있다.

진번군은 그 치소가 삽현(霅縣)이고 장안에서 7640리 떨어져 있으며 15개의 현이 있다.

(臣瓚曰 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 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十五縣眞番郡治霅縣 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十五縣)”에

근거하여 진번 임둔의 위치를 탐색하는 유일한 재료를 삼았으나,

 

그러나 그 소위 무릉서(茂陵書) 즉,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었다는 책이 과연 믿을 만한 책이냐.

 

사기나 한서에 사마상여가 무릉서를 지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더러

한서 사마상여전에 의거하면

 

사마상여가 죽은 뒤 5년만에 무제가 사마상여의 위패를 후토사(后土祠: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사당)에

처음 세웠다고 하고,

 

사기 봉선서(封禪書)나 한서 비사지(邳祀志)에 의거하면

무제가 원수(元狩) 2년(서기전 121년)에 비로소 후토사(后土祠)을 세웠으니,

 

그러면 사마상여가 죽은 해는 원수(元狩) 2년의 5년 전인 원삭(元朔) 3년(서기전 126년)이요,

진번, 임둔 양군의 설치는 원삭(元朔) 3년에서 18년 후인 원봉(元封) 3년(서기전 108년)이니,

 

원봉(元封) 3년(서기전 108년) 진번, 임둔의 설치할 때 벌써 죽은지 18년이 넘은 사마상여가 무릉서를 지어

진번, 임둔 양군의 명칭 위치 및 그 속현의 수를 말하였다 하면 이는 비사학적인 요괴담이 될 뿐이니

 

위에 있는 한서의 주(註), “신찬이 말하기를 무릉서에 의하면(臣瓚曰 茂陵書...)”이 위조임이

또한 명백하지 아니하냐.

 

2) 선배유학자들이 한서 지리지 낙랑군의 소속인 조선(朝鮮), 염한(䛁邯), 패수(浿水),

함자(含資), 점선(黏蟬), 수성(遂成),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㝠),

열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루방(鏤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吞列),

동이(東暆), 불이(不而), 잠태(蠶臺), 화려(華麗), 사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등 25현과

 

그 주(註)의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수는 서쪽으로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열수는 서쪽으로 점선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浿水西至増地入海” “帶水西至帶方入海” “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 등의 말에 의거하여

 

패수, 대수, 열수 3수(水)를 곧 지금 대동 임진 한강 3수(水)로 잡고,

3수(水)의 출입에 의하여 각 현의 소재지를 알아내려 하였으나,

 

그러나 이 설(說)이 전술(前述)한

“상곡부터 2천여리의 종점인 만반한이 요양 등지가 되고,

요양의 서남인 해성현의 헌우락이 패수가 된다.”고 한 위략 흉노전 조선전 등과 맞지 아니하니,

한서 지리지의 일부분인 낙랑군의 본문과 본주(本註) 모두가 위조임이 명백하다.

 

중국 역사책은 거의 그 독특한 병적인 자존성이 있는 춘추필법을 계승한 환자들의

저작(著作)인 고로, 비록 저작자가 직접 쓴 서적이 그대로 존재할지라도

저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나, 저들과 관계된 강토의 문제 같은 것은 저들의 기록을 맹신함이 옳지 않은데,

 

하물며 위조한 무릉서나 낙랑군 지리지에 의거하여

아주 먼 옛날에(上古-상고에) 국경 문제의 쟁점이 되는 패수와 평양의 위치를 구할 수 있는가.

 

 

5. 제4의 착오

 

제4의 착오는 옛 사서를 읽을 때에 앞뒤의 문례(文例: 문장을 짓거나 쓰는 방법의 실제 예)를 모르고

자구(字句)의 글 뜻을 억측 해석하여 위증한 기록을 발견할 기회를 없게 함이다.

 

이를테면,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의 주(註)에 “응소가 말하기를 (험독은) 조선왕 만의 도읍이다.

강물의 험준함을 의지하고 있으므로 험독이라고 하였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검성은 낙랑군 동쪽에 있다. 이곳이 본래부터 험독이다.

사고(안사고)가 말하기를 찬(신찬)의 설이 옿다

(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의

차(此: 이곳)는 요동군 험독의 대명사니,

 

본(本) 주(註)가 요약한 뜻을 상세히 풀이하면,

응소가 요동군의 험독을 조선왕 만의 옛 도읍인 왕검성이라 주장하매,

 

신찬이 이를 반대하여 가로되(왈,曰)

왕검성 조선왕 만의 옛 도읍지는 요동군에 있지 않고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 것이니,

 

차(此: 이) 요동군의 험독은 저 왕검성과 관계없이 따로 있는 험독이라 하여

응소와 신찬 양씨의 설(說)이 서로 반대의 견지에 있으므로

 

안사고가 응소의 설(說)을 버리고 신찬의 설(說)을 취하여

“찬의 설이 옳다(찬설시야)”의 단안을 내림이니,

그 글의 뜻이 십분 명백할뿐더러,

 

또 지리지의 각군 각현 주(註)에 의거하여 볼지라도,

 

가령 금성(金城)의 주(註)에 응설(應說-응소의 설)에는

“성을 쌓다가 쇠(金)를 얻은 고로 금성(金城)이라 명하였다”하고,

찬설(瓚說: 신찬의 설)에는 “쇠(金)의 견고함의 뜻을 취하여 금성(金城)이라 명하였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금성(金城)에 대한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안사고가 “찬의 설이 옳다(찬설시야,瓚説是也)”의 단안을 내리며,

 

영구(靈丘)의 주(註)에

응설(應說)에는 “조무령왕(趙武寧王)의 장지(葬地)인 고로 영구(靈丘)라 하였다”하고

찬설(瓚說)에는 “무령왕 이전부터 영구(靈丘)의 이름이 있었다” 하여

응설과 신찬의 영구(靈丘)에 대한 양설의 해석이 서로 반대되매

사고가 “찬의 설이 옳다(찬설시야,瓚説是也)”의 단안을 내리며,

 

기타 임진(臨晉), 순읍(栒邑), 진양(晉陽), 포반(浦反), 수무(脩武), 양(梁), 위씨(尉氏) 등

수십 현의 주(註)가 다 이와 같이 응소 신찬 양설이 반대되는 경우라야,

 

“응설이 옳다(응설시야,應説是也)”라 하거나 “찬설이 옳다(찬설시야,瓚説是也)”라 하는

양설의 하나를 취하는 단안을 내렸거니와,

 

만일 응설과 찬설이 독립적으로 옳거나 찬설이 응설을 따르면서 옳으면,

비록 단안이 없을지라도 그 옳음이 저절로 드러나므로 번잡한 문장을 피하여

그런 경우에는 응설시야 혹 찬설시야란 어구가 없음이니,

 

이는 지리지(地理志)를 한번 보면 밝고 또렷하게 깨달아 아는 문례(文例)이다.

 

전술(前述)한 바 요동군 험독의 주(註)도

신찬이 본(本) 험독을 왕검성이라 주장하는 응소를 반대하여

왕검성은 낙랑군의 속현이요 이 요동군 험독과는 관계없다는 이의(異議)를 제기하였으므로

안사고가 그 이의를 찬성하여 찬설시야라 함이니,

 

그 전후의 문례(文例)에 의하여 그 글의 뜻이 더욱 명백하거늘

선배유학자들이 지리지의 문례(文例)를 잘 알지 못하고 또 험독 주(註)의 글 뜻을 잘못 풀어

 

차자시험독(此自是險瀆)의 차(此)를 왕검성의 대명사로 보며, 찬설을 응설의 찬성설로 알아

 

그 전문(全文)을

응소가 가로되 “험독은 조선왕 만의 고도(古都) 왕검성이라”하매

신찬은 이를 찬성하여 가로되 “왕검성 곧 조선왕 만의 고도(古都)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니 이(차,此) 왕검성은 곧 요동군의 험독이라” 하고,

 

사고는 또 신찬의 찬성설을 찬성하여 가로되 “신찬의 말이 맞다(찬설이 시야)”라고 한 것으로 해석하였으니,

 

이러한 해석은 전후의 문례(文例)에 맞지 않을뿐더러,

또는 험독현이 요동군의 속현인 동시에 낙랑군의 속현도 되며,

요동군이 곧 낙랑군인 동시에 낙랑군이 곧 요동군이라는 미치광이의 해석이 되니,

 

이는 위 아래 글의 뜻만 모순이 될 뿐 아니라

곧 같은 모양, 같은 이름, 같은 위치의 성읍(城邑)이 한 곳에 두 개가 같이 있고

같은 시간, 같은 땅, 같은 사실의 역사가 하나의 선에 두개가 같이 일어나서

필경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수 없는

비지리(非地理)의 지리, 비역사(非歷史)의 역사가 됨이 아니냐.

 

여러 선생의 정밀하고 박식한 학식으로 이같은 대 착오가 있음은 참으로 몹시 놀랄만한 일이며,

 

더구나 신찬의 본 뜻은

왕검성인 평양을 요동군 이동(以東)의 낙랑군 평안도에 있다고 주장하는 제선생의 의견과 틀림이 없거늘

여러 선생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신찬의 설을 오해하였으므로

이를 자기들의 평안도 평양설을 반대하는 요동평양설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동사문답, 아방강역고, 해동역사 지리고 등 각각의 책들에 모두 평안도 평양을 주장하는 동시에

신찬의 설을 “망령된 주장을 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천하의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냐.

 

이상 네개의 착오를 발견하는 동시에 모든 서적의 위증이 다 파괴되고

모든 학자의 잘못된 고찰과 잘못된 증명이 다 바르게 잡혀

평안도의 대동강과 지금 평양을 고(古)평양 고(古)패수로 잡던 망설(妄說: 망령된 설)들은 자연 그 근거를 잃고

 

봉천성(奉天省: 지금의 요녕성)의 해성현(海城縣: 지금의 해성시)과 헌우란(蓒芋灤)이

고(古)평양, 고(古)패수인 확증을 얻어

이에 조선문명의 발원지인 고(古) 3경(京)의 하나인 평양과 7대 강의 하나인 패수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평양과 패수가 이같이 조선문명사상 중요한 지방으로써 천여 년 동안 그 고유의 위치를 잃고 천여리나 이사하여

평안도의 작은 지방으로 떠나 거기서 자리잡게 된 것처럼 보인 것은 위증한 서적의 소행이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이 같은 위증이 행세되어

제2패수, 제2평양인 대동강, 평양이

제1패수, 제1평양인 헌우락, 평양의 위치 역사 기타 모든 것을 빼앗게 됨은 어찌된 까닭이냐.

 

1) 조선민족의 대외적 실패로 말미암음이니,

동북 양국(신라와 발해)이 서로 대치하다가

북국(발해)은 거란과 여진에게 남아있던 종족이 전멸되고 토지도 전부 잃어

북국 해북 등 명사는 겨우 삼국시대의 옛 사람이 남긴 다 없어지고 흩어진 책의 글자로 남아있을 뿐이되어,

 

이제 제2의 평양 패수가 평양 패수가 되고,

제1의 평양 패수는 깊이 다른 지역에 침몰하여 평양 패수란 이름도 보전치 못함이라.

 

2) 조선 문헌의 결핍과 망실함에 말미암음이니,

그와 같이 조선민족의 대외세력이 미약하매

일체 고대의 문화나 무력을 자랑할 만한 고적과 문헌은 모두 매장 혹 불태워져버리고,

오직 노예적 비열과 은둔 선비적 깨끗한 척으로 민족적 구차한 삶을 도모할새

 

신라 경덕왕은 북방 주군(州郡)을 남방으로 옮겨 설치하고,

김부식은 외교적 아첨을 드리는 글자로 지은 삼국사기를 간행하더니

몽고황제는 사책(史冊)을 가져다가 제멋대로 잘라내고 덧칠을 망령되게 덧붙이니,

 

이제 지리 연혁이 가장 큰 참변을 만나는 동시에 평양 패수의 실록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그 명칭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되매 중국사가(史家)들이 위증한 문자가 온 세상에 횡행하나

여태까지의 학자들이 혹은 두려움에 꺼려서 그 위증을 위증이라 하지 못하며,

혹은 습관적으로 들어 그 위증을 위증인 줄 모르므로

 

해성 평양(古평양), 헌우란 패수(古패수)는 겨우 대수롭지 않은 야사가(野史家)의 귓속말로 남아있을 뿐이요,

평안도 패수(지금 패수- 대동강), 평양(지금 평양)만 행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사가(史家)가 이같이 위증의 문자를 조작함은 어느 때에 어떤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한 짓이냐.

 

전설에 의거하면 당나라 사람이 조선의 강성과 문명을 시기하여

당 태종이 일체 중국사에 보인 조선에 관한 기사를 고치고

이정과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하고는 그 서적을 몰수하여 불태웠다고 하니,

이 말이 비록 어느 기록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대개 믿을 만한 말인가 하노라.

 

그러면 당 태종이 손댄 서적이 무엇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개 한서(漢書), 진서(晉書)가 가장 심할지니,

 

안사고(顔師古)가 당 태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로써

문신으로 참여하여 흉계를 꾸미는 깊은 곳에서 당태종의 동방침략 모의에 협조하는 동시에

한서를 교정하는 임무를 맡았은 즉

 

그 교정을 할 때에 한 무제 4군의 범위를 확정하여 위치를 이동하여 조선의 옛 강토를

거의 중국의 소유로 위증하여 이로써 군신 상하 모두의 적개심을 고무(鼓舞)하는 자료를 만들려 한지라.

 

그리하여 진번 임둔의 위치를 주(註)할 때에 무릉서란 책 이름과 기사를 위조하여

지리지를 교정, 검열할 때에 낙랑군의 부분을 위조하여 요동군 험독 주(註)에 신찬의 말을 위조해서 끼워넣고

게다가 찬설시야의 되풀이 되는 말을 집어넣으니 이에 조선의 지리가 아주 문란하였다.

 

그뿐 아니라 남제서(南齊書) 백제전(百濟傳)의 두 장이 몽땅 빠졌음은(二葉殘缺-이엽잔결)

혹 백제 전성기의 “북으로 요동, 계, 제, 노 지방을 차지하고 남으로 오 월 지방을 침공하였다

(北據遼薊齊魯南侵吳越)”하던 해외 발전의 실록을 당 태종이 삭제함이 아니냐.

 

수서에 적은 동양 고대 역사상 미증유의 대전쟁의 기록이 그같이 모호함도

혹 당 태종이 지워 없애거나 혹 고친 것이 아니냐.

 

또한, 중국 역사책(史冊)이 당 태종 이전의 것이라고 어찌 중국인의 습성된 자존적 심리로

저작한 것이 없으랴만, 다만 당 태종과 안사고의 손댄 서적같이 심하지 아니할 지니라.

 

일본학자 관야정의 노력에 의하여 성취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그 그림에 대한 설명에 용강(龍岡)에서 발굴한 점선비문(黏蟬碑文)을 기재하고

 

“이제까지 학자들이 다투던 열수는 곧 대동강됨이 옳다.” 하였으나,

이는 곧 한서 지리지의 “列水西至黏蟬入海(열수는 서쪽으로 점선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와

점제비문이 용강에서 발견됨에 의하여 한 말이라.

 

그러나 만일 한서 지리지의 낙랑군 부분의 위증임을 알았으면 이런 착오가 없었을 것이다.

 

고(古) 평양 패수가 해성 헌우락임은 위에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지금 평양이 평양되고 지금 대동강이 패수됨은 언제부터냐.

 

이에 대하여 두가지 설(說)이 있으니,

 

(갑) 조선 고대에 2개 혹 2개 이상의 지명을 짓고는 그 위에 형용명사를 씌워 구별한 것이 많으니

양구려(兩句麗), 삼한(三韓), 육가야(六伽倻) 등이 다 그 종류다.

 

평양 패수도 이와 같이 해성과 헌우락을 ‘펴라’ 라고 이름 짓는 동시에

평양과 대동강도 ‘펴라’ 라고 이름 짓고

그 위에 남북 두자를 덧붙여 구별하였다 함이 하나의 설(說)이요,

 

(을) 우리 조상이 무슨 일로 인하여

국토나 인민을 갑지에서 을지로 옮기는 경우에는 매양(늘) 그 지명까지 옮기었으니,

해부루가 동쪽으로 옮기매 동북 양 부여가 생기고,

부여 온조가 남쪽으로 이사하매 하북 하남 양 위례가 생긴 등이 다 그와 같은 종류니,

 

평양 패수도 이와 같이 위만과 한무제의 난에 해성과 헌우락의 ‘펴라’에서

대동강상으로 옮긴 인민들이 그 새로운 거주지를 또한 ‘펴라’라 명하여

이에 남북 두 개의 ‘펴라’가 생기었다 함이 또한 하나의 설(說)이라.

 

양설(兩說)중 어떤 설(說)이 옳은지는 다 없어져 버리다시피한 문헌이 그 판결 재료를 주지 않거니와,

 

그러나 중고(中古) 평양과 패수인 삼국시대의 펴라는

고(古)평양, 고(古)패수인 해성과 헌우락을 가리킨 것도 있고

근세(近世) 평양과 패수 같이 지금 평양과 대동강을 가리킨 것도 있으니

 

만일 그 하나를 고집하고 다른 하나를 부인(否認)하거나

혹 양자(兩者) 다 바꾸면 곧 지리와 연혁을 알수없게 되어

역사의 사실이 뒤섞이고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제 삼국사기를 주요한 증거서류로 삼고 다른 사서(史書)도 보조하여 중고(中古)의 펴라를 찾으려 한다.

 

 

 

갑.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의 구별

 

왕검성 '펴라'인 고(古)평양 고(古)패수가 한무제의 침공을 당해 4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되었으나

4군의 위치가 시세(時勢)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졌으므로 낙랑군 수부(首府)의 위치는 해성에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범위가 요동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거늘

후세 사람들이 매번 삼국사기에 기재된 낙랑국을 곧 낙랑군으로 오인하여 드디어 남북 양 펴라를 혼동하였다.

 

“혁거세 30년 낙랑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다(赫居世三十年樂浪人將兵來侵)”,

“38년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었다.(三十八年卞韓樂浪倭人無不畏懷)”,

“남해 원년 가을 7월에 낙랑의 군사들이 이르러 금성을 포위하였다(南解元年秋七月樂浪兵至圍金城)”,

“낙랑인들이 신라의 속이 비었다고 하면서 금성을 공격하였다(樂浪謂內虛來攻金城)”,

“유리 13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儒理十三年秋八月樂浪犯北邊)”,

“14년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와서 투항하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十四年高句麗王無恤襲樂浪滅之其國人五千來投分居六部)” 등

신라본기에 보인 것은 낙랑국의 신라와 관계된 약사(略史: 요약한 역사)요,

 

 

“대무신왕 15년 여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 놀러 갔는데 낙랑 왕 최리가 행차를 나왔다가 호동을 보았다

  (大武神王十五年夏四月王子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出行因見之)”,

“드디어 함께 돌아가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遂同歸,以女妻之)”,

“호동이 왕에게 낙랑을 습격하도록 권하였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불지 않으므로 방비를 하지 않았다

  (好童勸王襲樂浪崔理以鼓角不鳴不備)”,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遂殺女子出降)”,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二十年王襲 樂浪滅之)”,

“27년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와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과 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였다

   (二十七年秋九月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등은

고구려본기에 보인 낙랑국의 고구려와 관계된 약사(略史: 요약한 역사)요,

 

 

“온조 8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더니 낙랑태수 -태수는 왕의 오기-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이제 우리영토에 접근하여 성을 쌓고 목책을 세우는 것이 혹시 우리 땅을 잠식하려는 계획이 아닌가

  (溫祚 八年七月築馬首城竪甁山柵 樂浪太守–太守는 王의 誤–使告曰…今逼我疆造立城柵或者其有蠶食之謀乎)”,

“11년 여름 4월에 낙랑이 말갈을 시켜서 병산의 목책을 습격하여 파괴하도록 하였다

  (十一年夏四月樂浪使靺鞨襲破甁山柵)”,

“13년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라 동쪽 -서로 읽음이 옳음-에 낙랑이 있다고 하였다.

  (十三年 王謂臣下曰 國家東–西로 讀함이 可함–有樂浪)“,

“17년 봄에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웠다(十七年春樂浪來侵焚慰禮城)”,

“18년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고자 하였다.(十八年 王欲襲樂浪牛頭山城)” 등은

백제본기에 보인 낙랑국의 백제와 관계된 약사(略史: 요약한 역사)라.

 

 

선배 유학자들이 위에 서술한 온조 8년의 낙랑태수란 말로 인하여

3국의 본기에 보인 낙랑 등이 다 한(漢)의 낙랑군을 가리킨 것으로 억측 단정하고(臆定-억정하고),

 

대무신왕 15년의 낙랑왕은 곧 당시의 조선인이 낙랑태수를 왕으로 잘못 부른 것이라고 강제 해석하였으나,

이는 한의 낙랑군이 원래에 요동에 있는 것인 줄을 모른 망령된 설(說)이며,

 

혹은 대무신왕 27년의 “한나라 광무제...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漢光武…伐樂浪取其地爲郡縣)”의 말로 인하여

 

낙랑국이 멸망한 뒤에 그 땅이 곧바로 한의 낙랑군이 된 줄로 아나,

 

그러나 이는 봉건시대라 조선 전영토(全土-만주 동북을 포함)에

여러개의 진국(辰國: 대국이란 뜻)이 병립(竝立)하고,

진국(辰國)이 하나면 그 밑에 다수의 소국(小國)이 부속(附屬)하였으니

 

최씨가 곧 낙랑 진국의 왕으로 그 밑에 점선(黏蟬), 함자(含資), 대방(帶方) …등

소국(小國)을 통솔하였다가 고구려가 최씨를 멸하매

 

그 각 소국들이 고구려에 불복하여 한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고구려를 막음이니

“그 땅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다(取其地爲郡縣)”는 과장된 언사요, 사실이 아니다.

 

신라본기 기림 이사금 3년에 “낙랑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왔다樂浪帶方兩國歸服)”의 기사를 보면

낙랑의 진국(辰國: 대국이란 뜻)은 비록 멸망하였으나 그 각 소국은 의연히 존속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후한서 제기(帝紀)에 의거하면

“한 광무제 6년(서기 30년)漢光武建武六年 …

처음에 왕조가 군-郡에 의거하여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가을에 낙랑태수 왕준을 파견하여 치게 하였다.

낙랑군의 관리가 왕조를 죽이고 항복하였다(初王調據郡不服秋遣樂浪太守王遵擊之郡吏殺調降遣). ...

 

9월에 낙랑인 중에서 모반한 대역죄인은 죽이고 그 이하의 자들은 용서하였다

(九月赦樂浪謀反大逆殊死已下)”라 한 바

 

건무 6년은 대무신왕 13년이니 왕자 호동이 낙랑 공주에게 장가를 들기 3년 전이니

낙랑군에 하등(何等)의 큰 일이 있으되 낙랑국이 모르고,

낙랑국에 하등(何等)의 큰 일이 있으되 낙랑군이 알지 못하는 것처럼

당시 양 펴라의 관계가 이같이 사이가 멀리 떨어졌었거늘

 

삼국사기의 오류(誤謬)도 엄하게 꾸짖어야 하거니와

후세(後世)의 사가(史家)들도 또한 꼼꼼하지 못하다 하겠다.

 

 

을. 낙랑과 평양의 구별

 

낙랑과 평양이 다 펴라의 가자(假字: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글자)이나

낙랑국이 멸망한 뒤에는 낙랑이라 쓰지 않고 평양이라 써서, 요동의 낙랑군과 구별한 고로

 

대무신왕 이후 삼국사기에 쓰인 낙랑은

신라본기 기림 이사금 3년의 낙랑이 지금 평양을 가리킨 것인 이외에는

그 나머지는 모두 요동의 한(漢) 낙랑군을 가리킨 것이요,

평양은 모두 지금 평양을 가리킨 것이다.

 

이를테면

i) 동천왕 20년의 "위나라 군사들은 요란해져서 진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물러났다

(魏軍擾亂不能陳遂自樂浪而退)" 라고 한 낙랑은 요동의 낙랑이요 지금 평양이 아니니,

 

이때에 위군(魏軍)이 환도(丸都)를 깨뜨리고 동천왕을 추격하다가 패퇴함인즉

만일 지금 평양의 낙랑이라 하면 이는 군(軍)을 진격시킴이요 후퇴함이 아니며,

 

21년의 "왕은 환도성이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으로 삼을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양성을

쌓았다(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 築平壤城)"라고 한 평양은 지금 평양이요 요동의 낙랑이 아니니,

 

이때에 동천왕이 위군(魏軍)에게 패하고 도읍을 옮겨 외적을 피함이니,

만일 요동의 낙랑이라 하면 이는 외적을 가까이 함이요 피함이 아니다.

이에서 남(南)펴라는 평양이라 쓰고, 북(北)펴라는 낙랑이라 썼음을 볼지며,

 

ii) 미천왕 3년에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王率兵三萬 侵玄菟郡虜獲八千人 移之平壤)" 라고 하였고,

 

14년에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았다(侵樂浪郡虜獲男女二千餘口)"라고 하였으니,

평양과 낙랑이 만일 동일한 지방이면

 

이는 전(前)에는 노획물을 옮겨놓던 지방이 후(後)에는 다시 노획하던 지방이 되어

내가 나를 공격하는 괴상한 연극을 행함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여기에 운운한 평양과 낙랑도

하나는 지금 평양이요 하나는 요동의 낙랑임이 또한 명백하다.

 

후세 사람의 위증과 개찬이 많은 중국 각 사서에도 또한 무의식 중에 끼쳐온

낙랑이 요동에 있는 증거가 간혹 있으니

 

후한서 제기(帝紀) 안제 영초(安帝 永初) 5년 3월에 “부여가 낙랑의 변경을 침범하였다

(扶餘犯樂浪塞)”를 기록한 바

 

부여는 북부여–지금 하얼빈 이니 낙랑이 요동의 낙랑인 고로 부여가 그 변경(塞-새)을 공격함이요,

 

자치통감 민제(愍帝) 건흥(建興) 원년 (미천왕 14년)에

"요동의 장통은 낙랑 대방 두 군을 근거로 삼아...낙랑왕 모용준은 장통에게 그 백성 1천여명을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도록 설득하였다. 모용외는 그곳에 낙랑군을 설치하여 장통을 태수로 삼았다.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樂浪王遵說統率其民千餘家歸(慕容)廆 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를 기록한바,

 

만일 장통이 근거한 낙랑 대방이 살수 이남의 낙랑 대방이라면

당시에 고구려가 강성하여 살수 이북만 독차지하였을 뿐 아니라

 

곧 요동의 서안평 안동현(西安平 安東縣) 등지(等地)까지도 미천왕12년에 벌써 고구려의 영토로 들어와 있었는데

살수 이남에 장통이 근거를 둔 장통이 천여 가(千餘家)를 인솔(率)하고 요서까지 도주하지 못할 것이니

이 낙랑도 요동의 낙랑됨이 또한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비록 평양을 가자(假字)로 ‘펴라’ 라고 기록하지만,

펴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어서 ‘펴라’란 물의 명칭이므로

패수(浿水)를 떠나서는 평양이라 칭한 일이 없다.

 

이를태면, 고국원왕이 황성(黃城) —여태까지의 역사가들이 고국원왕 13년

十三年移居平壤東黃城(13년이거평양동황성)의 황성을 윗 구절에 연이어 읽어 동황성(東黃城)이라 하였지만

이는 대착오이다 — 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평원왕이 장안성에 도읍한 바

 

황성과 장안성이 다 평양에서 매우 가깝지만 다만 패수를 끼고 있지 아니한 까닭에

평양이라 칭하지 아니하고 황성 혹은 장안성이라 칭하여 그 구별이 이같이 엄격히 다르지만,

 

중국인은 역대 이래에 패수가 있고 없음에 상관하지 않고 낙랑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옮겼으니

 

요동의 낙랑도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고정된 장소가(處所-처소가) 없거니와

모용외가 장통(張統: 전항에 보임)의 항복을 받아 낙랑태수를 삼고

유성(柳城)에 낙랑을 임시 설치하였으니 이는 요서(遼西)의 낙랑이요,

 

척발위(拓跋魏 - 북위)의 이후에는 상곡(上谷)에 낙랑을 옮겨 설치하였으니 이는 산서(山西)의 낙랑이니,

이 따위는 다 펴라의 물과 관계없는 낙랑이라 할 것이다.

 

 

병. 백제 중엽의 관계한 낙랑

 

평양 낙랑의 구별이 전술한 바와 같으나, 이에 백제사를 읽으면

 

고이왕 13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빈틈을 타서 낙랑의 변경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잡아왔다.

유무가 그 소식을 듣고 화를 내자 왕은 그들로부터 침공을 당할까봐 염려하여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朔은 帶의 誤이다)方太守王(王은 弓의 誤이다)

遵伐高句麗王乘虛襲樂浪邊民茂聞之怒王恐見侵討還其民口)”라 하고

 

분서왕 7년에 “봄 2월에 비빌히군사를 출동시켜 낙랑의 서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春二月潛師襲取樂浪西縣冬十月王爲樂浪太守所遣刺客賊害薨)”이라 하니,

 

여기에 4차나 보인 낙랑의 명사를 여태까지의(歷來-역래의) 사가들이 의심없이

지금 평양을 가리킨 것으로 알아왔으나,

 

그러나 이때는 낙랑국이 망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남펴라에 어찌 낙랑이란

가자(假字, 가차자-假借字: 빌려온 글자, 한자-漢字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음이나 새김의 발음만 빌려서 우리말을 표기한 글자)로 그 칭호를 썼으랴.

 

대개 삼국사기 가운데 본기와 열전의 가장 간결한 자는 백제사라.

거칠부전의 "백제인들이 먼저 공격하여 평양을 깨뜨렸다(百濟人先攻破平壤)의 말에 인하여(因-인하여)

그 연조(年祚)를 따지면,

 

성왕(聖王) 29년에 백제가 일차(一次)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한 대사가 있을지어늘 본기에 이를 누락하며,

문무본기, 당서, 일본서기 등을 대조하면 부여 복신(福信)의 큰 재능과(隆才-융재와) 전략과 충절은

고금에(古今:예와 지금에) 동등함이 없는 백제 말엽의 거인 이어늘

열전에 이 같은 거인을 내다 버렸으며,

 

자치통감의 "부여는 처음 녹산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백제에 의해 파괴되었다

(扶餘初居鹿山爲百濟殘破)"의 기사로 보면

지금 합이빈(하얼빈)이 백제의 땅이 되었거늘 본기나 열전에 그런 말이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저근(姐瑾: 사람 이름)과 사법명(沙法名: 사람 이름)의 공적을 찬양한 남제서(南齊書)

가운데에 동성왕의 국서(國書)로 보면,

 

동성왕때에 척발위(拓跋魏: 북위)의 수십만 대병을 전승하여

국세가 매우 강성하였거늘 동성왕 본기중의 백제는 어찌 그리 미약하며,

 

송서의 "백제가 요서의 진평을 침략하여 차지하였다(百濟略有遼西晉平)"으로 보면

어느 때 백제의 해외 발전이 지금 영평부 등까지 미쳤거늘

양(두) 왕의 본기에는 그런 기록이 없으며,

 

건국설(建國說)은 십제(十濟), 백제(百濟) 등의 부당한 사실과 다른 해석이나(曲解-곡해나) 남아 있으며

망국(亡國)의 남겨진 터에는 조룡백마(釣龍白馬)의 적장(敵將)을 숭배하는 도깨비 이야기만 끼쳐있고,

정작 자가의 문화상 정치상 아름답고, 선(善)하고, 웅대한 무엇은 볼 것이 없으니

 

이는 적국 군인의 병화에 불탄 문헌의 재앙보다 사실을 뒤집은 나말(羅末: 신라 말) 문사(文士)의

곡필(曲筆: 바른대로 쓰지 아니함)의 죄가 더 많음을 볼 것이다.

 

이제 고이왕이 쳐들어간 낙랑으로 말하면

삼국지 동이열전에 “(위나라) 명제가 비밀리에 대방태수 선우사 낙랑태수 유흔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두 군을 평정하였다.

(眀帝密遣帯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이라 하고,

 

“정시 6년(서기 245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이 (단단대)령 동쪽의 예(동예)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치자 불내후등이 읍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擧邑降)”이라 한바

 

이같이 낙랑이 위나라 장수 유흔과 유무가 서로 계속하여 태수가 된 곳이니,

만일 이 낙랑이 지금 평양일진대 환도(丸都)에서 외적을 피하여 천도한 동천왕이

어찌 9년동안 뿌리를 깊이 박은 위나라 사람의 낙랑에 서울을 옮길 수 있으리요.

 

그런즉 유흔, 유무, 궁준 등의 근거인 낙랑 대방이 요동의 낙랑 대방인 동시에

고이왕이 쳐들어간 낙랑도 요동의 낙랑이니 이는 대개 백제의 해외 발전의 시작일지며,

 

분서왕의 쳐들어간 낙랑으로 말하면 양서(梁書) 백제전에

“진나라때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고 있었다.(晉世百濟據有遼西)”라 하니

분서왕 원년은 진나라 혜제 원강 8년이요 모용외(慕容廆)와 같은 때이다.

 

사서에 의거하면 모용외의 요서 낙랑의 건설은 미천왕 14년, 장통의 항복을 받을 때의 일이나,

그 전에 모용준(慕容遵)이 낙랑왕의 칭호를 가진 것을 보면 요서 낙랑의 건설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것이다.

 

그러면 대개 백제가 모용씨(慕容氏)의 요서를 공격하여 저들의 낙랑군 동현(東縣)을 차지함에

낙랑태수가 병력으로 백제를 막기에 부족하므로 드디어 자객을 보내어 왕을 암살함이니

이것도 백제의 해외발전의 일반이다.

 

고타소낭(古陁炤娘: 김춘추의 여동생)의 참사로 인한 신라인의 격한 원망이 백제 역사에 미치어

매번 그 훌륭한 공적은 깎아버리고 패망만 기록하였으므로 요동 요서 양 낙랑의 첫 관계가 본기에 빠졌으니,

 

그러면 신라 고구려의 양 본기에 뿐 아니라 백제 본기에도 낙랑국의 멸망이후 남펴라는 평양이라고 쓰고

북펴라는 낙랑이라고 쓴 강철같은 증거이며,

 

이로 말미암아 당 태종이 진서(晉書)를 지을 때에

고구려와 백제의 전적(戰蹟)과 강토를 많이 삭제하였음이 명백하다.

 

자치통감에 호삼성(胡三省)은 모용외의 낙랑을 유성(柳城)에 임시로 설치한 것이라 하고,

문헌통고에 백제의 요서 진평을 당나라 유성과 북평 사이라 하고,

 

당서 지리지에 유성(柳城)은 동쪽으로 요하(遼河)에 이르기까지 480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까지 260리,

서쪽으로 북평군에 이르기까지 7백리, 북쪽으로 거란 경계에 이르기까지 50리라 하며,

그리고 북평(北平)은 동쪽으로 유성에 이르기까지 7백리, 서쪽으로 어양에 이르기까지 3백리,

동북쪽으로 유성에 이르기까지 7백리라 하니, 이로써 유성 낙랑의 위치를 상상할 만하다.

 

 

정. 중국사 지리지와 동이열전에 보인 낙랑

 

한서 지리지의 낙랑 25현이 당나라 사람의 위증임은 이미 상편에 약설(略說)하였거니와,

이제 한서, 후한서, 삼국지, 진서의 지리지와 동이열전에 보인 낙랑과 낙랑에 관계되는

현도, 대방 등을 같이 고찰하면,

 

한서지리지에 보인 현도 낙랑의 기록이 다음과 같으니,

현도군 – 45,006호(戶), 인구 221,845명, 3개 현(縣)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

낙랑군 – 62,812호(戶), 인구 406,748명, 25개 현(縣) (조선朝鮮, 전한䛁邯, 패수浿水,

함자含資, 점선黏蟬, 수성遂成,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㝠, 열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누방鏤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탄렬吞列, 동이東暆,

불이不而, 잠태蠶臺, 화려華麗, 야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

 

후한서 군국지(郡國志)에 보인 현도 낙랑의 기록이 다음과 같으니

현도군 –6성(城), 1,594호(戶), 인구43,163명,

6성의 내역: 고구려, 서개마, 상은대, (옛 요동에 속했던)고현, (옛 요동에 속했던)후성, (옛 요동에 속했던)요양

 

낙랑군 – 18성(城), 61,492호(户), 인구257,050명,

18성(城)의 내역: 조선朝鮮 염한喃(䛁)邯 패수浿水 함자貪資 점선占蟬 수성遂城 증지増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冥 열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누방鏤方 제해提奚 혼미渾彌 낙랑樂都

 

삼국지에는 지리지가 없으므로 이는 빼고,

 

진서 지리지에는 현도군이 없고

낙랑과 대방을 양군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이 다음과 같으니

 

평주 낙랑군(平州 樂浪郡) – 거느린 현이 6개, 3700호(戶),

6현의 내역: 조선朝鮮 둔유屯有 혼미渾彌 수성遂城 누방鏤方 사망駟望

 

대방군 –공손도가 설치하였는데 거느린 현이 7개, 4900호(戶),

7현의 내역: 대방帯方 열구列口 남신南新 장잠長岑 제해提奚 함자含資 해명海㝠

 

사기(史記)에 한무제가 위씨(위만~위우거)를 멸하고 4군을 두었다 했는데

어찌하여 한서 지리지에는 현도 낙랑만 있고 진번 임둔이 없느냐.

 

낙랑이 25현이나 되는데 현도는 어찌된 까닭으로 겨우 3현이냐.

후한서 군국지에는 어찌하여 한서 지리지보다 낙랑의 1현이 더하고 동이 이하 7현이 없느냐.

진서에는 어찌하여 현도가 없고 대방과 낙랑 양 군이 있느냐.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의

“소제가 진번 임둔을 파하고 낙랑 현도에 병합하였다(昭帝罷眞番臨屯以幷樂浪玄菟)”가

그 제1의 답안일지며,

 

“현도가 다시 고구려로 옮겨가자 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되었다

(玄菟復徙居句驪自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가

그 제2의 답안일지며,

 

“다시 영동의 7개현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었다.

광무제 건무 6년에 동부도위를 페지하여 마침내 영동지역을 포기하였다

(復分嶺東七縣置東部都尉光武建武六年省東部都尉遂棄嶺東地)”가

그 제3의 답안일지며,

 

“건안 연중에 공손도가 둔유현 이남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었다

(建安中公孫康分屯有以南荒地爲帶方郡)“가

그 제4의 답안일 것이다.

 

그러나,

후한서 제기(帝紀) 광무제 23년에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인 대승이 낙랑으로 찾아와 내속되기를 청하였다

(句麗蠶支落大加戴升詣樂浪內屬)”라고 하였는데,

 

잠지(蠶支)는 곧 잠대(蠶臺)요, 잠대는 한나라 낙랑의 현 이름 이어늘

이제 잠대가 낙랑에 속함을 구하다 함은

마치 안성이 경기도에 속하려 청한다는 것과 같은 우스운 이야기이며(笑話-소화이며),

 

후한서 화제(和帝) 원초(元初) 5년에,

“궁이 예맥과 함께 현도에 쳐들어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宮-고구려 태조대왕의 이름-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라고 하였으나,

 

‘화려’는 낙랑 동부인 영동(嶺東) 7현의 하나인즉, 광무제 때에 벌써 파기한 현 이어늘

이제 다시 고구려가 침입하는 한(漢)의 현이 됨도 성립되지 않는 말일뿐더러,

 

현도에 쳐들어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함은

낙랑의 속현이 곧 현도의 속현이라는 모순된 말이며,

 

고구려의 국명을 본 떠 고구려현을 둠은 아직 용서하고라도,

 

유리왕(琉璃王) 33년에 태자 무휼이 고구려현을 점령하여 그 땅이 고구려국의 소유가 되었거늘

이 뒤 3백년이 지나도록 고구려 현이 현도의 수부(首府)로 한서지리지나

후한서 군국지에 적힘은 근거없는 망필(妄筆)이다.

 

다시 더 상세히 고찰하면 이따위가 얼마인지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한서의 지리지나 후한서의 군국지나 진서의 지리지에 보인

낙랑 현도 등 군(郡)은 후세 사람의 위증(僞證)이요,

 

당(唐) 이전 각 사서의 모든 동이열전은 후세 사람의 개찬(改撰: 고쳐 쓴것)이 허다한 것며,

그중 더욱 낙랑 현도 등에 관한 기록은 대개가 위조라 할 것이다.

 

그러면 낙랑 현도의 여러 현은 모두 한꺼번 지워버림이 옳을까?

 

한서 지리지 요동군 번한현(遼東郡番汗縣)의 패수(沛水)가 곧 패수(浿水)임은 이미 상편에 기술하였으며,

삼국지 동이열전에 낙랑전을 빼버림이 유감임은 이미 삼국지 동이열전의 교정에 기술하였거니와

혹 삼국지에 본래 낙랑전이 있고 낙랑전 가운데에는 낙랑 속국 20여개가 기재되었던 것을

당 태종 안사고 등이 낙랑전을 지워 없애버리고

그 20여 국을 가져다가 한서 지리지에 끼워넣어 낙랑군 25현을 만들며

 

지리지 가운데 낙랑군의 속현인 번한 험독 등을 요동군에 옮겨넣고,

그 흔적을 숨기기 위하여 번한의 패수(浿水)를 패수(沛水)로 고치고

험독(險瀆)의 주(註) “조선 왕 만의 도읍지(朝鮮王滿都)”를 반박하고,

각 사서의 동이열전 혹 기타에 보인 낙랑의 기사를 혹 삭제 혹 고쳐

 

중국 옛 영토의 범위를 넓히어 동쪽을 침략하려는 모든 장군과 문관들의 적개심을 고무하려 함이었던가.

 

여하간 지리지의 현도의 3현과 낙랑 25현은 거의 조선의 열국이요

당시 요동 낙랑군의 본 현이 아니라 할 것이다.

 

 

6. 결론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중고(中古)시대의 평양 패수는 남과 북에 나뉘어 있었으니

남쪽에 있는 것은 낙랑국이라, 평양성이라 칭하여 그 위치가 대동강상에 고정되어 있었고

북쪽 있는 것은 낙랑군이라 칭하여 그 군(郡)을 다스리던 곳이 요동부터 요서,

요서부터 상곡까지 이동하였던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남낙랑(南樂浪)에는 중국인의 세력이 중고(中古)시대에 아주 들어온 적이 없느냐.

이는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중고(中古)시대에 조선인은 지금의 조선 8도 이외에 압록강을 건너

흥경(현재 요녕성 신빈 만주족 자치현 서쪽) 이동(以東),

개원(현재 요녕성 개원시) 이북의 봉천(지금의 요녕성),

길림의 대부분에 뿌리내려 살고 있으면서,

 

지금의 만리장성 이북으로 나가 열하도(熱河道), 흥화도(興和道), 수원도(綏遠道) 등을

진격하는 지방으로 삼아

 

세력이 왕성할 때에는 남하하여

어양(漁陽: 북경 부근), 우북평(右北平: 영평부-永平部), 태원(太原: 대동부-大同府) 등을 공격하고,

 

중국인은 영평부 부터 산해관으로 진격의 지방을 삼아 세력이 왕성하면 요동부터

혹 흥경(興京) 이동(以東)도 틈을 엿봐, 혹 살수 이남까지도 침략하였거늘

 

역대의 사가(史家)들이 매번 이런 줄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므로

 

삼국사기를 읽을 때 고구려가 요서에 축성하였다, 어양, 상곡, 우북평 등에 침입하였다는 말을 보면

고구려가 열하도, 흥화도 등지부터 남향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공격한 것인 줄을 모르고

산해관부터 서진(西進)하여 영평부 혹 대동부 등을 공격함인 줄로 알며

 

중국인의 세력이 미천왕 이전, 수백년 동안 평안 황해 등지에 기반을 다지고 살았던 줄로 아니,

이따위는 다 비상한 착오라.

 

설혹 평안 황해에 1,2차 중국인의 병화(兵禍: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 또한 고려말 홍건적이 개성에 침입하듯이 잠시 쳐들어와 요란을 피운 것이 될 뿐이니

영구한 점령지로 있었다 함은 역사적 기록과 틀리는 망설(妄說: 망령된 주장)이라 할 것이다.

 

다만 낙랑이 이리저리 옮긴 것에 대하여 일종 재미를 느낄 일이 있으니,

낙랑이 요서로 옮길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동에 미친 뒤며,

낙랑이 상곡으로 옮길 때는 조선의 세력이 요서에 미친 뒤니,

낙랑 위치의 진퇴로 조선의 세력이 커지고 줄어듦을 점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많은 낙랑과 대방의 고분들을 기재하였으나,

낙랑군 제8 대동강 방면의 고분을 중국 한나라 고분이라 함은

구리거울이나 금구(金口: 금고-金鼓라고도 하는데 금속으로 만든 징 같이 납작한 둥근 북)등에 박힌

왕(王) 자(字)를 제왕의 왕으로 풀지 않고 중국 왕서방의 왕씨로 풀며,

 

제6, 제5 강동(江東)의 고릉(古陵)은 전설에 황제총(皇帝塚)이라 하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를 고구려 동천왕릉이라 하였거늘, 이제 중국 한나라의 왕릉이란 전에 없던 별명을 주며,

 

점제비는 그 맨 앞 빠진 부분에 의문부호를 표시하고 중국 한나라 광화(光和) 원년이라 하니,

우리 같은 고고학의 문외한이 어찌 그 시비를 경솔히 논하리요마는,

 

그러나 그 그림 설명의 대개를 보건대 어떤 말은 학자의 견지에서 나왔다느니보다

정치상 다른 종류의 작용이 적지 않은 듯하다.

 

대방태수 어양(漁陽) 장무이(張撫夷)의 묘는 그 비문의 어양(漁陽) 2자(字)를 근거하여

중국 북경인이 관리가 된 자(者)의 묘라 하였으나,

 

백제 중엽부터 백제인이 중국을 모방하여 지은 지명이 많으니

광양(廣陽), 성양(城陽) 등이 그것이니,

어양도 이와 같이 백제 안쪽 땅의 지명이 아닌지 모를지며,

 

개로왕때에 대방태수 사마(司馬) 장무(張茂)란 자(者)가 있으니

장씨는 백제의 대대로 세력있는 집안으로 대방태수의 직(職)을 세습하던 성씨인지도

모를지니, 당연히 북경인이라 단언함은 너무 급조한 일인가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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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전후 삼한고(前後 三韓考)

 

 

 

------ 차 례 ------

 

 

1. 인용서의 선택

1.1. 인용서의 진위 변별

1.2. 조선 고사(古史)의 잔결(殘缺)

1.3. 중국 사가의 조선에 관한 기록

1.4. 조선인의 기록으로 중국 사책에 초록된 삼국지의 조선 사실

1.5. 삼국지의 조선에 관한 기록 전부를 신용할 수 없는 조건

1.6. 삼한에 관한 기록

 

 

2. 전삼한 삼조선(前三韓 三朝鮮)의 전말

2.1. 삼한의 소자출(所自出)

2.2. 삼한은 곧 삼조선

2.3. 전삼한(前三韓)의 명칭

2.4. 전삼한 창립자 단군

2.5. 전삼한 강역과 연대

 

 

3. 후삼한 – 삼국지에 보인 나가제(羅 加 濟) 삼국

3.1. 후삼한 고증에 대한 선유의 오류

3.2. 중(中)삼한의 약사

3.3. 후삼한 나가제(羅 加 濟)의 역사

3.4. 후삼한의 호상(互相) 관계

3.5. 후삼한과 병립한 열국

3.6. 후 삼한과 낙랑 대방의 관계

3.7. 후삼한과 북방 제국의 언어

 

 

 

 

 

1. 인용서의 선택

 

1.1. 인용서의 진위 변별

 

아직 고분 발굴이나 고적 탐사나 유물 유적 연구 같은데 지식과 기구가 모두 부족한 우리로서는

우리 고사를 연구하려면 오직 옛 사람이 끼친 서적으로 자료 삼을 뿐인 것은 물론이다.

 

서적이라면 우리의 것뿐 아니라 인접국의 것도 가능하며,

지난시대의 소위 정사(正史)라는 것보다도 혹 신화, 소설, 요담(妖談), 잡서에서 직접 혹 간접으로

사적 가치를 더 얻는 수도 있지만, 그러나 이는 선택할 줄을 안 연후의 일이라,

 

어찌 아무 변별도 없이 조선에 관한 기재만 있으면 산해경이나 죽서기년이나

포박자(抱朴子: 도교 이론서)나 박물지(博物誌: 백과사전)같은 것을 가치를 묻지 않고 인용하며,

 

후세 사람의 위조라고 세상사람 모두가 다 말하는 요전(堯典: 상서-尙書중의 편명)과

우공(禹貢: 상서-尙書중의 편명)의 우이(嵎夷)니 도이(島夷)니 하는 것을 가져다가

4,5천년전 조선사의 한 장을 채우려 함은 또한 가소로운 일이 아니냐.

 

페리클레스의 속인 기록에 의하여 아테네는 매번 스파르타를 이긴 줄로 알며,

서기전 390년 갈리아 인(人)의 침략 이후에 로마인이 나중에 기록한 로마 옛 사서에 의하여

옛 로마의 연대 사적 등을 믿으면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사(古代史)를 논술함에 먼저 인용서의 가치를 성찰할 것이다.

 

 

1.2. 조선 고사(古史)의 잔결(殘缺: 완전하지 못함, 모자람)

 

조선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적을 신지비사(神誌秘詞)라 한다.

신지(神誌)를 혹은 사람 이름이라 하며, 혹은 책 이름이라 하나,

졸견으로는 신지는 본래 고대의 벼슬 명칭, 삼한사(三韓史)의 신지(臣智) 곧 “신치”니

역대 신치의 신수두 제사날에 신에게 고해 바쳤던 말을 모은 것인가 한다.

 

그 글 전체가 남아 있으면 혹 조선의 호머 시편이 될는지도 모를 것이나,

불행히 신지의 것이라고는

참인지 거짓 인지도 모를 진단구변도(震壇九變圖)란 이름이 대동운해(大東韻海)에 보이며,

비사(秘詞) 10구(句)가 고려사에 보이며 그밖에는 홀로 떨어져 흘러온 3구(句)가 전할 뿐이요,

 

고구려의 국가 초기에 발행된 유기(留記) 백권이니, 이문진의 신집 5권이니,

백제 고흥의 서기니, 신라 거칠부의 국사니 하는 것까지도

그 서명만 우리 귀에 남아 전하고 그 한 자(字)도 세상에 전하지 못하였다.

 

그리 된 원인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에 약론하겠지만

어디 우리 조선의 사학계와 같이 백사장이 된 사회가 있으랴.

 

그러면 우리가 무슨 서적에 의하여 고대역사를 말할까

 

 

1.3. 중국 사가(史家)의 조선에 관한 기록

 

인접국의 서적에서 탐색한다 하자.

고대 우리의 인접국 가운데 남의 일까지 적어줄 만한 문화를 가진 나라가 오직 중국뿐이요

중국의 믿을만한 역사가를 찾으려면 사마천에게 첫 손가락을 꼽을 터이나,

 

그러나 사마천은 먼 다른 나라인 이집트와 바빌론의 역사를 충실하게 채록(採錄)하던

그리스의 헤로도투스 같은 사가(史家)가 아니요,

 

공자의 춘추필법인

존화양이(尊華攘夷: 중국은 높이고 타국은 내리 깎는다),

상내약외(詳內略外: 중국 안의 일은 상세하게, 외국의 일은 간략하게 기록한다),

위국휘치(爲國諱恥: 나라를 위하여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등의 주의(主義)를 견고하게 지키던

완고한 유학자이다.

 

그러므로 조선을 중국의 일부인 절강(浙江)지방과 똑같이 보고

사기에 조선양월(朝鮮兩越: 조선과 동월 남월)을 하나의 열전으로 합하며,

 

또 그 조선전이란 것이 조선사(朝鮮史)가 아니요

다만 연(燕)과 제(齊)에서 흘러들어온 도둑들의 수령(首領) 위만이 조선을 침략한 기록일 뿐이며,

 

조선이 연과 전쟁한 큰 사실 같은 것도 흉노전에 동호란 이름아래 기록하여,

만일 위략이 아니면 조선의 일도 알 수도 없게 되었다.

 

반고가 지은 한서의 조선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의 것을 베껴서 옮겼을 뿐이며,

범엽이 지은 후한서의 조선에 관한 기록(동이전)은 삼국지의 것을 베껴서 옮기고 거기다가

망령되게 고친 것이다.(제3절에 상론)

 

만일 조선사(朝鮮史)의 재료될 가치가 있는 것을 구하면 위 두 책의 것은 모두 털끝마한 가치가 없고,

 

오직 위말진초(조조의 위나라 말기와 진나라 초기)의 사가(史家)인 진수의 저작 삼국지는

부여 고구려 등의 관제(官制), 풍속과 삼한 70여개국의 국명과 기타 모든 것을 약술(略述)하여

중국사에 붙어있는 조선 기록중에서 가장 칭찬할 만한 것이며,

 

진수와 같은 시대 사람인 왕침의 위서에는 단군의 이름 왕검을 적었으며

어환의 위략에는 대부 례, 조선왕 부, 조선왕 준의 약사(略史)를 적어서

 

근세의 동국통감, 조선사략 등에 보인 기부 기준 삼한 78국 명 등이 모두 저들이 끼친 이삭을 주운 것이다.

 

그러나 위서와 위략은 이제 잃어버려서 겨우 일연의 삼국유사와 배송지가 삼국지 주(註)에 인용한 것이

남아있을 뿐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1.4. 조선인의 기록으로 중국 사책(史冊)에 초록된 삼국지의 조선 사실

 

삼국지의 부여전, 고구려전, 삼한전 등에 있는 사지(使者)는 “사리”요,

패자(沛者)는 “부리”요, 대로(對盧)는 “마리”요, 낙랑(樂浪)은 “펴라”요,

구야(狗邪)는 “가라”요, 안야(安邪)는 “아라”니,

이는 다 한자의 음의 초성이나 뜻의 초성을 가져다가 쓴 삼국시대의 이두문이요,

중국 한나라 사람이 스스로 번역한 것이 아닌즉,

 

이것이 모두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환도성에 쳐들어 왔을 때

고구려의 기록, 혹 전설을 가져다 전한 것이 있어서

삼국지, 위서, 위략 등 저자가 진귀한 조선사의 자료를 가졌던 것인가 한다.

 

다만 저들이 조선 본위의 조선사를 짓지 않고 중국사 사이전(四夷傳: 네 오랑캐 열전)

가운데 부록(附錄)으로 조선사를 지었은즉

그 기록한 바가 자연 소홀하고 간략하였을 것이다.

 

 

1.5. 삼국지의 조선에 관한 기록 전부를 신용할 수 없는 조건

 

그러한즉 삼국지 등의 서적 중에 있는 부여 삼한전 등을

고구려 사관이 기록 것과 같이 보아 진귀품으로 사랑함이 옳으나,

순전히 그렇게만 여길 수 없는 것은

 

1) 저들이 또한 중화인(中華人)인 고로 역대 중화사(中華史) 사가(史家)의 타국에 대한 병적 심리를 가져서

그 기록 중에 사실이 아닌 속임수 기록을 끼웠으니,

 

예를 들면 위략에 대진(大秦: 로마-羅馬)의 진(秦)자에 억지로 맞추어

백색 인종인 대진인(大秦人-로마인)을 중국인의 자손이라 하며,

 

진한(辰韓)의 진(辰)자 음에 맞추어

진한(辰韓)은 진나라 사람(秦人:진시황의 진나라)이

진나라(秦)의 만리장성 부역을 피하여 동쪽으로 옮긴 것이라 하여

 

이와 같은 망설(妄說)이 적지 않으니

저들의 말을 일방적으로 믿다가는 그들이 농락하는 붓에 속을 뿐이며,

 

 

2) 당 태종이 고의(故意)로 고구려를 침략하려 할새

자기 나라 신하와 백성의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중국 옛 사서(史書)에 보인 조선에 관한 문자를 거의 다 지우고 고쳐 쓴 의심이 없지 아니하니,

이는 평양 패수고에 상세히 논한 바 이어니와,

 

조선 역사상 소위 삼한 사군(三韓 四郡)의 다툼이 분분한 것은

당 태종이 글자를 지우고 고쳐 쓴 서적을 그대로 따라 믿는 것이 또한 한 원인이 되며,

 

 

3) 글자 순서가 거꾸로 된 글자, 틀린 글자, 누락된 글자, 중첩된 글자 등이 많음이니,

 

예를 들어 보이면

삼국지의 동이열전 서(序)에 “끝까지 추격하여 극히 먼 곳까지 이르렀는데 오환과 골도를 넘어갔다

(窮追極遠踰烏丸骨都)”라 하였으나,

 

고구려에는 오골성과 환도성은 있었지마는 오환성과 골도성은 없은즉,

 

대개 윗글에 오환전(烏丸傳)이 있음으로 인하여 골 환(骨, 丸) 두 자를

거꾸로 바꾸어 오골환도(烏骨丸都)를 오환골도(烏丸骨都)라 한 것이며,

 

마한전에(馬韓傳)에 “신지를 혹은 높여서 신운견지라 불렀다(臣智惑加優呼臣雲遣支)”라 하였으나

신(臣)의 음은 신이니 신소도(臣蘇塗), 신분활(臣濆活) 등의 신(臣)과

진한(辰韓), 진왕(辰王) 등의 진(辰)과 같이 모두 태(太)의 뜻이요 견지(遣支)는 “크치”라.

 

그 뜻이 대형(大兄)이니 “신크치”는 곧 태대형(太大兄)인즉,

신운견지(臣雲遣支)의 운(雲)자는

곧 아래글의 신운신국(臣雲新國)의 운(雲)자를 중첩하여

신견지(臣遣支)를 신운견지(臣雲遣支)라 한 것이며,

 

진한 변진전(辰韓弁辰傳)의 진변 24국내에 군미(軍彌) 마연(馬延) 양국을 중첩하여 26국이 되었다.

 

이상의 것은 다 윗글과 아래글에 의하여 발견할 수 있는 것이거니와,

이외에 발견할 수 없이 된 잘못 전해진 글자, 틀린 글자, 순서가 거꾸로 된 글자,

누락된 글자도 적지 아니할 것이다.

 

이것도 연구상 일대 장애라 할 것이다.

 

 

 

1.6. 삼한에 관한 기록

 

삼한은 역사이래 사가(史家)의 논쟁이 되어오는 여러문제 중 하나인 동시에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곤란한 문제다.

 

이제,

1) 서적을 선택하여 선배 유학자와 근래 사람이 한(韓) 혹 조선(朝鮮) 등의 글자가 보인 글이면

모두 인용서로 보는 폐단을 제거하며

 

2) 선택한 서적 중에서 다시 그 진실된 기록과 터무니없는 기록을 분간하고 속인 기록을 바로잡은 결과

 

삼국지, 위략 등으로 주(主) 자료로 하고,

사기의 흉노전, 봉선서, 조선열전으로 부(副) 자료로 하며,

국어, 관자 등으로 연구의 보조 자료를 삼아서 전후 삼한고를 논술하려 한다.

 

 

 

2. 전삼한(前三韓) 삼조선(三朝鮮)의 전말(顚末: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위)

2.1. 삼한의 소자출(所自出: 기원)

 

무슨 증거로 전삼한(前三韓)이 있다 하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원년에 “이에 앞서 조선유민들이 산골짜기 속에 나뉘어 살았는데.....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是爲辰韓六部)”라 하고

 

38년에 “진한의 유민부터... 두려워 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自辰韓遺民…無不畏懷)”라 하고,

 

위략 삼한전에 “진한...그들은 [외지(外地)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馬韓)의 제재를 받는 것이다(辰韓…明其爲流移之人故爲馬韓所制)”라 하고,

 

삼국지 삼한전에는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은 대대(代代)로 전(傳)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秦)나라의 고역(苦役)를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 고 하였다.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라 하니,

避秦役(진나라 고역을 피하여) 3자는 이미 전절에 그 위증됨을 변정하였거니와,

 

기술한 바 신라본기와 삼한전의 말을 대조하여 보면,

진한은 원래 북방에서 옮겨와 마한이 분할해 준 땅을 받아 타향에서 뿌리박은 사람들이다.

 

삼한전에 변한(弁韓)은 없고 변진(弁辰)만 있으니

이것은 변한(弁韓) 진한(辰韓) 양국의 유민이 옮겨와 함께 섞여 살았기 때문에

변진(弁辰)이라는 이름을 얻은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면 진 변 양한의 이주민이 있기 전에

경상 좌우도가 모두 마한의 땅이었음을 볼지니,

그러면 진변 양 한(韓)의 본토는 다른 지역에서 구함이 옳다.

 

 

2.2. 삼한은 곧 삼조선

 

전(前) 삼한의 역사를 말하려면 먼저 조선이란 의의와 삼조선의 내력을 밝힐 필요가 있다.

 

1) 조선에 대하여

김학봉의 朝日鮮明(아침 해가 선명하다),

여지승람의 東表日出(동쪽 땅위로 해가 솟는다.),

안순암의 鮮卑山東(선비산 동쪽) 등 각종의 해석이 있으나,

 

이는 곧 가운데 서울(中京)의 뜻인 가우리로 이름을 지은 고려(高麗)를

산고수려(山高水麗)의 뜻으로 해석한 것 같은

후세 글하는 사람이 억지로 같다 붙인 뜻이지 본래의 뜻이 아니다.

 

관자에 八千里之發朝鮮(팔천리의 발조선), 發朝鮮不朝(발조선은 아침이 아니다?),

發朝鮮之文皮(발조선의 문피)의 등의 말이 있고,

 

사기와 대대례(大戴禮)에 있는 발숙신(發肅愼)이 곧 발조선(發朝鮮)인 동시에

조선과 숙신의 동일한 명사가 두가지로 번역된 것이 명백한데,

 

견륭제의 만주원류고에 숙신의 본음을 주신(珠申)이라 하였으니,

그러면 조선의 음도 주신이요 관할지경의 뜻이 됨이 명백하다.

 

 

2) 삼조선은 고려사에 단군 기자 위만을 삼조선이라 하였으나,

이는 역대를 구별하기 위하여 가설한 삼조선이지만

 

흘러들어온 도적의 수령, 위만이 역대의 하나됨이 가소로운 일이거니와,

이밖에 따로 실제로 있었던 조선이 있으니,

 

사기 조선열전에 ‘처음, 연나라 전성시(始全燕時)’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甞略屬眞番朝鮮)’이라 한 바,

 

서광이 가로되 진번(眞番)은 ‘한편 진막이라고도 한다(一作 眞莫)’이라 하고,

색은에는 진번(眞番)을 두 개의 나라로 증명하였으니,

그러면 진막(眞莫)도 두 개의 나라이므로

진(眞)과 번(番)과 막(莫)이 곧 3조선이다.

 

중국인이 타국의 명사를 쓸 때에 매번 문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글자 길이를 마음대로

하는 폐단이 있으므로 (불경의 번역에 이런 종류가 더욱 많은),

 

진 번 막 조선이라 쓰지 않고 혹 ‘막’자를 제거하여 진번조선이라 하고,

혹 ‘번’자를 제거하여 진막조선이라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진 번 막 3조선이니

 

진번막(眞番莫)은 곧 진변마(辰弁馬)요,

 

삼한의 한(韓)은 대(大)의 뜻과, 제일의 뜻으로 왕의 명칭이 된 것이니,

건륭의 이른바 한(韓)은 벼슬 이름이요, 나라 이름이 아니라 함이 바른 해석에 가깝다.

 

진막번(眞番莫)이나 진마변(辰弁馬)는 모두 ‘신’ ‘불’ ‘말’로 읽을 것이니,

진번막 삼조선은 기준이 남쪽으로 옮겨오기 이전, 북방에 있던 전삼한(前三韓)이니

 

진번막 삼조선은 신 불 말 세 나라의 뜻이요,

진 변 마 삼한은 신 불 말 세 왕의 뜻이다.

 

다 같이 신 불 말의 번역일 것이면

어찌하여 하나는 진번막이 되고 또 하나는 진변마가 되었는가.

 

이는 이두문 초창기 시대에 피치 못할 일이다.

 

다같이 신라 본기에 보인 쇠뿔한이지만 서불한(舒弗邯), 서발한(舒發翰), 각간(角干)의 딴 자를 쓰게 되었으며,

다같이 고구려말 “마리”지만 대로(對盧), 막리지(莫離支)의 딴 자를 쓰게 되었으니,

 

만일 직관지(職官志)에 “각간은 일명 서불한이라고 하고 또다른 이름은 서발한이다

(角干 一名 舒弗邯 又名 舒發翰)”이란 기록이 없으면

 

어찌 각간의 각(角)이 양각(羊角: 양뿔), 녹각(鹿角:사슴뿔), 장각(獐角:노루뿔) 등의 각이 아니고

오직 우각(牛角:소뿔)인 쇠뿔의 뜻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만일 김유신전에 연개소문을 대대로(大對盧)라 한 문자가 있는 동시에

고구려 고기(古記)에 개소문 대막리지라 한 문자가 있지 아니하면

어찌 대로(對盧)의 대(對)의 “마주”의 초성을 찾아서 대로(對盧)가 막리지(莫離支)와

동일하게 “마리”로 발음되는 줄을 알 것이냐.

 

동일한 신라본기와 삼국 고기(古記)로도 이와 같이 뒤섞인 어수선함이 있거든

하물며 6백년전 진개가 쳐들어 왔을 때 얻어서 전달한 전삼한(前三韓)의 이름,

신 불 말이 연나라의 사기(史記)로부터 사마천의 사기에 옮기어 진막번(眞番莫)이 되고,

 

6백년 후 관구검이 쳐들어왔을 때 주워간 후삼한(後三韓)의 이름,

신 불 말이 진변마(辰弁馬)가 됨이야 무슨 기괴하게 여길 것이 있으랴.

 

관자의 발조선은 삼조선 중의 번조선일 것이며,

설문의 낙랑번국(樂浪番國)도 번조선일 것이며,

대조영의 국호인 진(震)은 진한(辰韓)이나 진국(辰國)의 진(辰)에서,

궁예의 국호 마진(摩震)은 마한 진한에서 그 뜻을 취하였을 것이며,

송서에서는 진한(辰韓) 마한(馬韓)을 진한(秦韓) 모한(慕韓)이라 하여

그 취하여 쓴 한자가 서로 같지 아니하니,

이와 같은 것은 매번 연혁으로부터 이름의 뜻을 찾아야 할 것이다.

 

 

2.3. 전삼한(前三韓)의 명칭

 

삼조선의 명칭은 삼경(三京)에서 비롯한 것이고,

삼경(三京)은 고려사와 신지비사에 보인 부소량(扶蘇樑), 오덕지(五德地), 백아걍(百牙岡)이니,

이른바 단군 삼경이 이것이요,

 

삼경은 조선 고대 종교의 대상인 삼신으로 말미암아 설시한 것이니

삼신은 곧 고기(古記)에 보인바 환인, 환웅, 왕검 등 삼신이다.

다만 그 고기(古記)가 불교도에 의해 선정 편집한 것이므로

 

가슬라를 가섭원으로, 비처왕을 소지왕으로,

기타 모든 명사를 불서(佛書)의 것으로 망령되게 고쳤듯이

환인 환웅의 양 명사는 법화경의 석제환인이나 석가의 별명인 대웅에 맞추어 개작한

이름이요 본래의 명칭은 아니다.

 

사기 봉선서에 “삼일신이란 천일 지일 태일이다(三一神者天一地一太一)……

삼일중에 태일이 최고 귀하다(三一之中太一最貴)……

오제란 태일을 돕는 자이다(五帝者太一之佐)”라 하니 천일, 지일, 태일은 곧 삼신의 별명이며,

 

굴원(屈原)의 구가(九歌)에 동황태일(東皇太一)이란 가명이 있은즉

태일 등 삼신의 명이 사마천 이전부터 중국에 유행되었음을 볼 것이며,

 

“하왕(夏王) 계(啓)가 세 번 천제(天帝)를 만나 뵙고 구주의 음악을 얻었다.

<상(商)을 제(帝)의 오자로 보고 번역>(啓棘賓商九歌是歌)”의 구(句)로 미루어보면

동황태일(東皇太一)의 노래이름이 굴원 이전의 고대로부터 중국 연해 민간에 유행되었음을 볼 것이니,

 

대개 조선 고대에 산동 강소 등지에 이식한 인민, 곧 저들 역사에 이른바 구이(九夷)가

삼신의 명을 전하여 한족(漢族)이 한자(漢字)로 번역하여 혹은 노래 이름에 혹은 신앙 조목에 오름이니,

 

“신”의 역이 태(太)됨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태일(太一)은 신한의 뜻이요, 천일(天一)은 말한의 뜻이요, 지일(地一)은 불한의 뜻인 듯하니

 

신 불 말 삼한에 신한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음은 봉선서의

“삼일 중에 태일이 가장 귀하다(三一之中太一最貴)”라고 한 말의 뜻이다.

 

그리고 신한의 밑에 대관(大官) 5인을 두어 5가(家)라 칭하니 이는 5개의 국무대신이요,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 5개 부로 나누어 5가(家)가 군사와 민정 양부분을 나누어 맡고

 

때때로 각기 본도에 나가서 머물러 “사리”라 칭하니 살(薩), 사자(使者), 사리(舍利)등이

그 번역이니 사리는 출주(出駐: 나아가 머문다)의 뜻일 것이며

 

전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5인이 전쟁의 일을 분담한 5대장(大將)이 되어 “크치”라 칭하니

견지(遣支), 견지(遣智), 검측(儉側), 대형(大兄) 등이 그 번역이니

‘크치’는 대장의 뜻일 것이다.

 

다섯 신(臣)이 신한을 보좌함은 봉선서의

“오제란 태일을 돕는 자이다(五帝者太一之佐)”의 뜻이니,

이는 머나먼 옛날에 미신의 신계(神界: 신의 세계)를 사람의 일에 응용하여

3왕 5가, 3경 5부를 관할한 삼두오비(三頭五臂: 세 머리 다섯 팔)의 관제(官制)이다.

 

그 자세한 것은 다른 날 관제고(官制考)에 따로 설명하려니와,

삼국시대의 진왕(辰王), 태왕(太王), 대왕(大王)은 다 ‘신한’의 번역이니,

고구려는 태왕의 밑에 “부리” “마리”의 좌우보를 두어 3·1을 본떠

국내 평양 한성을 3경(京)이라 하고

 

전국은 순나(順那), 소나(消那), 관나(灌那), 절라(絶那), 계나(桂那)의 5부에 나누니

이 또한 조선의 전해 내려온 형태(제도)요,

신라와 백제는 3두5비에 1비(臂: 팔)를 더하여 3두 6비가 된 것이다.

 

 

2.4. 전삼한 창립자 단군

 

최근에 간행된 동사년표(東史年表)에

“계림유사 가로되(왈) 단은 배달이고 국은 나라이며 군은 임금이다

(鷄林類事曰 檀倍達 國那羅 君壬儉)이라 하여

단군을 배달나라 임검(倍達那羅壬儉)이라고 해석하였으나,

 

계림유사는 이미 잃어버려 없어지고 오직 도종의(陶宗儀)의 설부(說郛)에 게재한

고려의 말 몇마디만 남아 있는데, 거기에 그런 말이 없으니

그 저자가 어디서 이를 인용하였는지 근거가 그렇구나 하고 믿기 어렵다.

 

동사강목 고이(考異)에는

“삼국유사에 신단(神壇)의 나무 아래 내려와 호를 단군(壇君)이라 하였으나,

고려사 지리지에는 박달나무 아래 내려와 호를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동국통감에서 고려사를 좇아 단군(檀君)이라 하였으므로 이제 이를 따른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단군의 단(壇)이 원래 목(木)변의 단(檀)이 아니요 토(土)변의 단(壇)인데도,

순암 선생 같은 학문이 깊고 침착한 학자도 시비를 캐지 않고 세력을 따랐으니 괴이한 일이다.

 

삼국지 삼한전에 의거하면 마한 여러나라가 각기 별개의 읍을 설치하여 소도(蘇塗)를 세우고

하늘의 신에게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 1인을 두어 천군(天君)이라 부르며,

죄지은 자가 소도(蘇塗)의 읍에 도망쳐 들어오면 찾아서 붙잡아 가지 못한다

 

또 그 게재한 54국 가운데 신소도(臣蘇塗)란 1국이 있으니, 소도(蘇塗)는 수두로,

수두는 고어(古語)에 신단(神壇)을 가리키는 말이니, 열국의 수두는 곧 열국의 신단이요,

신소도(臣蘇塗)는 신수두니, 열국의 신단을 총 관할하는 최대 신단이 있는 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지금까지 관북(關北: 함경도) 지방에는 여러마을이 연합하여

하나의 커다란 수림을 둘러싸 금줄을 매고 그 이내를 신단이라 칭하여 대제(大祭)를 행하니,

비록 예전과 지금 사이에 변천이 없지 못할 것이나 오히려 그 의식의 한 단면을 전한 것이다.

 

대개 단군왕검이 이와 같은 수림의 신단, 수두 아래에 출현하여

시대의 방편을 따라 삼신오제(三神五帝)의 신계(神界:신의 세계)를 설파하며,

자기가 곧 3신의 1인 신한의 화신이라 칭하고

조선이라 부르는 초기 형태적 국가를 건설함이다.

 

그 신단이 토축(土築)이나 석축(石築)이 아니요 자연한 수림의 신단인 까닭에,

토(土)변의 단(壇)을 써서 단군이라 하지 않고

목(木)변의 단(檀)을 써서 단군이라 한다 하면,

이는 자단(紫檀), 백단(白檀)의 박달나무 단(檀)이 아니라

새로 글의 뜻을 내어 “수두나무 단(檀)”이라 함이 옳은 것이다.

 

흉노전에 보면,

흉노는 제단 있는 곳을 휴도국(休屠國)이라 하니, 휴두는 곧 수두일 것이요,

또한 수림의 제단이므로 한인(漢人)이 이를 룡성(蘢城) -위청전(衛靑傳)-이라 하고

후에 와서 쓰기 편하게 초두를 제거하여 용성(龍城)이라 하였으니

사기 한서 후한서 진서 등에 보인 모든 용성(龍城)이 이것이다.

 

흉노도 조선의 민족과 원래 근원이 같거나 그렇지 않다면

태고의 혹 동일한 치하에 있던 시대가 있었던 듯 하다.

 

어떤 때는 신수두로서 3조선 전 영토의 명칭을 삼은 까닭에

신지(神誌)의 진단구변국도(震壇九變局圖)가 있음이니,

진단의 진(震)은 신수두의 신의 음이요

진단의 단(壇)은 신수두의 수두의 뜻이다.

 

왕검은 왕(王)의 반쪽 뜻을 취하여 “님(님금 중에서 님)”을 취하고

검(儉)의 모든 음 “검(금)”을 취하여 “님금(임금)”으로 읽는 것이니,

 

혹 왕(王)자가 이미 님금의 뜻인데 어찌하여 반쪽 뜻만 취하였는가 하겠지만,

 

삼국사기 소지(紹智)의 주(註)에 “한편 비처라고도 쓴다(一作毘處)라 함을 보면

소(炤)가 이미 ‘비치’라는 뜻인데 구태여 지(智)자를 가하여 ‘비치’로 읽음과 같은 것이니,

삼국사기 중에 이와 같은 예를 찾으려면 심히 많으나 번거롭게 열거하지 아니한다.

 

조선 1세 건국자의 이름이 “님금”인 고로 역대 제왕의 존칭을 임금이라 한 것이니,

이는 기괴한 중국 주공(周公)의 휘명법(諱名法: 군주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고 피하는 법)이 수입되기 이전의 일이며,

 

님금은 신단 제사 주관자의 칭호이고, 신한은 정치적 원수의 칭호이나,

 

이때는 신단 제사 주관자가 곧 정치의 원수가 되는 때인즉

임금이 곧 신한의 직권을 같이 가졌을 것은 물론이다.

 

혹은 말이 인도(印度) 범어(梵語)의 스투파(stupa)가 조선에 들어와 수두가 되고

일본에 들어가 소도바가 되고 중국에 들어가 탑(塔)이 되었다 하니, 이것도 일종 참고할 말이 되나,

그러나 한두개의 우연한 일치로써 그 유래를 판명함은 너무 성급한 논의라 할 것이다.

 

그리스 역사를 읽으면 중앙에 큰 델피신전(神殿)을 가진 델피 국(國)이 있고,

열국에 각기 작은 델피의 신전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조선의 신수두와 같지 아니한가.

 

페르시아 역사를 읽으면 전국을 통제하는 대왕이 있고

대왕 아래에 여러 소왕(小王)이 있었다 하니,

이것이 삼국시대 태왕의 아래에 각 소왕(小王)이 있음과 같지 아니한가.

 

서양 중세 역사에 예수교의 무사단(武士團)에서 부인(婦人)으로서 교사(敎師)를

삼았다 하니, 이것이 신라의 원화(源花)와 같지 아니한가.

 

이집트 고대에 태양일(太陽日)의 수인 360여개를 쓰기를 좋아하여

나일강의 본명에도 360여란 의미가 있다 하니,

단군고기의 “농사와 수명, 형벌, 선악을 주관하였으니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주관하였다.

(主穀主命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事)”와

여지승람에 기록된 묘향산 고적의 “삼백육십여궁(三百六十餘宮)”이 또한 그와 같지 아니한가.

이는 모두 본론의 범위가 아니라 일단 그만두거니와,

 

역사는 시대와 경우를 따라 성립하는 것이니 비록 번거롭고 자잘한 미신의 기록이지만

수두와 신수두의 교의(敎義)에서 나온 3경 5부의 건설된 원인을 알아야

삼조선 옛 역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위와 같이 대강 진술하였다.

 

 

2.5. 전삼한 강역과 연대

 

이때까지 진술한 것은 겨우 전삼한 곧 삼조선의 존재한 실제 증거와 그 건립된 원인과

그 국가 제도의 대략뿐이어니와, 이에서 따라오는 3개 문제의 하나는 삼조선의 범위다.

 

범위에 또 두가지 구별이 있으니

첫번째는 삼조선 각자의 범위요

두 번째는 삼조선 전체의 범위다.

 

첫번째의 구별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만주원류고에 요동의 번한현(番汗縣)을 변한(弁韓)의 옛 땅으로 지정한 것이 이치에 가깝다.

대개 삼조선중에 불한의 관할 지경이 가장 중국과 가장 가까운 까닭에

발조선이란 명사가 가장 먼저 중국인의 서적에 보인 바이다.

 

연왕 희(燕王 喜)가 조선을 침략하여 영평부의 노룡현(盧龍縣)을 요서라 하고

그 이동을 요동이라 칭하였은 즉,

 

불한의 서울이 당시에 안쪽으로 옮겼으나(아래 글에 상세히 논함),

당초에는 요하 이서와 개원 이북이 모두 번조선의 옛 땅 이었을 것이며,

 

후삼한중 변진 양 한은 옮겨온 것이나 마한은 본토에 있던 것이니,

마한의 전신인 막조선은 알기가 쉽다 할 것이나, 다만 위만의 난에 임진강 이북을 전부 잃었으니

그 본토의 전체로 말하면 대개 압록 이동이 모두 그 옛 땅 이었을 것이며,

 

신한의 옛 땅은 가장 밝혀내기 어려우나,

신한은 임금의 겸임(兼任)인즉 왕검성 즉, 지금 해성현(海城縣)이 그 서울이라 하면

요동반도와 길림 등지가 곧 신한의 부분인 진조선(眞朝鮮)의 옛 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조선이 구별이 명확한 각별한 국가가 아니요 다만 신한의 통치하에 약간의 구별을 가진

국가가 될 뿐이다.

 

동국강목의 “단군의 강역은 북으로 흑룡강에 이르고 남으로 조령에 이른다.

(檀君疆域北至黑龍江南至鳥嶺)”가 삼조선 전체의 강역이 될 것이나

흑룡강 조령 등은 고대 명칭이 아닌즉 옛 사서(史書)에서 나온 기록이 아니요

후세 사람의 억설(억측 설)이다.

 

그러나 후삼한의 진변(辰弁)이 옮겨오기 이전에는

조령 이남이 거의 황폐하여 사람의 거주가 없었을 것이니, 강목의 억설이 대개 이치에 가까우며,

 

문헌비고에 고죽(孤竹: 영평부)이 춘추 이후에 조선 소유가 되었다 했으나,

이는 백이를 한족(漢族)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그 본국인 고죽을 한족(漢族)의 나라로 인식한 것이다.

 

건륭의 도서집성에는 고죽을 북이(北夷)의 하나라 하였으니,

이(夷)가 비록 막연한 명사이나 한족(漢族)이 아님은 명백하니,

진개의 전쟁 이전에는 고죽이 조선의 일부이던 것도 명백하다 할 것이며,

 

사기 흉노전에 ‘상곡 밖을 향한 나라는 동으로 예맥조선과 접한다

(直上谷以往者東接濊貊朝鮮)’이라 하였은즉

조선과 중국과 흉노의 나누어진 경계를 이로써 대강 알 것이다.

 

 

3개 문제 중 두번째는 삼조선의 연대다.

 

지금 사람이 보통 조선 건국부터 전 갑자前甲子(서기 1924년)까지 4257년이라 하니,

왕검 이후로부터 동, 북부여 분립 이전까지 그 사이 막막한 긴 세월의 사적(史蹟)이 전부 없어지다시피 하였는데,

 

이것을 어디서 고증하였는가 하면,

고기(古記)에 “단군은 요와 나란히 무진년에 건국하였다(檀君與堯竝立於戊辰)”이라 한 것을 근거로 하고

소강절의 황극경세서(邵康節皇極經世書)에 있는 당요(唐堯)이래 연대표에 의해 정한 연조라.

 

그러나 황극경세서에 적힌 연대를 믿을 것이냐.

 

사주보는 사람이 남의 미래에 대해 몇 세에는 어떨 것이고 몇 세에는 어떨 것이라는 등

향년 1세부터 70세, 80세까지 내지만, 그 향년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니,

 

중국 연대를 사마천 사기에 주소공화(周召共和)로부터 연표를 비롯함은

그 이전 역대 연도를 알 수 없는 까닭이어늘

 

소강절이 자기의 자랑하는 사주풀이로(象數學-상수학으로) 아무 증거도 없이

상(商)이 기백 기십세(幾百幾十歲), 주(周)가 기백 기십세,

심지어 모 제(某帝)는 재위 약간세, 모 왕은 재위 약간세…… 등

고대 국가와 고대 제왕의 사주를 내었으니,

 

이러한 것으로 실증을 삼아 중국 연대 중 당요(唐堯)의 기원에 대조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려고 함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고구려의 기록으로부터 전한 위서의

“이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往在二千歲有檀君王儉立國阿斯達)”가 본문의 전부를 잃고

오직 십수 자(十數字)의 끊어진 구절로 전한 즉

이를 준거하여 믿을 만한 확실한 가치가 있고 없음을 모르나,

 

오히려 조선의 고기(古記)라 한 즉

고구려로부터 그 이전 2천년이면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4천년 내외이니,

이와 같은 대체적인 숫자나 기억함이 옳으며,

 

기자도 황극경세서의 주 무왕 연대와 대조하여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몇 년이라 하지만,

무왕 연대도 또한 당요의 연대와 같으며,

 

기씨 선우씨의 족보에 인하여 기자를 태조 문성왕이라 하고,

그 이하 마한까지의 시호와 역년이 상세히 갖추어 있으나,

 

태조 문성 등의 시호가 먼 옛날 상고시대에는 있지 아니하며,

혹은 후왕의 추숭(추존)이라 하나 조선에서 시호법을 씀이 삼국 말엽에 비롯하였거늘,

 

이제 그 이전에 마한 때에 시법(시호법)이 있었다 함도 성립하지 않는 설이니,

기자는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3천년 내외에 조선에 건너온 인물로만 앎이 옳다.

 

 

3개 문제 중 세번째는 조선의 흥망, 변천한 사적이다.

이는 재료가 연구의 여지를 주지 않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나

이 문제를 또한 둘로 나누니

 

(가) 단군과 기자의 대체(代替 -바꿈), 즉 기자가 일개 중국 망명객으로 조선에

들어오자마자 어떻게 단군을 대신하여 왕이 되었는가의 문제이다.

 

단(壇)은 수두요, 수두는 고대의 조선 전체를 총칭한 이름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그때 제왕은 오직 제1세 왕검과 제2세 부루가 고기(古記)에 보일 뿐이요,

기자와 그 후예라고 운운하는 조선왕 부(否), 조선왕 준(準)은 조선사략에 보였으나

 

사실 기자의 일은 사기, 한서와 소설류의 삼재도회에서, 부와 준의 일은 위략에서 베껴온 것뿐이다.

 

 

이조(李朝) 이전의 조선인의 붓으로 쓴 기자의 사실은 겨우 삼국유사에

“단군(壇君)…피기자(避箕子)”의 십수 자(字)이며,

삼국사기에 “기자수봉어주실(箕子受封於周室: 기자가 주 왕실로부터 봉해졌다)”의 7자가 쓰였으니,

이것은 사기에 적힌 것을 베낀 것이다.

 

그러나,

신라 말의 유일무이한 중국 숭배자로 제왕연대력을 쓴 일종의 사가(史家) 최치원도

일찍이 한 마디 말도 기자에게 미침이 없음은 어찌된 일이며,

 

위서(魏書)에 단군왕검을 기록하였는데 그와 동시대의 저작인 삼국지와 위략에는

왕검을 빼고 기자만 기재하여 부여 고구려 등의 문명(文明)을 기자에게 공을 돌렸음은

어찌된 일이며,

 

유사(遺事: 삼국유사)의 말과 같이 단군이 왕에서 물러나 그 지위를 기자에게 주었다 하면

신단수림(神壇樹林)의 권위가 이미 쇠퇴하여 죽은 징후일텐데,

기자 이후 천여 년에 해모수 해부루 고주몽이 모두 단군 혹 단군의 아들이라 칭함은 어찌된 까닭이며,

 

또는 삼국 초엽까지 조선 전체를 진단(震壇)이라 칭하는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어찌된 까닭인가.

 

중국사에 조선에 관한 무슨 말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조선사 어느 책장에 집어넣고,

만일 저들과 우리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면, 자기의 추측으로 한 두자를 개정 혹 첨부하여,

없는 사실을 날조함은 역대 사가의 관습이니

유사(遺事: 삼국유사)에 단군...피기자(檀君…避箕子: 단군이...기자를 피하여)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명백한 반대의 증거가 없는 이상에는

일종의 의문으로 고대의 기록을 깨치지 못할 것이니,

아직 특별한 발견이 있기 전에는 기씨 연대를 그대로 두고 볼 것이다.

 

 

(나)는 삼조선의 결국 즉 삼조선이 일시에 공멸하였느냐 하는 문제다.

 

사기 조선전에 “처음 연의 전성시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始全燕時嘗略屬眞番朝鮮)”이라 하니, 이것이 아마 삼조선의 최후일 것이다.

 

이는 곧 진개가 쳐들어와 만반한(滿番汗) 이북 2천리를 전부 잃어버린 때의 일이다.

만번한은 곧 한서 지리지에 보인 문한, 번한의 양 현이요,

번한은 전술한 만주원류고에 이른바, 변한의 옛 땅, 즉 불한의 서울이다.

 

근세의 선배 유학자들이 2천리를 틀리게 증명하여 만번한을 대동강 이남에 와서 찾았으므로

졸저 ‘평양 패수고’에 이미 명백히 변증(辨證)하여

지금 대동부부터 열하(熱河) 등지(等地)를 지나 요동까지 2천리임을 논술하였으니

여기에 다시 두 번 기재치 않거니와,

이는 삼조선 건국 이후 미증유한 대외 전쟁의 실패며 삼두(三頭)정치 붕괴의 동기가 됨이다.

 

신조선이 붕괴하여 삼국이 되니,

 

그 하나는 흥경현(興京縣), 환인현(桓仁縣) 등지로 들어가 불조선 유민과 연합하여 진번국이 되고,

또 하나는 경상우도로 들어와 변진국이 되니,

 

전자(前者)는 신조선 유민이 주가 되고 불조선 유민이 부가 되어 진번이라 이름하고,

후자(後者)는 불조선 유민이 주가 되고 신조선 유민이 부가 되어 변진이라 이름함이니,

이는 대개 인구의 많고 적음에서 앞뒤 차례를 정한 이름인 듯하고,

 

다른 하나는 단순한 신조선 유민들이 경상좌도로 건너가 진한 6부를 건설하니

이 가운데 진한과 변한은 다 마한이 남쪽으로 옮긴 뒤의 일이라,

다음 절 후삼한고에 상세히 기술하려 한다.

 

신불 양조선의 또 일부 뒤에 온 인민이 연나라 도적 위만에게 붙좇아 위만조선이 성립하니,

 

위만전에 이른바 “진번조선과 만이(蠻夷)들을 부려 복속시켰다.(役屬眞番朝鮮蠻夷)”와

“그 주변의 소읍들을 쳐서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이 모두와서 복속하였다

(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가 이를 가리킴이다.

 

말조선은 신 불 양조선의 대패 멸망한 끝에 홀로 진개의 방어에 성공하여 조선이란 이름을 보전하고,

또 조선왕 부는 진시황의 중국 통일 후 만리장성의 위엄의 불꽃에 온 천하를 전율케 하는 때에

정예병을 뽑아 요새를 지켜 조그만 강산이라도 지키려함 이었다.

 

그러나 못난 자식 준이 왕위를 이어받아 위만을 신임하여 서쪽 변방를 떼어주어 국가방위와

수비를 허락하다가 마침내 거꾸로 공격을 당해 남방으로 달아나 조선이란 이름을 버리고

다만 말한이라 칭하니,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이른바 마한이니,

마한 진한 변한은 다 전삼한 후신으로 남방에 다시 설치된 삼한이다.

 

이를 내가 이름을 지어 후삼한 혹 남삼한이라 정하고

그 상세한 설명은 다음 절 삼한고에 보인다.

 

 

 

3. 후삼한 – 삼국지에 보인 나가제(羅加濟:신라, 가야, 백제) 삼국

3.1. 후삼한 고증에 대한 선배 유학자의 오류

 

한구암(한백겸) 안순암(안정복) 정다산(정약용) 한대연 등 여러 선생이 비록

전삼한의 존재한 것을 인정치 못하였으나

 

진변마(辰弁馬) 삼한을 곧 신라 가라 백제라 하여

최고운(최치원)의 나여제(羅麗濟: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에

분배한 삼국설을 깨뜨려 후삼국의 강역을 정돈한 공은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중에도 후에 태어난 나의 교정을 기다리는 다소 오류가 없지 않으니,

그 제반 오류가 이하에 열거한 3가지의 대(大) 오류에서 원인한 것이다.

 

 

(가) 참고서의 오류니,

범엽의 후한서 동이열전은 곧 진수의 삼국지 동이열전을 베낀 것이니, 그 실례의 하나를 들어 보인다.

 

삼국지 동옥저 전에

왕기(王頎)가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궁을 추격, 동쪽 경계의 끝까지 갔다.

그곳에 사는 노인에게, “바다의 동쪽에 또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물었다..

(王頎别遣追討宫盡其東界問其耆老海東復有人否) …』

 

“또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에 떠올라 있는 베옷 입은 사람을 건졌는데, ..(說得一布衣從海中浮出) 』

“두 소매 길이는 3장(丈)이었다. ....(兩袖長三尺) …』

그 사람의 목부분에 또 얼굴이 있었다.(一人項中復有面)...』라 한바,

 

왕기(王頎)는 조위(曹魏:조조의 위나라)의 장수요,

궁은 고구려 동천왕의 이름 위궁의 약자인즉,

다 후한 이후의 사람인 고로 왕기 이하 13자를 삭제하고

고구려 노인이 스스로 말한 것으로 만들어 삼국지의 것을 베껴 기록하였다.

 

이 같은 사적 가치없는 요괴담의 베낀 기록이야 우리에게 무슨 관계가 있으랴마는,

베낀 기록뿐이면 오히려 괜찮으나,

 

이제 중대한 기록을 고쳐 삼국지에는

『준...그의 근신(近臣)과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준(準)의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인(韓人)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準…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準後絶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라 하였거늘,

 

후한서에는

『준...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準…將其餘衆數千人徒入海攻馬韓破之自立為韓王凖後滅絶馬韓人復自立為辰王)”이라 하였다.

 

진수(삼국지의 저자), 어환(위략의 저자), 왕침(위서-魏書의 저자,

지금 전해지는 위서-魏書:북위서는 북제-北齊의 학자 위수-魏收가 편찬했다) 등은

다 관구검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검(관구검)이 가져간 고구려의 기록을 얻어 본 사람들일 것이니,

엽(범엽: 후한서의 저자)의 고친 편찬이 어찌 미친 열거가 아니랴.

 

그런데 선배 유학자들은 다만 후한(後漢)이 삼국(三國)의 전(前) 시대인 것만 알고

후한서 저자 범엽이 삼국지의 저자 진수의 후(後)인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던지,

매번 후한서에 보인 삼한으로 주요 재료를 삼고 삼국지는 도리어 보조로 인용하였다.

 

 

(나) 편신(偏信: 한쪽말만 치우치게 믿음)의 오류니,

 

당 태종이 중국 옛사서(古史)중에서 조선에 관한 기재를 멋대로 삭제 혹은 위조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기술하였거니와,

 

그뿐 아니라 당 태종의 백여 년 후 당 덕종때의 가탐(賈耽)은 소위 사이(四夷)연구의 전문가로서

더욱 조선과 중국관계를 잘 아는 자이었는데, 그 저서 사이술(四夷述)의 서(序)에

 

“현도 낙랑은 한 건안 때(196~219)에 함락되었다.(玄菟樂浪陷於漢建安之際)”라 하여

2군이 고구려에게 함락됨을 한탄하였거늘, 이제 후한서에는 그와 비슷한 말도 없고,

삼국지에는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았다 할 뿐이며,

 

또 위 명제(魏明帝: 조예-曹睿)가 대방태수 유흔(劉昕)과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 2군을 정벌하였다 하여 대방 낙랑이 일찍이 공손연(公孫淵)에 함락되었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대방이 현도가 아니며 공손연이 고구려가 아니니

이것을 곧 가탐의 말한 바로 간주함이 불가하니,

 

그러면 진수, 범엽 등이 종족적 편견으로 현도 낙랑을 공략당하여 잃어버린 대사(大事-큰일)를

빼버린 것이 아니면 곧 후세 사람이 멋대로 삭제한 것이다.

 

또 삼한전에

“부종사 오림은 낙랑군이 본래 한국을 통치하였다고 생각하고는 진한(辰韓) 팔국(八國)을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넣으려 하였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틀리게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

신지(臣智)와 한인(韓人)들이 모두 격분하여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방(帶方)]태수(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遵)은 전사하였으나 이군(二郡)은 마침내 한(韓)을 멸(滅)하였다.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라고 하였으니,

 

아래 글에 의거하면 진한의 전체 나라 수가 12국인데

윗 글에 나오는 삼국지에 의하면 진한 8국을 빼앗아 4국만 남겨두었다가

후에 그 4국까지 멸망시켜 진한 전부를 멸망시켰다고 함이니,

그러면 (진한에서 나온) 신라 왕국은 어디에 존재하였던가.

 

그런데 선배 유학자들은 매번 고기(古記)의 여기저기에 있는 문자는 다 버리고

오직 후한서 삼국지 등을 의거하여 옛 일을 단정하려 하였다.

 

 

(다) 해석의 오류니,

진한(辰韓), 진왕(辰王) 등의 진(辰)과

신소도(臣蘇塗), 신분활(臣濆活), 신지(臣智), 신견지(臣遣支), 신운신(臣雲新) 등의 신(臣)은

그 음이 모두‘신’인데

 

원(元: 으뜸)의 뜻이요 총(總:모두)의 뜻으로

삼국시대 사람들이 이를 태(太: 크다)라 번역한 것이며,

 

비리(卑離)는 불이니 평지(平地)의 뜻이요 도회(都會)의 뜻으로,

백제 지리지의 부리(夫里), 부여(扶餘) 등이 다 같은 음 같은 뜻이며,

 

구야(狗邪), 안야(安邪), 미오야마(彌烏邪馬) 등의 야(邪)는 다 그 음이 라니,

가락(駕洛)의 락(洛)과 가라(加羅)의 라(羅)가 같은 음 이어늘

선배 유학자들이 이두자의 해석을 몰랐으며,

 

“기준이...바다로 달아났다(準…入海)”는 곧 조선 남방을 가리킨 것이니,

중국인이 고대에 도(島: 섬)나 반도(半島)를 모두 해(海: 바다) 혹은 해중(海中)이라 한 고로

조선에 응용한 것이니, 한서에 “조선은 해중에 있다...(朝鮮在海之中越之象是也)“와

박물지(博物誌)에 “연을 치던 조선인들이 달아나 바다로 들어갔다(伐燕之朝鮮亡入海)]” 등에서 볼 수 있거늘,

선배 유학자들은 매번 준(準)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남쪽으로 달아났다.(浮海南奔)”로 인식하였다.

 

 

제1로 인하여(참고서의 오류로 인하여) 오류가 생긴 것이 또 둘이니

 

1, 마한은 전후 삼한을 통하여 기씨 하나의 성(箕氏一姓)-부(否)와 준(準)을 기자(箕子)의 후예라 하면- 뿐이어늘

   선배 유학자들이 후한서에 근거하여

  

준(準: 준왕, 기준)이 공격하여 파괴하기 이전의 마한을 원유(原有:원래 있었던)의 마한이라 하고,

공격 파괴한 마한을 기씨의 소유한 마한이라 하고,

진왕이라 자칭한 마한을 기씨가 끊어진 뒤의 마한이라 하여

3개의 마한으로 나누며

 

 

2, 선배 유학자(先儒-선유)의 말에

중국 21사의 조선열전이 모두 당대(當代) 병립한 인접국(隣國)을 기재한 것인즉,

후한서나 삼국지의 삼한도 곧 중국 후한과 삼국시대에 있었던 신라 가야 백제 삼국이요,

그 백년 혹 천년 전의 삼한이 아니라 하였다.

 

이것은 역대 사가(史家)가 후한서와 삼국지에 보인 사실을

나가제(羅 加 濟: 신라 가야 백제) 삼국 이전에서 찾으려고 한 미련한 짓을 갈파한 것으로

실로 천번 만번 확실한 견해라 할 것이다.

 

다만 후한서로 인하여 마한을 3개로 나누어 진왕의 마한을 최후의 마한으로 한 것으로 인하여

이에 백제를 어디에 둘 곳이 없으므로 드디어 백제본기의 온조가 마한을 멸한 사실을 부인하고

진수와 범엽이 책을 쓰던 때, 즉 백제 건국 2백년 후 까지도 마한이 따로 존재하였음을 주장하여

 

상상으로 꾸며낸 글로 전시대에 이미 망한 마한의 2백년 수명을 연장하고,

그리하여 진변(辰弁) 양한을 신라와 가라로 인정하는 동시에

백제만 삼한권 밖으로 축출하여 연대와 사실의 대착오를 이루었다.

 

 

제2로 인하여(한쪽말만 치우쳐 믿는 오류로 인하여) 오류가 생긴 것이 또 둘이니

 

1, 진한(辰韓)을 ‘진나라 사람이 부역을 피한 사람’ 이라고 한 망령된 증명은 이미 변론하였거니와,

이전 학자들은 진수 범엽 등의 기록을 신용하여 드디어 신한을 중국인의 자손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그러면 어찌하여 진한에 중국인의 언어 문자와는 비슷도 아니한 사로(斯盧), 기저(已祗), 불사(不斯) 등과 같은

나라의 이름이 있느냐의 의문이 있으므로,

 

이에 해동역사 지리고에는 진한의 이름은 ‘진나라 사람이 부역을 피해 동쪽으로 온 사람들’때문에 나고,

6부의 이름은 위만의 2세인 우거의 신하와 백성들이 이주한 뒤 시작한 줄로 말하였다.

 

그러나 이같이 진한(辰韓)을 “진인(秦人:진-秦나라 사람)이 이주한 한국(韓國)”이라 풀이 한다면,

 

삼국사기 혁거세 원년에

“진인(辰人: 진한-辰韓 사람)은 바가지(瓠-호)를 박(朴)이라고 하였다.(辰人以瓠爲朴)”,

“거서간은 진한 말(辰言)로 어른을 일컫는 말이다(居西干辰言長者之稱)”의 진(辰)은

모두 진인(秦人:진나라 사람)이란 진(秦)일 것이나,

 

어원학상으로 고찰 연구하여도 ‘박(朴)’이나 ‘거서간’이 결코 고대 중국인의 언어가 아니었다.

 

 

2, 삼국지에는 “(조선)후 (기)준이 왕이라 참칭하였다(侯準僭號稱王)”이라 하여

기자 자손이 대대 후작(侯爵)으로 오다가 준(準: 기준)에 이르러 비로소 칭왕(稱王)한 줄로 말 하였다.

 

그러나 위략에는 “조선 후는 주나라가 쇠약한 것과 연나라가 스스로 높여 왕이라하는 것을 보고 ...

그 또한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亦自稱王)”라고 하였으니,

 

기준의 선대(先代)에서 이미 왕이라 칭한 것으로 말하였으니,

삼국지나 위략에 적힌 사실이 다같이 관구검이 전해준 바 이련마는,

오직 이 한 절이 다 각각 다름은 각기 ‘중국을 높인다’는 습관으로 사실에 위반되는 사실을 쓴 것이 명백하거늘

 

이런 옳고 그름을 논박하는 것이 없음은 고사하고

이전 학자 중 혹 진왕(辰王)의 진(辰)을 신하(人臣-인신)의 신(臣)으로 만들어

신하로써 예속한 후왕(侯王)의 뜻으로 망령되게 풀이한 자가 있다.

 

 

제3으로 인하여(해석의 오류로 인하여) 생긴 오류가 더욱 허다하니, 이제 대략 열거하면,

 

一, 진국(辰國)을 진한(辰韓)이외에서 찾아 삼한 이전에 진(辰)이란 특별한 1국이 있는 줄로 알며,

二, 진왕(辰王)을 태왕(대왕) 이외에서 찾아 진국이란 특별한 일국의 왕으로 오인했으며,

三, 따라서 진왕(辰王), 신소도(臣蘇塗) 등의 본 뜻을 몰라 삼한의 관제(官制), 풍속 등을 

    거의 다 틀리게 증명했으며,

四, 한강 남북을 갈라 북은 조선이 되고 남은 진국(辰國) 혹은 한국(韓國)이 되었다 하여

    예로부터 남북의 종족이 각별(各別)한 것으로 거짓 증명 하였으며,

五, 비리(卑離)와 부리(夫里)를 같은 음으로 보지 못하였으므로 백제 이외에서 마한을 찾았을 뿐더러

    마한 열국의 위치를 많이 엉터리 증명을 하였으며,

六, 이상과 같이 이두자를 변별하여 이해하지 못하므로

    삼한전 중에 “(진한의)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言語不與馬韓同)”거나

   “(동예 사람들은) 고구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不暗句麗言語)” 등의 기록을 과신하여

     다른 글자로 쓴 같은 이름을 발견치 못하였으며,

七, 해(海: 바다)자의 오해 같은 것은 비록 그다지 중요치 아니하나

  ‘육지 길로 해서 남쪽으로 달아났다(陸行南走)’로 인식하면

    옛 평양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평안 황해 경기 충청 등도를 지나 준(準)의 새로운 도읍지라 하는

    금마국(金馬國-익산)까지 중간 천여리가 모두 준의 신민인 고로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도망하는

    패잔한 동시행차(同時行次)가 근심없음(무탈)인 줄 알 것이며,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달아났다(浮海南走)’라 하면

   이와 반대로 육지로 행차함의 위험을 연상할 수 있어 제왕(帝王)의 옛 도읍지와 새 도읍지 중간 모든 지방이

   준(準)의 땅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도 발생할 것이다.

 

 

3.2. 중(中)삼한의 약사

윗글은 이전 학자들의 오류를 지적한 것뿐이다. 이제부터 후삼한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진번막(眞番莫)을 삼조선이라 하고 신라 가야 백제를 후삼한이라면

진번막(眞番莫) 삼조선은 이미 멸망하고 나가제(羅 加 濟) 삼국은 아직 건설되기 전에

준(準)의 마한과 진번(眞番) 양국의 유민이 건설한 진한과 변한의 양 자치부락은 무엇이라 이름할까?

 

불가(佛家)에서 전신(前身)은 이탈(已脫)하고 후신(後身)을 아직 얻지 못한,

그 중간 잠시 갖는 몸을 중음신(中陰身)이라 하니, 이것은 전후 양 삼한의 중음신이라 함이 가하나,

 

지금 다만 중삼한이라 이름하고

후삼한의 역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중삼한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중삼한의 역사를 두 단계로 나누니,

 

일(一)은 마한의 건국이다.

준이 왕검성을 버리고 금마군에 천도하여 어찌하여 조선의 옛 이름으로 국호를 삼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위만의 조선과 구별하기 위함일 것이다.

고대에 천도하면 늘 그 지방의 이름으로 국명을 삼았으니,

 

백제가 사비부여에 천도하여 국명을 곧 사비부여라 한 종류가 그것이니,

준이 금마군에 천도하여 어찌 금마국이라 칭하지 아니하였는가?

 

금마군은 삼한전 중의 건마국이니 금마군이라 함은 백제 중엽 이후 봉건제를 폐지한 뒤의

군 이름(郡名)이라.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그 군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신라 문사들이 고기(古記)를 저술(述-술)할때에 준이 금마군에 천도하였다 함이요,

 

준의 때부터 백제 중엽까지는 건마국 혹 금마국이라 칭했을 것이니,

 

준의 남천(남쪽으로 옮김) 후에 금마국의 국명을 그대로 칭하였던지는 모르겠으나

후세 사람들이 옛 사서(古史-고사)를 추가 저술(追述-추술)할 때

준의 왕위 호칭인 말한으로 그 국명을 삼은 것이다.

 

이전 학자들이 모두 금마군을 삼한전 중의 건마국으로 인식하지 않고

월지국으로 인식함은 어찌된 까닭인가?

 

이는 전술한 범엽의 “마한을 쳐서 깨뜨렸다.(攻破馬韓)”,

“마한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馬韓人復自立爲辰王)” 등의 위증(僞證: 거짓 증명)에 속아서

 

삼한전 중의 진변(辰弁) 양한은 신라와 가야로 인식하면서도

마한은 백제 이전의 마한으로 인식한 고(故)로

삼한전 중 백제에 관한 사실을 준(준왕: 기준)의 사실로 오증(誤證: 틀린 증명)하였으나,

 

그러나 “진왕이 월지국을 다스렸다(辰王治月支國)”이라 한 진왕은 백제의 태왕(대왕)이요,

월지는 백제의 위례성이니, 위례의 음이 ‘월’이 되고 성의 뜻이 지(支)가 됨이다.

 

후한서의 “마한을 쳐서 깨뜨렸다.(攻破馬韓)” 등의 설(說)을 범엽의 위증(僞證: 거짓 증명)이라 하여

준(준왕, 기준)의 천도 이전에는 남방에 마한의 명칭이 있었다 함은 그럴 듯하나,

 

그러나 삼국지의 “준.. 바다로 달아나 한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칭하였다.

(準…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은 어찌된 설(說)인가?

 

이는 윗 글의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韓在帶方之南)”를 받아서 말한 것으로

이 한(韓)의 땅에 들어와 살면서 이 땅의 왕이라 불렀다고 한 것이요,

그 이전에 한국(韓國)이 있다 함이 아니다.

 

만일 엄격하게 문구와 사실의 부합만 구할 것 같으면

윗글에 이미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辰韓者古之辰國也)”라 하였은즉

진한의 진(辰)이 진국의 진(辰)에서 나옴 이어늘 어찌된 까닭으로

 

아래글에 “노인들이...스스로 말하기를...진나라(秦) 부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에 왔는데

마한(馬韓)이 그 동쪽 경계를 갈라주어...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辰韓 … 耆老 … 自言 … 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今有名之爲秦韓)이라 하여,

진시황의 진(秦)으로 진한의 진(辰)을 만들어 위 아래글의 사실을 서로 모순되게 하였는가?

 

이미 “한은 세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마한이라 한다(韓有三種一曰馬韓)”이라 하였으면

그 아래에 마땅히 마한의 이름을 얻은 시초나 원인을 말하여야 할지어늘

 

이제 “한의 땅에 살았다(居韓地)”, “한왕이라고 불렀다(號韓王)”,

“한이 마침내 대방에 속하였다(韓遂屬帶方)”,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하였다(樂浪本統韓國)” 등의 말만 있고 마한이란 것이 없으니,

 

어찌 이같이 전후 문세(文勢: 글의 기세)가 관통치 않았는가?

그러므로 더욱 당 태종 이래로 옛 사서(古史-고사) 안에

망령된 삭제 혹은 위증(僞證: 거짓 증거)이 많이 덧붙여졌음을 볼 수 있다.

 

 

이(二)는 변진(辰弁) 양 한의 건설과 마한의 혁성(革姓: 성 바뀜)이다.

 

진한은 순전히 신한 유민의 이주자가 건설한 바이고 변진은 불한과 신한의 양국 유민의 이주자가

공동건설한 바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여기에 덧붙이고자 하는 바는 기씨의 마한이 멸망한 사실이다.

 

대개 기씨 말엽에는 남에게 토지를 떼어주다가 멸망하였으니,

(기)준이 이미 서쪽 변두리 백 리를 위만에게 떼어주고는 마침내 위만에게 쫓기어 남방에 와서 마한이 되며,

마한이 된 뒤에도 신한 이주민에게 동쪽 변경을 떼어주고

(진한전에 “그 동쪽 변경을 떼어주었다-割其東界與之”란 구절로 알수 있음),

 

또 불한 신한 양국 이주민에게 동남쪽 변경을 떼어주다가

(이는 역사에 보이지 않았으나 사리-事理로 추정하여 알 수 있음)

 

마침내 신라 혁거세가 진한과 변진을 연합하여 대항하매

드디어 동쪽 변경과 동남쪽 변경을 함께 잃었으며,

 

그리고 최종으로 졸본천의 유수한 부호의 과부 소서노(召西奴)가

그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오매

얼마만큼의 황금을 받았던지

 

미추홀, 한홀(漢忽) 등 서북 백리땅을 떼어주었다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동북쪽 백리땅을 떼어주었다-割東北百里”라 하였으나

동(東)자는 마땅히 서(西)자로 쓸 것이니 ‘동서양자 상환고’를 참조).

 

마침내 온조태왕의 가장한 사냥꾼에게 금마국이라는 타향에서 임시로 살았던 서울까지 빼앗기고

기씨(箕氏)왕조 천여 년의 운명도 이로써 마치었다.

 

이와 같이 마한은 망하여 부여씨(扶餘氏)의 백제가 되고,

진한은 기씨 망하기 전 66년에 혁거세가 이미 6부의 맹주(盟主)가 되었고,

변진은 기씨 망한 후 35년에 수로대왕(首露大王)이 6가라(加羅)의 맹주가 되니,

이곳 백제 신라 가라로 후삼한이라 칭한 바요,

후삼한이 흥하매 중삼한의 역사는 이에 일단락을 고하게 되었다.

 

 

3.3. 후삼한 나가제(羅加濟)의 역사

 

나가제(羅加濟: 신라 가야 백제)의 역사는 그 기간이 6~7백년의 역사니,

그 연대의 길이는 전삼한의 삼분의 일밖에 안되나 사적재료로 흘러 전해 내려오는 것은

서적으로만 말하여도 정밀하지 못하나마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있어,

도저히 이러한 단편으로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하고자 하는 후삼한은 순전히 진수 삼국지 삼한전에 보인

나가제(羅加濟)의 별명인 삼한에 대하여 말함에 그칠 뿐이다.

 

먼저 후삼한의 강역을 의론하면 삼국지에 기록한 삼한 70여국은

곧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인 나가제(羅加濟) 삼국의 각 주군이니,

 

다만 전자는 봉건시대의 지리를 기록한 것이므로 국(國)이라 하고,

후자는 봉건 타파 후 기록한 것이므로 주(州) 혹은 군(郡)이라 한 것이다.

 

봉건 국가를 폐지하고 주,군을 설치하는 동안에 크고 작은 합병도 있었을 것이며,

명칭과 호칭의 변경도 있었을 것이며,

또 같은 명칭과 호칭으로도 이두문으로 쓴 글자의 변경도 있었을 것이며,

 

신라 경덕왕 때 이두문으로 쓰던 지명을 한문으로 개정한 뒤 혹 옛 호칭(옛 이름)이 전하지 못하며,

혹 옛 호칭(옛 이름)의 의미를 알 수가 없이 된 자가 많아 일일이 찾을 수 없으나,

오히려 그 대략을 알 수 있다.

 

 

(가) 백제의 강역은 삼한전에 이른바 마한 50여국인데 국명은 다음과 같다.

 

해양국(奚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

유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활국(臣濆活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로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해국(古奚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비리국(占卑離國), 신흔국(臣釁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内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辟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㨗盧國), 해로비리국(奚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막로국(莫盧國), 고랍국(古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椘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해지국(奚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椘離國).

 

위 50여국의 국명(國名)중에 중복 기재한 막로국을 빼면 합이 54이니,

54의 국명(國名)을 삼국사기 백제 지리지의 주((州) 이름과 군(郡) 이름에 맞춘 뒤

다시 백제 주군(州郡)의 연혁을 고려사 지리지와 이조 8도 지명에 맞추어 본즉

 

그 가운데 비리(卑離) 등 여러나라들은

곧 백제 지리지에 부리(夫里) 등 주군(州郡)인데,

 

감해미리(監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 즉 고마성(固麻城)이니 지금 공주요,

벽비리(辟卑離)는 파부리(波夫里)니 지금 동복(同福: 현재, 전남 화순군 동복면)이요,

 

모비리(毛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 - 아牙, 사邪, 량良, 양壤, 양襄, 노奴, 나那 등 자字가 다같이 라의 음임은

이두문 해석법 참조)니 지금 고창(高敞)이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니 지금 능주(綾州:현재, 전남 화순군 능주면)요,

 

그 중에 형용적 앞글자가 없지만 비리국(卑離國)이라 한 비리(卑離)는 그 위에 비(卑)의 한 자가 탈락한 듯하니

비비리(卑卑離)는 부부리(夫夫里)로

임피(臨陂)와 옥구(沃溝) 사이의 회미폐군(澮尾廢郡: 폐지된 회미군)이요,

 

이밖에 삼한전에 내비리(內卑離), 점비리(占卑離), 초산도비리(楚山塗卑離) 등 비리(卑離)가 있고,

 

백제 지리지에 반나부리(半奈夫里), 미동부리(未冬夫里), 고사부리(古沙夫里),

고량부리(古良夫里)가 있어 숫자도 하나가 차이 나고 음도 서로 맞지 아니하니 아직 뒤에 고증으로 미루고,

 

대석색(大石索)은 대시산(大尸山)이니 지금 태인(泰仁:현재, 전북 정읍시 태인면)이요,

우휴모탁(優休牟涿)은 우소저(于召渚)니 지금 고산(高山:현재, 전북 고창군 일대) 서부의 폐군(廢郡)이요,

월지(月支)는 위례성이니 지금 한성(서울)이요,

 

지침(支侵)은 백제 지리지에 그 본위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당 도독부가 설치한 군(設郡)에 지심(支潯)이란 군(郡) 이름이 있으니

지심(支潯)은 주의 치소(州治)가 패삼(貝彡)인 고(故)로 이름을 얻은 것이요,

패삼은 신라가 여읍(餘邑)이라 개명한 바 여(餘)의 뜻이 끼침이니 지금 해미(海美:현재, 충남 서산시 해미면)요,

 

구로(狗盧)는 개리이(皆利伊)니 그 연혁이 없고,

사로(駟盧)는 사호살(沙好薩)이니 호(好)는 노(奴)의 오자인 듯한데 지금 홍성(洪州)요,

 

감해(感奚)는 금물(今忽)이니 지금 덕산(德山: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이요,

 

막로(莫盧)는 매라(邁羅)니 동성대왕 때에 위병(魏兵: 척발씨-拓跋氏) 누십만을 깨친

명장 사법명(沙法名)의 봉건국가(封國)이니,

삼국사기에 그 연혁이 없으나 백제 망후 당 도독부의 관할인즉 대개 공주 부근일 것이요,

 

구사오단(臼斯烏旦)은 구사진방(仇斯珍芳: 일명 귀단-貴旦)이니 지금 장성(長城) 동부요,

초리(楚離)는 소력지(所力只)이니 지금 옥구(沃溝)요,

건마(乾馬)가 곧 금마군(金馬郡:현재, 전북 익산시 금마면)임은 이미 전술한 바이다.

 

나머지는 아직 발견치 못하였으니 후일을 기다리려니와, 이만하여도 마한 54국의 지도를 그릴 수 있지 않은가.

 

 

(나) 다음으로 진한과 변진은 합하여 24국인데 나라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지국(已祗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늑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冉奚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악노국(弁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군미국(弁軍彌國),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여잠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마연국(馬延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중국(優中國).

 

이 가운데 군미국과 마연국이 중복 기재 되었으니 선배 유학자들의 말을 좇아

이 양국은 빼면 24의 수에 해당한다.(24개국이 된다).

 

사로(斯盧)가 신라임은 그 연혁도 명백하고, 선배 유학자들이

사(斯)는 새(新)요

로(盧)는 라(지금 말로 나라)이니 곧 신국(新國)의 뜻이라 함도 틀림 없으며,

 

구야(狗邪)는 가라(加羅)니 지금 김해(金海)며,

미오야마(彌烏邪馬)는 임나(任那)니 지금 고령(高靈)이요,

 

고자미동(古資彌凍)은 지금 고성(固城)이라 함도 선배 유학자의 정설(定說)이 있거니와,

이제 졸견으로 그 음의 뜻을 해석하여 이외 여러나라의 연혁을 찾을만한 것을 더 찾으려 한다.

 

진변(辰弁) 양한 23국 중에 미동(彌凍)으로 이름 지은 나라가 셋이니,

비록 마한의 비리(卑離)처럼 많지 못하나

 

삼국사기 지리지에 미지(彌知)로 이름 지은 군(郡)은

모두 물이 움푹 들어와(水灣-수만) 굽어진(曲) 곳에 위치한 것이니

 

백제의 고마미지(古馬彌知)는 지금 강진(康津) 해남(海南) 사이에 바다가 움푹 들어온 곳(海灣-해만)의 읍(邑)이요,

송미지(松彌知)는 영광(靈光)부근 바다가 움푹 들어온 곳(海灣-해만)의 읍(邑)이요,

 

신라의 무동미지(武冬彌知)는 비안(庇安: 지금의 경북 의성군) 북부 단밀 폐읍(丹密 廢邑: 폐지된 단밀 읍)이니

또한 단강 강만(丹江 江灣: 단강의 강물이 움푹들어온 곳)에 있었던 것이다

.

미동(彌凍)은 이두문에 대개 미지(彌知)로 읽는 것으로

동일한 물이 움푹들어온 곳(水灣-수만)의 뜻일 것이니,

 

고자미동(古資彌凍)이 지금 고성(固城)임은 이미 상술하였거니와

 

고자(古資)는 구지, 즉 반도의 뜻이니

고성이 반도인 동시에 또한 큰 바다가 움푹 들어온 곳(大海灣-대해만)에 있는 까닭에

고자미동(古資彌凍) 즉 구지미지라 이름 함이며,

 

변진미리미동(弁辰彌離彌凍)은 혹 진해만(鎭海灣)이 될 것이며

난미리미동(難彌離彌凍)은 영일만(迎日灣)이 될 것이다.

 

문헌비고에

대가야(大伽倻) 지금 고령(高靈), 소가야(小伽倻) 지금 고성(固城),

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 함창(咸昌), 아라가야(阿羅伽倻) 지금 함안(咸安),

성산가야(星山伽倻: 일운벽진가야 一云碧珍伽倻) 지금 성주(星州)라 하니

 

변진고순시(弁辰古淳是)는 곧 고령가야(古寧伽倻: 고링가라)니

함창 공갈못의 공갈은 고링가라의 와전(訛傳: 잘못 전해짐)인 듯하며,

 

변진안야(弁辰安邪)는 곧 아라가야(阿羅伽倻)니 아라는 함안(咸安) 북강(北江)의 옛 호칭인 듯 하며,

 

삼국사기 지리지의 서로 바꾸어 쓰는 글자(互用字-호용자)에 의거하여

진 미 매(珍ㆍ彌ㆍ買)의 3자가 다 ‘매’로 읽음을 알지니,

 

성산(星山)의 별메의 뜻이요, 벽진(碧珍)은 별메의 음(音)인데,

반로(半路)는 곧 ‘별’이니 변진반로(弁辰半路)는 곧 성산가야(星山伽倻)며,

 

위에 이미 기술한

미오야마(彌烏邪馬)- 임나(任那) 지금 고령(高靈)과 구야(狗邪)- 가라(加羅) 지금 김해(金海)와

고자미동(古資彌凍)- 구지미지를 합하여 6가야라 칭한 것인데,

다만 미오야마(彌烏邪馬)의 야마(邪馬)는 마야(馬邪) 두 자를 거꾸로 뒤집어 썼을 것이다.

 

독로(瀆盧)는 다산(茶山)이 거제 옛 이름(巨濟古號) 상군(裳郡)의 상(裳)은 속어에 ‘두룽이’이므로,

독로(瀆盧)는 두룽이의 음이고 지금 거제(巨濟)라 하니 대개 비슷하며

 

부사(不斯)는 부스니 곧 고어(古語)에 송(松: 소나무)의 뜻이나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며,

 

근기(勒耆)는 장기(長鬐:현재 경북 포항시 장기면)의 옛 호칭(古號)이 기립(耆立)이니

근기(勒耆)가 기립(耆立)일 것이나

양자 중 어느 하나가 글자의 순서를 뒤집어 쓴 글자(倒字-도자)일 것이다.

그 나머지는 아직 음의 위치와 연혁을 발견치 못하였다.

 

 

3.4. 후삼한의 호상(互相: 상호) 관계

 

삼한전에 진한과 변한의 정치체제(政體-정체)를 기록하여

그 중에서 12국(國)은 진왕(辰王)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馬韓)사람으로 왕(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世襲)하였으며,

진왕(辰王)이 자립하여 왕(王)이 되지는 못하였다.

(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이라 하였으니,

 

이는 사실(實)과 와전(訛)이 반씩 뒤섞인 것이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사서(書)에 쓰인 왕(王), 태왕(太王), 대왕(大王) 등은 모두 삼한전의 진왕(辰王)임과,

전삼한 시대에는 신한이 가장 높은 지위이고 말한과 불한이 보좌임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후삼한에 이르러서는 말한은 비록 쇠퇴하여 패망한 끝이나

오히려 한강 이남은 전부를 차지하여 고대의 한 대국의 위치를 가졌으므로

 

그 국호는 말한(馬韓)이라 하였지만 그 왕위 호칭은(位號-위호는) 신한(辰韓-진한)이라하여

70여국의 공동의 주인이 되었으며,

 

신한(辰韓)과 불한(弁韓-변한)은 다만 그 유민임에 의하여 이로써 그 살았던 곳의 지명을 삼아 쓴 것이요,

그 왕위 칭호인 신한은 도리어 마한에 사양한(讓-양한) 고로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혁거세부터 지증까지 거서간, 니사금, 마립간 등으로 칭하고 왕이라 칭하지 못하였는데,

마립간은 삼국사기 눌지마립간 주에 김대문이 이르기를 “마립궐야(麻立橛也)”라 하니

궐(橛)의 뜻(義)은“말”이라.

 

그러면 마립간은 말한으로 읽은 것이니

말한도 오히려 존칭이므로 초대에는 쓰지 못하고 눌지에 이르러서 4대를 쓰고

법흥때에 와서 비로소 신한 곧 대왕이라 칭한 것이다.

 

백제는 마한의 옛 땅을 근거하므로 그 국호를 마한이라 하나 그 왕호는 신한(辰韓-진한)이며,

 

신라는 진한의 유민이므로 그 국호는 진한이라 하나 그 왕호는 마한이 되어

진한 마한의 이름과 뜻이 이같이 뒤죽박죽 되었는데,

 

삼한전이 곧 관구검이 얻어간 기록과 전설을 쓴 것인즉 신라 초대의 일이니,

 

“그중 십이국은(其十二國) -진한변한(辰韓弁韓) 양 방면의 십이국(十二國) 합 이십사(二十四)국을 함께 거론한 것-

진왕에게 속했다(屬辰王)“의 일절은 사실 기록(實錄)이며,

 

신라는 그 건국 이후 항상 박석김(朴, 昔, 金) 삼성(三姓)이 서로 번갈아 (왕위를) 전승(계승)하고,

어느 때 백제인이 신라왕이 된 적이 없으니

 

진왕(辰王)은 항상 마한(馬韓)사람으로 왕(王)을 삼아 대대로 세습(世襲)하였다

(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의 일절은 와전된 기록이다(訛錄:와록이다)

 

그러나 신라본기로 보면 그 초대부터 백제와 대치하였던 듯하나

이는 신라 사관(史官)이 선대(先代)의 수치를 피하여 삭제한 것이니,

수서(隋書)에도 “신라...그 선대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다(新羅…其先附庸於百濟)”라고 적히어 있다.

 

고구려가 선비와 혈전하는 동안 백제가 강하여짐과 같이

백제가 고구려와 혈전하는 동안에 신라가 강하여짐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인 즉

눌지와 내물 이전에는 12국이 마한 진왕의 절제를 받았을 것이니

이는 삼한전의 것으로 신라본기의 결함을 보충함이 옳다.

 

 

3.5. 후삼한과 병립(竝立: 같이 있었던)한 열국(列國: 여러나라)

삼국지에 적힌 후삼한 당시의 왕국이 다섯이니

 

一, 부여(扶餘)는 불의 한자(漢字) 번역이니,

    비리(卑離), 부리(夫里), 불(弗), 발(發), 화(火), 벌(伐) 등의 번역과 같은 것이나,

    불은 나라 이름이 아닌 고로

 

조선 옛 사서에(古史-고사에) 반드시 그 위에 접두사(頭辭-두사)를 붙여

 

북부여(北扶餘), 동부여(東扶餘), 사비부여(泗沘扶餘), 졸본부여(卒本扶餘),

이릉부리(爾陵夫里), 고막부리(古莫夫里),

밀불(密弗), 추화(推火), 음즙벌(音汁伐),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여 그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각 불 중에 북부여가 가장 대국이며 중국과 교통이 잦았던 고로

한(漢) 사마천부터 북부여를 다만 부여로 칭하여 관습어가 됨이니,

 

삼국지 중 부여도 곧 북부여를 가리킨 것인데

그 수도의 위치는 하얼빈으로 삼국사기의 황룡국이 그것이며,

삼국사기 중 부여는 동부여니 삼국지의 부여가 아니다.

 

 

二, 고구려는 그 중경(中京), 가우리로 이름을 얻은 것이니,

    삼국지 중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 집안현(輯安縣)이요.

 

三, 옥저는 와지니, 삼림(森林)의 뜻이니 만주원류고에 보인 와집(窩集)이며,

고대조선 북부 사람이나 근세까지의 만주인이 그 사는 지방에 대삼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와지라 하였은즉,

삼국지에 동,북,남 삼옥저는 그 중 최대한 와지를 가리킨 것이요.

 

그밖에도 무수한 와지가 있었으니,

삼국사기에 호동(好童)이 놀러 나갔던 와지와

진서(晉書)에 나오는 의려(依慮: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부여왕 마여의 아들이 의려임) 아들이

달아나 지킨 와지는 다 삼옥저 이외의 와지다.

 

四, 읍루(挹婁)는 ‘오리’라.

‘오리’강반(오리江畔: 지금 송화강)에 의거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며,

광개강토평안호태왕(廣開疆土平安好太王)의 비문에 쓰인 압로(鴨盧)가 그것이니,

 

삼국지에 이를 숙신씨의 후예라 하였으나,

이는 그 소용 무기인 호시(楛矢:화살 만들기에 적합한 호목으로 만든 화살)와

석로(石弩: 돌 쇠뇌-화살이나 돌을 여러 개 잇따라 쏠 수 있게 만든 큰 활)가

좌씨(左氏) 국어(國語)에 기록된 숙신씨의 화살과 같은 까닭에 어거지로 갖다붙인(傅會-부회한) 말이며

 

숙신, 직신, 주신(州愼) 등은 다 고대 중국인이 조선을 번역하여 붙인 것이다.

 

읍루는 조선 최북 미개한 일부 조선족으로 삼국사기와 당서에는 읍루를 말갈이라 하였으니,

말갈은 읍루의 별명인데 그 음의 뜻은 아직 고증치 못하였다.

 

 

五, 예(濊)도 또한 “오리”강으로 이름을 얻은 것인데

그러나 이 오리강은 영평부(永平部)의 난하(灤河)니,

예(濊)가 처음 난하(灤河) 부근에 나라를 세웠으니

일주서(逸周書)에 영지(令枝)와 관자(管子)의 이지(離枝)가 다 예(濊)의 한역(漢譯)이며,

 

예(濊)가 차차 동쪽으로 옮겨 두만강 내의 연안에 분포하였으니

중국 한나라 사람(韓人-한인) 장량(長良)이 역사(力士)를 구하던 창해국(滄海國)과

한무제(漢武帝)와 전쟁(戰)하던 남려왕(南呂王)의 창해국이 다 그것이요,

 

그 일부가 다시 남하하여 지금 강원도 등지에 분포하였으니

삼국지의 예(濊)가 다 그것이다.

 

삼국사기에는 혹 읍루 즉 말갈을 예(濊)로 기록한 곳도 많으니

고구려 태조본기에 ‘마한예맥을 거느리고(率馬韓濊貊)’와

 

김인문 전에 ‘고구려가 성채의 견고함을 믿고 예맥과 결탁하여 몹쓸 짓을 하였다

(高句麗負固與濊貊同惡)‘ 등인데,

 

선배유학자들이 다만 예(濊)란 글자 표면상의 뜻만 좇아 그 계통을 구하므로

예(濊)의 집안 계보가 비상히 어지럽고 어수선하게 되었으니

그 상세는 따로 전적인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 여기므로 아직 중지한다.

 

위의 다섯 국가 가운데 옥저, 예(濊) 양국은 고구려에 복속한 나라로 독립한 왕국이 아니다.

 

5국의 지리강역은 선배유학자의 고증이 대략 옳으나,

다만 북부여를 지금 개원(開原)이라 함은 그 말엽에 옮겨와 산 서울을 그 원래 주둔지로 오인한 것이다.

 

5국이 다 후삼한과 그리 밀접한 관계가 적었고 가장 관계가 많았던 나라는 낙랑 대방 양국 이어늘

삼국지에는 이를 빼었으니 다음절에 약론코자 한다.

 

 

3.6. 후 삼한과 낙랑 대방의 관계

 

낙랑(樂浪), 낙랑(樂良), 평나(平那), 평양(平壤), 백아(百牙) 등을 모두 “펴라”로 읽는 것이 옳음은

이두문 해석법, 평양 패수고, 동서 양 낙랑고 등 편에 상세히 견해를 밝혔거니와,

 

낙랑국이 당시 열국중 후삼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음은

신라본기의 신라 초기시대와 백제본기의 백제 초기시대에

낙랑의 침략이 빈번한 사실에 의거하면 명백하거늘

 

선배유학자들이 중화 역대 사가의 붓에 속아

평안도를 떼어내 한나라(漢)의 낙랑군을 만드는 동시에

낙랑국을 이동하여 강원도 춘천군에 특설한 것이다.

 

무엇에 의하여 춘천을 낙랑이라 하느냐 하면,

백제본기 온조 30년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東有樂浪)’라고한 구가 그 유일한 증거라 하나,

‘동서 양자 상환고’에 보임과 같이 삼국사기에는 동서 양자가 많이 바뀌어 있다.

 

낙랑국의 왕의 성은 최씨니 그 기원을 확증할 수 없으나

대개 기준(箕準), 위만(衛滿)의 무렵에 평안도를 나누어 차지하고, 일시 강성하여

그 뒤에 자주 남방의 신라 백제를 침략 핍박하더니 그 말기의 왕 최리(崔理)가

고구려 왕자 호동을 낭림산(狼林山)의 삼림(森林-沃沮:옥저) 같은 곳에서 만나

그 용모의 아름답고 수려함에 빠져서 사위를 삼았다가 고구려에게 망하였으나

 

그에 소속한 수십 소국이 그 종주국(宗國-종국) 최씨의 멸망에 원한을 품어

고구려에게 불복하고 서쪽으로 한(漢)을 통하여 이에 한의 세력이 낙랑에 침입되었다.

 

그러나 한나라(漢)와 낙랑국의 관계는 명나라의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

송황영(松篁營) 등 여러 수비 주둔지처럼 한나라(漢-한) 관리의 발길이 이곳에 오지 아니하며

한나라 황제의 조칙과 명령이 이곳에 미치지 못하였다.

 

낙랑군은 낙랑국에서도 천여 리를 더 간 요동에 있는 군명이니,

 

한 무제가 위만을 멸하고 이상적 군현으로 진번 현도 임둔 낙랑 4군을 만들려 하였으나

조선의 저항이 강경하여 동북에서 졸본부여(卒本扶餘-後來 후일의 고구려)가 일어나매

진번 현도 2군(郡)이 공상이 되고 말았고,

 

압록강 동쪽에서 낙랑국 최씨가 일어나매 낙랑 임둔 2군도 공상이 되고 말았거늘,

요동경내(遼東界內)에 낙랑 현도 등 4군을 허위로 설치하여 사책(史冊)을 장식하고

 

최씨 멸망후(고구려 대무신왕과 한 무제의 무렵) 낙랑국에 소속되었던

낙랑 소국 여러나라와의 교류로 인하여 그 여러나라의 이름을 가져다가 그 허위로 설치한 낙랑군 가운데

허위로 설치한 낙랑 여러 현의 이름을 만들고,

 

고구려와 고구려 속국인 개마(蓋馬), 은대(殷臺) 등의 이름을 가져다가

허위로 설치한 현도 3현의 이름을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최씨 멸망후 수십년만에 대방국이 장단(長湍) 등지에서 일어나 6, 7 소국의 맹주가 되었다.

비록 그 주권자의 성명과 나라의 지속기간이 얼마였는지 역사책(史冊)에 보이지 않았으나,

 

백제본기 책계왕 원년에 백제왕의 처, 보과(寶菓)의 아버지 대방왕이 보였으며,

기림 니사금 3년에 낙랑 대방 양국이 항복한 사실이 기록되어있으니,

(대방국이) 그 일시의 소왕국 됨이 명백하다.

 

한가제왕(漢家帝王)들은 이를 따라 또 요동에 대방군을 허위로 설치하였다.

 

여태까지 우리의 조선 사가들이 매번 조선 고기(古記)와 중국사의 충돌되는 사실을

억지로 조화시키느라고 고기(古記)를 삭제하고 고치고 칠해서 지워버린 것이 적지 아니한 중

 

낙랑의 사실은 피차 모순이 더욱 심하므로, 조화에 더욱 고심하여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과 교섭한 낙랑왕을 낙랑태수로 고쳤으며,

 

삼국유사에는, 한나라(漢)에 없는 주 이름인(州名-주명인) 평주(平州)와

한나라에 없는 관명, 도독(都督)을 내어 사군 이부설(四郡二府說)을 날조하는 등

이같은 등등의 망령된 글이(妄筆-망필이) 많으므로 그 일반화된 와전과 오류를 발견키에 더 곤란케 되었다.

 

여하간 중국사 중 조선 일을 가장 자세히 적은 삼국지에 낙랑 대방이 빠지므로

전후의 맥락이 끊기어 큰 결점이 되었다.

 

 

3.7. 후삼한과 북방 제국의 언어

 

당시에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현 조선 각 지방과 동삼성(東三省: 지금 중국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각지의 언어통일이다.

 

이제 삼국지에 의거하면

고구려전에 “언어와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은 대부분 부여와 같다(言語諸事多與夫餘同)”라 하며,

옥저전(沃沮傳)에 “언어는 고구려와 대체로 같다(言語與句麗大同)”라 하니

 

부여 옥저 구려 삼국의 지방은 곧 흑룡, 길림, 평안, 함경 등이니,

위 각지의 언어가 동일한 실증(實證)이요,

 

예전(濊傳)에

스스로 일컫기를‘(고)구려(句麗)와 같은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성질은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고 염치가 있어, 남에게 구걸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언어와 예절 및 풍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다.

(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原慤少嗜欲有亷恥不請句麗言語法俗大扺與句麗同)”라고 한 바

 

‘불청(不請)’ 2자가 문리에 맞지 않으므로(文理不屬-문리 불속하므로)

건륭제 흠정 삼국지의 고증(考證)에, 청(請)자를 암(諳: 알다)의 오자라 하여(誤-오라하여)

 

“고구려의 언어를 알지 못하였다(不暗句麗言語)”로 한 구를 만들었으나

이는 억측 판단이다.(臆斷-억단이다.)

 

후한서 조선열전이 삼국지의 것을 베껴 기록(抄錄-초록) 했음은 이미 전술하였거니와

 

후한서 예전(濊傳)에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말하는데, 언어와 법령과 풍속이 대체로 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성품은 우직하고 건실하며 욕심이 적어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與句麗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其人性愚慤少嗜欲不請匄)”라 하였은즉,

 

삼국지의 불청구려(不請句麗)의 구(句)는 개(匄: 빌다)의 오자(誤字)이며(誤-오며)

려(麗)는 중첩 기재해서 넘친 글자니

 

그 본문이 “남에게 구걸하지 않으며 언어, 법령,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

(不請匄言語法俗與句麗同)”일 것인데

 

불청개(不請匄: 남에게 구걸하지 않는다)가 한 구요,

언어법속구려동(言語法俗句麗同: 언어, 법령,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 )이 한 구이다.

 

그러하여야 윗글의 여구려동종(與句麗同種: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다)과 의사가 접속될 것이니,

예와 (고)구려의 동언어(同言語: 언어가 같음)임이 명백하다.

 

진한전에 비록 “언어가 마한과 같지않다(言語不與馬韓同)”이라 하였으나

이는 진한의 진(辰)은 진인((秦人)의 진(秦)으로 위증(거짓 증명)하는 동시에

 

“국(나라)을 방(邦)이라하고 궁(활)을 호(弧)라한다...진나라 사람들과 유사하다

(名國爲邦弓爲弧……有似秦人)”의 거짓 기록(誣錄-무록)을 억지 변론(臆辨-억변)키 위하여 쓴 것이요

사실 기록(實錄-실록)이 아니다.

 

진한이나 마한에 신지(臣智), 읍차(邑借) 등 동일한 관직명(官名-관명)이 있고

달리 언어가 다르다는 증거나 흔적이(證跡-증적이) 없으니 또한 동일한 언어이었던 것이다.

 

다만 낙랑 대방 양전(兩傳: 낙랑전, 대방전)이 빠졌으므로 삼한과 고구려 등의 중간연락이 끊어지며

따라서 낙랑 대방이 부여 고구려와의 언어관계가 어떠하였던지,

삼한이 낙랑 대방과 언어관계가 어떠하였던지 삼국지에는 기재된 것이 없으나

 

신라의 악곡, 반섭조(樂曲般涉調)를 백제인이 노래하며,

고구려의 내원성(來遠城)과 백제의 무등산(無等山)을 신라인이 노래하며,

 

호동이 고구려 궁중 미성년 아동(童子)으로서 낙랑에 들어가 최왕의 딸과 연애를 성취하며,

 

서동이 백제 궁중 16세, 꽃같은 나이(妙齡-묘령)의 태자로

신라에 몰래 들어가 아이들 무리(群童-군동)를 꾀어 노래를 짓고 선화공주를 유인한 사실 같은 것이

모두 삼한 낙랑 고구려 등의 언어가 서로 환하게 통했음을(通曉-통효했음을) 설명한다.

 

그러면 경상도의 신라, 경기 충청도 등의 백제, 강원도의 예, 평안도의 낙랑,

함경도의 옥저, 길림 봉천 흑룡 등의 부여와 고구려가 다 언어가 동일하던 실증이 있었다.

 

오직 읍루 일부가 언어가 좀 다르므로 후한서에

“읍루는 동이(족) 중에서 언어가 홀로 다르다(挹婁在東夷中言語獨異)”라 함이나,

 

읍루는 만청족(滿淸族: 만주 청나라 족속)의 선대(先代)니

 

만청(滿淸)과 조선의 고어(古語: 옛 언어)가 서로 통한 것이 많은즉

이것도 아주 판이하게 다른 언어는 아니었던 것이다.

 

설령 소부분인 읍루를 제외할지라도 고조선 전체(全幅-전폭), 즉 지금 조선 13도와

지금 관동 삼성(關東 三省: 현재 중국 동북 3성-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이

고대의 언어가 통일된 민족으로,

또 사책(史冊)에 의하여 보면 그 관제와 풍속은 더욱 차이가 적었던 것이다.

 

영국사를 보면 16세기까지도 런던과 웨일즈의 서로 가까운 지방으로도 언어가 불통하여

웨일즈의 어느 항구에 정박한 상인이 계란을 사서 먹으려 하나

에그란 말을 알아듣는 자가 없어 손으로 난(卵: 달걀)의 모양을 형용한 결과

감이 나오며, 배가 나왔다는 웃음거리가(笑話-소화가) 있으며,

 

그밖의 서양 여러나라가 모두 근세교육이 발달되기 전에는 한 국내에 각종의 언어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 사투리를 쓰는 습관이 남아있는 나라가 많으며

중화는 문물과 정치가 통일된 지 수천년이나 지금에 동일한 성내(省內)에서도 언어 불통되는 곳이 많거든,

 

하물며

“백리마다 풍습이 다르고 천리마다 습속이 다르다(百里不同風 千里不同俗)”고 하던 고대이랴.

 

조선은 고대(古代)에 적지 아니한 강토에 언어 풍속이 남보다 먼저 통일된 민족으로서,

망망한 고대(古代)에 수두 신목(神木) 아래에 신권 정치적 통일이 있은 이후에는

다시 정치통일이 행해지지 못하고

 

압록강 이서(以西)를 떼어버리고(割棄-할기하고),

게다가 또 매번 북방 대국의 문화와 위력(威力)을 빌린 연후에야

구구한 소통일(小統一)의 국가로 존재케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원인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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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 차 례 -----

 

1. 서론

2. 낭 유 불 삼가의 원류(郎 儒 佛 三家의 原流)

3. 삼교의 정치상 투쟁

4. 예종과 윤관의 대 여진 전쟁(이하는 원본에 내용이 없어 본 수정본도 이하내용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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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민족의 성쇠는 매양(늘) 그 사상의 추세 및 방향 여하에 달린 것이며,

사상 추세와 방향의 혹 좌(或左), 혹 우(或右)는 매양(늘) 모종 사건의 영향을 입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근세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이 무슨 사건에 원인함인가.

 

어찌하여 효하며 어찌하여 충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공자를 높이며 어찌하여 이단(異端)을 배척하라 하는가.

어찌하여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팔괘(八卦)를 낳는다 하는가.

어찌하여 수신(身修)연후에 가제(家齊: 齊家-제가)요 가제 연후에 국치(國治:치국-治國)인가.

어찌하여 비록 두통이 날지라도 갓과 망건을 끄르지 않으며

티눈이 있을지라도 버선을 신는 것이 예이었던가.

 

선성(先聖: 성현)의 말이면 그대로 좇고, 선대(先代: 앞 세대)의 일이면 그대로 행하여

일세(一世: 한 시대)를 몰아 허약, 쇠퇴, 부자유의 길로 들어감이 무엇에 원인함인가.

 

왕건의 창업인가, 위화도의 회군인가

임진의 왜란인가, 병자의 호란인가

사색의 당파인가, 반상의 계급인가

문관은 귀하게 무관은 천하게 여긴 폐해인가

정주학설이 끼친 해독인가

 

무슨 사건이 전술한 종교 학술 정치 풍속 각 방면에 노예성을 산출하였는가.

 

나는 한마디로 회답하여 가로되

고려 인종 13년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 한다.

 

서경전역(西京戰役)의 양편 병력이 각 수만에 불과하며,

전역(특정 지역의 범주 내에서 벌어지는 단일 군사작전)의 시작과 끝이 2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 전역의 결과가 조선사회에 영향을 끼침은

서경전역이 이전에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의 전역보다도,

서경전역 이후 고려 대 몽고의 60년 전역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 컸으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년간에 서경전역에 넘어설 대사건이 없을 것이다.

 

서경전역을 역대의 사가들은 다만 왕의 군대가

반역한 역적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그 전역이

낭불 양가 대 유가의 전쟁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전쟁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事大黨)의 전쟁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전쟁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하였으므로

조선사(朝鮮史)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束縛的)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진전(進展)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아래에 전역 발생의 원인과 동기를 먼저 서술하고 그 다음으로

전역으로 하여 생긴 영향을 논하려 한다.

 

 

2. 낭 유 불 삼가의 원류(郎 儒 佛 三家의 原流)

서경전역의 원인을 말하려면 당시 낭 유 불 삼가(三家)가 대치한 대세부터 논술할 필요가 있다.

 

일(一), 낭(郎)은 곧 신라의 화랑이니,

화랑은 본래 상고시대 소도제단의 무사니(武士니)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皁衣: 검은 옷)를 입어 조의선인(皁衣仙人)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였다.

 

화랑을 국선, 선랑, 풍류도, 풍월주(國仙, 仙郞, 風流徒, 風月徒) 등으로 칭하였다.

 

삼국사기는 그 저자 김부식이 화랑을 원수로 여겨 배척하는 유교도 중에도 가장 속 좁고 잔혹한 인물이므로,

본국에 전해오는 선사, 화랑기(仙史, 花郞記) 같은 것은 모두 말살하고,

 

다만 외국까지 전파된 화랑은 한두가지 사실과 화랑세기의 한두 구절

곧 당나라 사람이 지은 신라국기, 대중유사(新羅國記, 大中遺史) 등에 쓰인 화랑에 관한 문구를 베껴 기록하여

그 원류를 혼란하며, 연대를 뒤집고, 허다한 화랑의 아름다운 일을 매몰하였으니,

이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이에 관한 곡절은 다른 날에 그에 관한 전적인 책(專書-전서)으로 자세히 논하려 하니 여기에는 생략하거니와,

 

화랑은 곧 신라 이래 국풍파의 중진이 되어 사회 사상계 제일의 지위를 점령하던 자(者)이다.

 

이(二), 유(儒)는 공자를 높이 받들어 숭배하는 자들이니,

옛적에 사가들이 매양(늘) 존화주의(尊華主義: 중국 떠 받드는 주의)에 취하여

역사적 사실까지 위조하여 가며 태고부터 유교적 교의(敎義)가 조선에 널리 퍼졌던 줄로 말하였으나,

 

비치나 불구레로 왕을 호칭하며, 말치나 쇠뿔한으로 관직 명칭을 짓던 시대에는

공자 맹자의 이름을 들은 이도 전국에 몇 명이 못되었을 것이다.

 

대개 유교는 삼국 중 말엽(中末葉: 중기 내지 말기)부터 그 경전이 얼마큼 수입되어

경서(經書)인 예기를 강의하며 사서(史書)인 춘추(春秋)를 읽는 이가 있어

뿌리를 박아 고려 광종 이후에 점차 성행하여 사상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삼(三), 불(佛)은 인도로부터 중국을 지나 조선에 수입된 석가의 종교니,

삼국 말엽부터 성행하여 조정이나 민간에서 다 같이 숭배하여 떠 받들고,

불교가 비록 세상 일에 관계없는 세속을 벗어난 종교이나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문득 정치상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당초에 신라 진흥대왕이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만세(萬世)의 계책을 정할 때

각 교의 경알(傾軋: 다투고 삐걱거림)을 염려하여 유 불 양교는 평등으로 대우하며,

 

화랑은 삼교의 종교 취지를 포함한 자라 하여 각 교의 위에 위치케 하며, 각 교도의 상호 출입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신라사를 보면, 전밀(轉密: 김흠운전-金歆運傳에 보임)은 불교의 승려로 화랑 문노(文努)의 제자가 되고,

안상(安常: 삼국유사에 보임)은 화랑인 영랑(永郞)의 뛰어난 제자로

승통(僧統: 승려의 최고 우두머리)인 국사(國師)가 되고,

최치원은 유 불 양교에 출입하는 동시에 또한 화랑도의 대략을(大要- 대요를) 섭렵(涉獵)함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매양(늘) 시세를 따라 변천하고 사람의 기대대로 되지 아니하는데야 어찌하랴.

진흥대왕의 각 종교의 조화책도 불과 수백년에 무효로 돌아오고, 고려 인종 13년에 서경전역이 일게 된 것이다.

 

 

3. 삼교의 정치상 투쟁

고려태조 왕건이 불교로 국교를 삼고 유교와 화랑도 또한 같이 쓰더니,

그 뒤를 잇는 자식에 이르러 종종 중화를 높여 사모하여

 

광종은 중국 남방인 쌍기(雙冀)를 써서 과거를 설립하고 더욱 유학을 장려할새

만일 유교의 경전을 통달하는 중국인 이러르면 대관을 시켜 후한 봉녹(厚祿-후록: 후한 봉급)을 주며,

또 신하의 좋은 저택을 빼앗아 준 일까지 자주 있었고,

 

성종(成宗)때에 이르러서는 최승로 등 유학자 등을 등용하여

재상을 삼아 낭교도(郎敎徒-화랑교도)나 불교도는 모두 압박하고 오직 유교만을 존중 숭상하기에 이르렀다.

 

불교는 원래 세상을 벗어난 종교일 뿐 더러

어느 국토에 수입되는지 매양(늘) 그 나라 풍속 습관과 타협하기를 잘하고 타교를 심히 배척하지 않지만,

 

유교는 그 의관(衣冠), 예악(禮樂), 윤리, 명분 등으로 그 교의 중심을 삼아

전도되는 곳에는 반드시 표면까지 동화를 요구하며 타교를 배척함이 비상히 격렬하므로,

 

이때의 유학 장려는 낭파(화랑교도파)와 불파(불교파)를 불평히 여길 뿐 아니라

곧 전국 인민의 좋아하지 않는 바 이었다.

 

이런 관계는 대개 공자가 춘추(春秋)의 “기록해야 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한다

(筆則筆削則削-필즉필삭즉삭) 주의(主義)를 높이 받드는 사가들의 삭제(削除)를 당하여,

상세한 경위는(顚末-전말은) 기술할 수 없으나

 

불명확하고 잘 갖추어지지 않은 사책(史冊) 속에 남아있는

한, 두 사실을 미루어 그 전체를 대략(大約-대약) 상상할 수 있다.

 

고려사와 동국통감을 의거하매,

성종 12년에 거란 대장 소손녕(蕭遜寧)이 쳐들어와 북계(北界)를 공격하며,

또 격문(檄文)을 보내 80만 병(兵)이 장차 계속하여 이르리라 호통을 치니

 

온 조정이 놀라 겁을 먹고

서경 이북을 떼어 화해를 구걸(乞和-걸화)하자는 의론이 일어났는데,

 

그때 홀로 서희 이지백 양인이 있어 그것은 계책이 아님을 따져(박론하여),

이지백은 아뢰기를 선왕의 연등(燃燈), 팔관(八關), 선랑(仙郞) 등 회(會)를 회복하고

 

다른 나라의 이법(理法: 유교)을 배척하여 국가태평의 기틀을 보존하며,

신명(神明: 천지신명)에 고한 연후에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화의함이 늦지 않다 하였다.

이는 이지백이 성종의 중화문물만 즐거이 흠모하여 국민 감정에 위반함을 빗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지백이 가리킨 선왕은 고려의 선대요, 선랑회(仙郞會)는 화랑회니,

태조 이래로 대개 신라의 화랑회를 중흥하여 연등 팔관 등 회와 병행하다가,

 

성종이 유교를 독실하게 믿고 중국의 문화와 풍습(화풍-華風)을 숭상하여

낭(화랑), 불(불교) 양가의 회(會)를 폐지하였던 것이 명백하다.

 

이제 외국의 침략을 당하여 같이 높은 존중의 예우를 받던

유교의 여러 신하들이 외적을 물리칠 계책은 추호만큼도 연구해 제출치 못하고

도리어 땅을 떼어주고 나라를 팔아먹자는 거론으로 국왕을 권하는 고로,

 

이지백의 이 아룀은

제1로 유학하는 신하의 나약을 크게 꾸짓고,

제2로 낭 불 양가를 위하여 원통함을 소리내고,

제3으로 국풍파를 대표하여 중화숭배자를 질타함이니,

 

여기에서 낭 불 양가의 국풍파들이 유교도에 대한 불평을 마음속에 품고 있음이 이미 오래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뒤로부터 조정에서 논의하는 자가 드디어 양파로 나뉘었으니,

낭가는 매양(늘) 국체상(國體上: 국가 형태상)에는

독립 자주 칭제건원(稱帝 建元: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을 주장하며,

정책상에는 병사를 일으켜 북벌하여

압록 이북의 옛 강토를 회복함을 힘주어 외치었고,

 

유가는 반드시 존화주의(尊華主義-중국 숭상주의)의 견지에서

국체(國體: 국가형태)는 중화의 속국됨을 주장하고,

따라서 그 정책은 비굴한 언사와 후하게 물건을 받침으로 대국을 섬겨

평화로 1국을 보전함을 힘주어 외치어 피차 반대의 지위에 서서 항쟁하였었다.

 

예를 들면 현종 말년에 발해의 중흥을 보조하여 거란을 쳐서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곽원(郭元)이 있는 반면에

본토를 삼가 지켜 백성을 보전하자는 최사위 등이 있으며,

 

덕종 초년에 압록강 다리를 부수어 치워버리고구류된 우리나라 사신의 회환을 거란에게 요구하다가

듣지 않으면 외교를 단절하자는 왕가도(王可道) 등이 있는 반면에

외교를 근신히 하여 전쟁으로 인한 재앙이 없도록 하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있으며,

 

기타 고려조 역대 외교에 매양(늘) 자존의 경론을 발표한 자는

거의 낭파나 혹 간접으로 낭파의 사상을 받은 자(者)요,

비굴한 언사와 후하게 물건을 바침의 사대론(事大論)을 지킨 자(者)는 대개 유교도들 이었고,

 

불교는 자체의 성질상 정치문제에 관하여 낭가와 같이 격렬히 계통적 주장을 가지지는

아니하였으나 대개는 낭가와 접근하였었다.

 

팔관회를

삼국사기에는 불가의 법회라 하고,

해동역사에는 한나라 때의 대포(大酺: 국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신하와 백성이 모여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

와 같은 왕실의 큰 경사의 경사모임(慶會-경회)이라고 하고,

 

근래 사람 이능화가 저술한 불교통사에는 고려사 태조 천수(天授) 원년에

“팔관회를 설치하여...그 사선악부(設八關會…其四仙樂部)”와

"태조 유훈(遺訓)에 팔관회는 하늘과 산천과 용신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八關所以事天及山天龍神)“와

의종 32년에 "이제부터 팔관회는 양반가 중에서 재산이 넉넉한 자를 미리뽑아 그들을 선가로 정한다

(自今八關會 豫擇兩班家産饒足者定爲仙家)" 등의 말을 인용하여,

팔관회를 신선을 섬기는 모임으로 불사(佛事)를 겸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선(四仙)은 삼국유사에 의거하면 화랑의 사성(四聖) 영랑, 부례랑(永郞, 夫禮郞) 등의 겸칭이요,

선가(仙家)는 그 상하문을 참조하여 또한 화랑을 가리킨 것인데

대개 낭 불 양가의 관계가 접근한 이래로 낭가의 소도대회(蘇塗大會)에 불가의 팔관계(八關戒)를 쓴 것이니,

 

팔관을 대포와 같은 종류(大酺의 類-대포의 류)이라 함도 망녕된 판단 이어니와,

팔관(八關)의 선가(仙家)를 중국선교의 선(仙)으로 인식함도 대착오(大誤-대오)이다.

 

고려 초중엽에는 화랑이 그 사상으로만 사회에 전할 뿐 아니라 실제 그 회가(會-모임이)

존속하여 왔으므로 화랑을 반대하는 유가에서도 그 명칭과 의식을 많이 훔쳐 가졌으니,

 

그 한 둘의 예를 들면 최공도(崔公徒) 노공도(盧公徒) 등은

화랑의 원랑도(原郞徒), 영랑도(永郞徒) 등을 모방한 것이며,

 

학교의 청금록(靑衿錄: 시경의 청청자금에서 나온 말로 유생의 명단을 말함-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은

화랑의 풍류황권(風流黃卷: 화랑의 명단을 적은 책-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을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사가의 삭제를 당하여 화랑의 사적(史蹟)이 희미해졌으니 어찌 한숨지어 탄식할 바가 아니랴.

 

4. 예종과 윤관의 대 여진 전쟁

(본 수정본의 원본인 인터넷 판 위키문헌 “조선사연구초”에 내용이 없으므로

이하 내용을 생략함 - 내용을 보실 분들은 참고문헌인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을 참고 하시기 바람)

5....<원본이 미완으로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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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본출처: 조선사연구초(인터넷 판 - 위키문헌)

http://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C%82%AC_%EC%97%B0%EA%B5%AC_%EC%B4%88

 

2) 참고문헌: 조선상고문화사(외), 비봉출판사, 2008년판